154화 epist?m? (1)
테네브로즈는 란드와르에게 자신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사촌형님에게 당한 일을 읊다가, 급기야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저걸 어떻게든 처리하지 않는다면 여기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생각이 없다는 거였다. 말하는 투가 꼭 콩순이 인형을 사 달라며 장난감 매대 앞에 드러누운 세 살배기 같았다.
"사제야, 미치겠다. 내가 너 때문에 미칠 것 같아."
"제가 지금 어려운 부탁을 드리는 것 같진 않은데요. 대체 요정 열셋을 죽이는 것과 열넷을 죽이는 것이 무슨 차이라고 그러시는 겁니까."
솔로틀과 로안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한데 테네브로즈까지 이러고 있으니 첩첩산중에 심심산천이었다. 사정을 듣고 동정심이 배가되기야 했지만, 어린 시절의 벤트레스가 실로 개망나니였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 이유로 우호적인 상대를 죽이기에는 아직 거리낌이라는 게 남아 있었다.
"마음은 이해하는데 공은 공이고 사는 사 아니냐."
"나으리께서 제게 툭하면 욕을 하시는 것도 공적인 태도란 말씀이십니까?"
"이 개새끼야."
"또 욕을 하셨잖습니까."
흐느끼면서도 할 말은 다 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이야기하면 요정 열셋이나 열넷이 아니라 열다섯을 죽이게 될 것 같았다. 란드와르는 방법이 없음을 깨닫고 벤트레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웃음을 참기 어려운 듯 입술을 잘근거리고 있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걸까, 아니면 목숨이 별로 아깝지 않은 걸까?
"안 되겠다. 맹약에 조항 하나 더 넣자."
"우리 아우님을 달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요."
란드와르는 손가락을 튕겨 미오리타를 불러냈다. 천계 분위기가 안 좋은지 견습 천사까지도 얼굴이 죽상이었다. 개 같은 짓이야 파울리스가 다 했지 이 꼬마가 무슨 죄인가 싶었지만 지금은 천사까지 살필 겨를이 없었다.
"자, 따라 해라. 선서. 만약 아즈리온의 허락 없이 테네브로즈에게 접근하면 하루간 벙어리가 되고 그 이후부터는 신경통이 생긴다. 접근이란 먼저 말을 거는 것에서부터 물리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까지를 포괄한다."
"그러면 말하지도 않고 건드리지도 않으면서 따라다니는 건 됩니까?"
한국인으로 태어났으면 스토킹 범죄로 호적에 빨간 줄이 그였을 놈이었다. 란드와르는 으르렁거리듯 덧붙였다.
"하나 더 추가. 아무 용건 없이 테네브로즈의 근처를 어슬렁거리면 다리가 한 시간 동안 마비된다."
벤트레스는 그대로 따라 읊었고, 테네브로즈에게로 고개를 홱 돌렸다.
"친애하는 아우님, 잘 들었지? 이것 봐."
그러고는 세상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입이 벙긋거리는데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보면 맹약이 효과를 발휘한 모양이었다. 벤트레스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더니 이내 소리 없는 폭소가 터져 나왔다. 테네브로즈도 겨우 만족했는지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서로 마음에 들어 하니 잘 된 일인 것 같은데 어쩐지 기분이 나빴다. 실제 나이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적 나이마저 자신과 엇비슷한 새끼들을 상대로 유치원 선생님 노릇을 하고 있어서인 듯했다. 란드와르는 자문했다. 도대체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병신을 둘이나 맡게 된 걸까?
한때 질색했던 사람들의 면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일단 펠로시부터. 녀석이 글러먹은 도박중독자인 건 사실이지만, 사고도 많이 치기야 했지만 펠로시는 최소한 이해가 가능한 상대였다. 벨레다도 그렇다. 아니, 겪은 일에 비하면 실로 정상적이라는 평이 옳겠다. 유소년기 전체를 감금당한 채 보냈는데 그럭저럭 사회생활이 되는 시점에서 기적이 아닌가? 그리고 헤이딘은 자기 연구에 너무 몰두해서 문제일 뿐이지 볼로디아에 필적하는 상식인이다…….
잠깐만. 이럴 때가 아니었다. 헤이딘과 나눌 이야기가 있었다.
"어르신이랑 얘기 좀 하고 올 테니까 일단 둘이 떨어져 있어라. 벤트레스는 동생 건드리지 말고. 건드리면 여기서 죽이고 갈 거야."
거기까지 말한 란드와르는 벌떡 일어나서 볼로디아에게로 다가갔다. 로안을 옆에 뉘인 뒤 건물 잔해에 걸터앉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묵상을 방해하지 않을 만큼 조심스럽게 로안에게서 반지를 빼냈다.
* * *
란드와르는 충분히 멀리 떨어진 다음 반지를 꼈고, 심각한 표정의 요정 소년을 마주했다. 보이진 않았지만 줄곧 주위를 맴돌면서 대화를 시도했을 게 분명했다.
"어르신, 미안합니다. 일이 하도 많아서 반지를 잠깐 잊고 있었어요."
<높으신 분들끼리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오. 내가 추측한 바에 따르면 저 녀석이 지금껏 다른 꿍꿍이를 품었던 것 같은데… 벤트레스는 그걸 진작부터 알았고 말이오…….>
"어르신의 생각이 맞습니다. 핵심부터 말하자면, 황무지로 갈 겁니다. 도망자 요정들을 만나야 해요. 그러려면 어르신께서 궁전에서 돌아다니는 요정들에게 말을 붙여 봐야 합니다."
게임으로 치면 이다음 시나리오는 <황무지의 학자들>이 될 터였다. 첫 번째 단계는 황무지에서 슈문을 따르는 도망자 요정들과 접선한 다음 그들의 은거처에 초대받는 것.
원래는 만날 기회를 잡는 것도, 신뢰를 얻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슈문은 추종자에게 여러 은혜를 베풀었고, 거기에는 기억의 궁전도 포함되었다. 슈문의 신도들은 그곳에서 논문을 찾아 읽거나 서로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헤이딘이 도와주기만 한다면 첫 번째 단계를 건너뛰는 게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기억의 궁전에서? 나우파나 폐허가 황무지 사람들과 무슨 관련인지 모르겠소만…….>
"설명을 하죠. 상당히 복잡하고 낯선 내용일 테니 미리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란드와르는 경위를 납득시키느라 오랜 시간을 썼다. 사이사이에 헤이딘의 질문과 짧은 신음이 섞여들었다. 기나긴 이야기가 끝난 후, 유령은 엉터리 보고서를 받아든 상사처럼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다면… 이 세계를 떠받치는 존재는 따로 있고, 신들은 관리직을 일임 받았을 뿐이란 말이오? 요정들의 신이나, 인간들의 신이나?>
"맞습니다."
<그리고 인간 쪽의 관리자가… 그 높으신 분의 이름을 완전히 지웠다고? 완전히? 자신들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꿈 조각이 본체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그것까지도 맞습니다. 이름을 다시 찾아서 빈 부분을 채워 넣어야 해요. 그걸 조건으로 꿈 조각을 조금만 더 빌려 쓰기로 했습니다. 문제는 그걸 아는 이들이 이시 타브와 슈문밖에는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고요."
<이방인들이야 처음부터 돌려줄 생각이 없었다 쳐도… 상대는 저승의 청지기라고 했잖소. 청지기가 주인의 이름을 모른다면 이상한 일이 아니오?>
헤이딘이 반론했다. 란드와르로서도 한숨을 내쉴 일이었다.
"솔로틀이 저승의 청지기가 된 건 꿈이 시작되고도 한참이 지난 다음입니다. 잠깐을 제외하면 늑대가 계속 잠들어 있었단 말입니다. 반면 이 시점에서 세계가 생겨나기 전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건 슈문과 이시 타브, 둘뿐입니다."
<요정 신은 모두 다섯이잖소!>
"다른 신들은 이걸 알 수가 없어요. 피투성이 심장은 스카르파에게 넘어가면서 사실상 초기화가 되었고, 수정 심장은 오래전에 이 꼴이 났으니까요. 물론 타마기스의 황제라면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미친 시체보다는 슈문이 훨씬 나은 상대가 아니겠습니까……."
란드와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이시 첼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았다. 이면 세계에서, 핏빛 뱀이 떠들어 대는 내용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 지고하신 분께서 친히 행차하셨군! 당신의 권속이 이렇게 된 걸 보니 어떻더이까?
― 서로 초라한 꼴로 재회하게 되어 유감이오. 기억이 온전하셨더라면 그간의 회포를 나누어 보려 했소만, 아무래도 여기는 좋은 장소가 아니겠지.
서른네 살 이강현과는 관련이 없는 소리다 치고 귀를 닫은 게 패착이었다. 뭐가 어쨌든 들어는 봤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늑대의 이름까지도 알게 되었을지 모르지. 불분명한 가능성일 뿐이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뼈저리게 느껴졌다. 후회스러웠다.
<그 말까지 포함해서, 이 순간 모두가 내 꿈이라는 데에 걸고 싶소.>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내기를 걸 상대가 없더군요. 판돈도 마땅치 않고요. 아무튼… 와그다스 학자들과 접선을 해야 해요. 슈문을 만나야 합니다."
물론 석연찮은 부분은 있었다. 무엇보다도 <황무지의 학자들>은 시뮬레이터의 정규 시나리오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늑대의 이름을 찾을 여지가 남아 있었더라면 그걸 동선으로 잡았을 것 같지가 않았다.
란드와르는 게임의 전개를 상기했다. 시나리오의 목표는 슈문의 영토 깊숙이로 들어가 이시 타브의 공세를 막아 내고 와그다스 요정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그래서 슈문을 구출하는 것.
일단 NPC들의 대사를 통해서 그들이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암시는 계속 주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슈문을 구출한 다음에는 그 언급은 사라지고 만다. 개그식 연출처럼, "무슨 명령을 내렸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대사 하나만이 나오고 끝날 뿐.
가능성은 두 가지다. 시뮬레이터의 내용을 칼질한 다음, 실제의 이스트리아에서는 처세술로 그 상황을 넘길 속셈이었다는 것. 다른 하나는 공세를 버텨 내는 동안 슈문의 기억 역시 망가졌다는 것.
전자는 너무 안일했고, 생쥐들의 입장도 후자였지만… 후자일지라도 어쨌건 황무지로 가야 했다. 그 경우에는 이시 타브를 대면하는 것밖에는 답이 없었고, 최종전을 위해서는 슈문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니 부탁드리겠습니다."
<황무지 요정들은 경계심이 많다오. 그래서 내가 도움이 될지 의문이기도 하고… 일단은 고민을 해 보겠소. 모든 게 너무 혼란스럽게만 들려서…….>
"이해합니다. 생각에 방해가 될 테니 반지는 빼 두겠습니다."
란드와르는 헤이딘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까지 보고서는 반지를 갈아 끼웠다. 이제 남은 일은 폐허 바깥으로 자리를 옮겨 교단 수레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 * *
헤이딘은 슈문의 영토로 돌아가 생각에 잠겼다. 고요 속에서 그의 의식은 먼 시간을 거슬러올라 별채에 갇혔던 시절로, 벨레다를 만나기 전으로 되돌아갔다. 반지에 쓰인 각인 도면을 얻은 날이었다.
젊은 학자는 그를 도면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면서 상황을 설명했다. 배신을 들키자마자 이시 타브의 종복이 영토로 쏟아져 들어왔다고 했다. 슈문은 그걸 홀로 막아내느라 기억의 궁전을 전혀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고. 점점 대화가 어려워지다가 지금은 소통조차 끊긴 상태라고.
― 여러분도 곁에서 도와야 하는 게 아닙니까?
― 글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장본인의 뜻은 조금 다르셔서요. 우리가 궁전 서고에서 뭔가를 찾아야 한다는데요, 그 뭔가가 뭔지는 우리도 몰라요. 어둠 속에서, 새까만 칼린카를 잡으러 뛰어다니는 거죠. 방에 칼린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헤이딘은 와그다스 학파의 이론적 기반을 복기했다. 세계를 이룬 것은 마력이며, 마력 갈래의 움직임은 특정한 규칙과 논리식 아래 형성된다는 것. 따라서 모든 상태와 공간은 해석 가능한 명제의 집합이며 마법은 그러한 토대 위에서 가능세계를 다루는 일이라는 것. 이때 명제는 주어와 술어의, 즉 객체와 술어의 구조를 갖춘다는 것.
그리고 객체를 지시하기 위해서는…….
― 이름을 모르는 것의 이름을 어떻게 찾나요? 그건 뭐라고 해야 할까, 세계의 규칙과는 완전히 어긋나는 일이지요. 그쪽도 알겠지만, 이름은 존재론적 약속이에요. 대상에 접근하려면 이름이 필요하고, 이름이 없거나 잘못되었다면…….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젊은 학자와 만났을 때, 자신은 이미 세계의 진상을 마주한 것이다. 긴 고민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고 기억의 궁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눈꺼풀 아래의 어둠이 서서히 밀려나더니 망가진 서가와 종이 더미의 상(像)이 형체를 갖췄다.
* * *
란드와르 일행은 폐허를 벗어나 평야에 자리를 잡았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사제들이 노지용 수레를 이끌고 왔다. 타일라프람에서 교단 차원문을 타고 세카두 외곽 수도원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사제들은 폐허의 뒤바뀐 모습을 보자마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천 년간 악명을 떨쳐 온 마경이 정화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란드와르는 벤트레스를 소개하고 근엄한 신을 연기하면서, 사건의 진상을 잠시나마 잊으려 애썼다. 울쿠스의 죽음은, 흰둥이들의 역사는, 알세스트의 비겁함은 기억할 수 있지만, 기억해야겠지만 차원 생쥐들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잊을 수밖에 없었다.
뒷좌석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짙푸른 밤하늘은 어디가 끝인지 모르도록 높았고 먼 산의 능선은 하늘의 밑단을 갉는 자국이 되었다. 시선을 조금 위로 옮기자 나우파나의 별이 투명한 원환을 그리는 게 보였다. 수레가 속도를 더하면서 밤하늘도 함께 이지러졌지만 그 부분만큼은 오래된 셀식 만화영화의 배경처럼 한 점에 붙박여 있었다. 실로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광경이다.
그래서?
그는 여기가 만화영화의 한 장면이라고, 혹은 연극 무대의 일부라고 생각해 보았다. 저 하늘 위에는 남색 비단을 붙잡고 희미한 조명을 밝히는 일꾼들이 있다고. 그들이 일을 멈추면 우리가 알던 세상은 한순간에 무너질 것이라고. 그게 순전한 공상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고통으로 다가왔다.
선량하고 신실한 사람들이 있었고 사기꾼들이 있었다. 강현을 괴롭히는 요체는 그 둘을 분리하기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생쥐들은 오로지 더 많은 사람의 평화를 위하여 그 일을 했다. 늑대를 악몽에 밀어 넣고, 야망에 찬 장군과 마법사를 도륙하고, 흰둥이와 어떤 인간들의 삶을 망쳐 가면서.
창문을 약간 내리자 풀 냄새가 쏟아지듯 했다. 정겹도록 소박한 냄새였다. 닦이지 않은 땅을 따라 바퀴가 구르는 가운데 찬란하고 훌륭한 낱말들이 잘못 실린 짐처럼 덜컥거렸다. 바람소리에 수많은 사람의 함성이 섞여 들렸다… 번영과 진보를 위하여! 우리가 알고 사랑하는 세계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