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Catastrophisme eclaire (4)
마지막으로 뽑혀 나온 세 개의 혼은 앞선 것보다 유독 컸다. 솔로틀은 초록색 불꽃들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가장 크고 흐릿한 것을 골라 손바닥 위에 띄웠다.
"친우여, 오랜만이군. 나를 버리고 가더니 잘 지냈는가? 딱히 그래 보이진 않아서 유감이네. 다만 좋은 소식을 하나 전해 주자면, 내 형님도 그대와 별반 다르지 않은 꼴이 되었다는 걸세."
그 목소리에는 조소와 애도가 조금씩 섞여 있었다. 고개를 숙여 낄낄대던 솔로틀은 서글픈 듯 덧붙였다.
"그대는 죄업에 비해 너무 오랜 고통을 받았지. 이제 쉬게나."
개의 해골이 입을 벌리고는 불꽃을 집어삼켰다. 다물린 잇새로 섬광 같은 반짝임이 비치는 듯하더니 이내 사라졌다. 사위를 에운 것과 같은 어둠이 해골을 채웠다. 그리고 솔로틀은 남은 혼 중에서 타오르듯 빛나는 것을 골라들었고, 경청하는 태도로 바라보았다.
"그래, 어린 인간아. 마침 내게도 그 기억이 있다. 아주 오래된 수집품이지… 부탁을 들어 주겠다. 하나를 잃는 대신 하나를 얻게 되었으니 서로에게 좋은 일이로구나."
솔로틀은 나나우아친의 혼을 삼킨 것처럼 셀리멘의 혼을 거두었고, 로안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제야 소년이 처음으로 몸을 떨며 신음했다. 깨어나려는 걸까? 그렇게 물음을 던진 순간 더 큰 불안감이 강현을 덮쳤다. 단순히 깨어나는 게 더 나을지도 몰랐다.
그는 몇 가지 정황을 복기했다. 셀리멘의 기억이 로안에게만 이상 반응을 보였다는 것. 로안의 마력 적성이 무색 마력에 비정상적으로 특화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 어릴 적에는 알세스트의 현신이라고도 불렸다는 것. 그 별명은 분명 핵심을 꿰뚫고 있었을 것이다.
씨발, 이걸 왜 지금까지 생각을 못 했지? 지구인에게 환생은 오컬트일 뿐이라서? 강현은 숨이 훅 멎는 것을 느끼며 솔로틀에게로 다가갔다.
"죄송합니다만, 혹시, 이 꼬마가… 알세스트입니까? 기억을 돌려주는 중이시고요?"
"그렇지. 자네는 그걸 이제 알았단 말인가?"
솔로틀이 정신 나간 이공계 교수처럼 되물었다.
원래 영혼은 살아가면서 조금씩 뜯겨 나가고 망가지기 때문에, 그걸 고치는 과정에서 다른 것들과 뒤섞이게 된다고 했다. 그렇게 새로운 영혼이 탄생하는 거라고(해진 손수건들에서 멀쩡한 부분만 잘라내 조각보를 만드는 것과 같은 이치다). 교잡종의 영혼 역시 그렇게 만들어진다고.
반면 알세스트의 영혼은 영혼공학 때문인지 온전한 상태로 저승에 도착했다는 게 청지기의 설명이었다… 따라서 로안과 알세스트는 본질적으로 동일했다.
누구한테 하소연하지도 못할 좌절감이 혀끝까지 차올랐다. 알세스트는 원래의 아즈리온을 기억하고 있을 터였다. 강현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단번에 알아챌 게 뻔했다.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아니, 씨발, 애초에 그런 일을 할 때에는 의견을 좀 물어보셔야 하는 게 아닙니까?
하지만 전략적 동반자에게 욕을 퍼부을 수는 없었다. 지금은 차원 생쥐들보다도 솔로틀에게 호감을 사 두어야만 했다… 티아 씨, 이 생각도 듣고 계시죠? 대답은 안 하셔도 됩니다. 내 입장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도 앞으로 계속 이야기는 하고 지내야 할 테니까 욕은 하지 않겠습니다. 봐온 정도 있고요.
아니, 그런데 어떻게 이걸 다 숨기고 있었지? 양심이라는 게 없어요?
전담 천사에게 울분을 토해내던 강현은 초록색 불꽃이 훌쩍 가까워진 것을 깨닫고 정신을 차렸다. 솔로틀이 작고 흐린 불꽃이 담긴 유리병을 건네고 있었다. 메기도의 혼일 터였다.
"이건 자네가 맡게. 제 삼촌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더군. 슈문에게 보여주면 자리를 마련해 줄 걸세."
이 제안도 갑작스럽긴 마찬가지였지만 부담이 되지는 않았다. 어차피 다음 행선지는 황무지로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헤이딘이 메기도를 만나고 싶지 않아 한다면 세카두에 내버려두어도 될 테고. 강현은 가볍게 묵례하고서는 유리병을 품에 챙겼다. 솔로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망가진 부분은 이어 붙였고, 갇혀 있던 혼도 모두 회수했네. 다만 검사의 것은 보이지 않더군. 아마도 폭발에 휘말렸을 때 완전히 으스러진 모양이야."
"신경 써 주시는 점 감사합니다."
그는 만면에 비즈니스용 웃음을 띤 채로 매끄럽게 대답했다. 머리가 터질 것처럼 복잡한데도 이럴 수 있는 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놀라웠다. 그르렁거리는 신음이 텅 빈 해골 속에서 공명했다.
"원래는 자네도 한 패라고 생각했지. 헌데 정원사가 간원하더군. 저 이방인들과는 어딘가 달라 보인다고. 못미더운 놈이긴 하지만… 그래, 문제가 많긴 하지만 옆에 둘 만큼은 현명한 녀석이지. 우리의 신뢰가 또다시 배신당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겠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강현은 그렇게만 말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테네브로즈의 정신상태와 본인의 만족과 주변인의 고충에 대해 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겠지만, 진심으로 그러고 싶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당장 쌓인 문제가 산더미였다.
* * *
솔로틀은 테네브로즈의 나머지와 함께 저승으로 돌아갔다. 조금만 기다리면 세계가 다시 시작되리라고 했다. 생쥐들도 천계로 돌아갔고, 강현과 볼로디아는 남은 일들을 세카두에서 마저 논의하기로 합의했다(대장군 역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머릿속이 쾅쾅 울리기 시작했다.
일이 쏟아질 때에는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정신을 반쯤 빼 놓은 채, 닥쳐드는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쉴 날이 오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게 모두 유예 상태로 남아 있을 때에는 정반대로 심경이 복잡해진다. 마치 유리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서는 굶주린 맹수를 마주보는 기분이다. 칸막이가 올라가면 그때부터는 전속력으로 도망쳐야겠지만, 지금은 그저 신호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아니다. 잘 생각해 보니 따질 게 하나 있었다.
티아 씨, 계약서 좀 수정합시다. 일단 정보 공유 관련한 규정을 싹 고치고, 보수도 상의를 해 봐야겠어요. 이게 15억으로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계속 들어서.
<추가 계약서는 최대한 빠르게 준비하겠습니다. 다만 보수에 대한 것은…….>
뭐요, 게임을 그렇게나 팔았는데 돈이 없다고 말할 생각은 아니시겠지.
<유보금에서 최대한 융통할 수 있는 돈이 그 정도였습니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사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이런 씨발, 어차피 이거 잘 해결되면 지구 회사는 갖다 버리고 이스트리아에 눌러 앉아도 될 양반들이. 댁네가 횡령으로 잡혀 가든 말든 내 알 바는 아니지 않습니까. 절차는 그쪽 분들이 고민하시고 난 돈을 더 받아야겠단 말입니다.
<회사가 타국에 있어 한국으로 돈을 옮기려면 사정이 복잡합니다. 게다가 현재로서는 이강현 님이 개인회생을 진행하고 계시는 관계로 계좌이체가 아니라 현금으로 드릴 수밖에 없고―>
아니, 국제 금융거래는 알아서들 하시고, 돈은 컨테이너 창고 하나 빌려서 쌓아 두면 될 거 아닙니까. 그나저나 회사 소재지가 어디시길래 사정이 복잡하다는 거예요? 글로벌 시대 아닌가?
<저희 본사 베네수엘라에 있어요.>
강현은 지구에 돌아가면 남미 여행부터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가서 본사에 불을 질러야만 화가 풀릴 것 같았다.
* * *
꿈이 다시 시작되었지만 모든 게 이전과 같지는 않았다. 세 번째 눈, 즉 수정 심장에서부터 시작된 충격은 이면 세계를 뒤흔들었고 이시 타브와 몇몇 요정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 * *
<정보사 수레를 보내 두었습니다. 폐허 내부로 진입하기에는 도로 사정상 어려움이 있으니 바깥에 미리 나와 계시길 권합니다.>
눈이 번쩍 뜨였다. 마력 폭풍은 멎었고 수정막 역시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건물들은 지진이라도 맞은 듯 폭삭 무너진 상태였다. 벤트레스는 한순간 뒤바뀐 광경이 낯선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란드와르를 보고는 말했다.
"아니, 화신도 눈물을 흘리는군요.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별 거 아니야.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그래."
울쿠스의 장례식을 치를 때에는 묵념만 했는데 이제야 눈물이 나는 걸 보면 자신도 성인군자는 못 될 듯했다. 산산이 조각난 나우파나 폐허가 꼭 마음의 풍경 같았다.
란드와르는 눈가를 훔치려 왼팔을 들고서야 손에 무언가가 붙들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충격이 너무 컸던 탓에 감각이 부분적으로 사라진 모양이었다. 일단 눈물부터 닦고.
"처음 보는 물건이군요."
벤트레스가 말을 얹었다. 확인해 보자 메기도의 영혼이 담긴 유리병이었다. 분명히 이강현의 몸일 때 챙겼는데 란드와르의 손으로 들고 있었다. 원리가 어떻게 되는 거지? 물어볼 상대는 저승으로 돌아간 지 오래였다. 그는 적당한 크기의 건물 파편에 걸터앉았고, 늑대인간 왕을 불렀다.
"대장군님도 어디 앉아 계시죠. 교단 사제들이 수레를 끌고 올 겁니다. 폐허 바깥으로 나가긴 해야 하는데… 일단은 좀 쉴 생각이에요."
볼로디아는 마력 폭풍이 시작되었을 때와 똑같은 자세로 소년을 안아들고 있었다. 고민이 깊은 듯 어디 내려놓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로안이 아직도 기절해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됐다.
"요정들은 내 쪽으로 오고. 할 얘기가 있다."
곧바로 얼굴이 똑같은 요정 두 놈이 란드와르의 앞에 와서 섰다. 다른 건 키와 귀걸이밖에는 없는데도 분위기가 천양지차인 걸 보면 삶의 궤적이 얼굴에 묻어난다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는 듯했다.
그는 벤트레스의 멀건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자화자찬이 병적인 수준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게 모두 사실 적시였구나 싶었다. 수정 심장의 비밀도, 테네브로즈의 정체도 대부분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걸 집안 문제라면서 함구한 건 괘씸하지만…….
"벤트레스야, 너는 쟤가 누구 부하였는지를 알고 있었다는 거잖아. 어떻게 안 거냐."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방긋 웃은 벤트레스는 손을 들어 우아한 자세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정신 나간 패션잡지 모델 같았다. 테네브로즈가 질색하며 쏘아붙였다.
"이제 발뺌할 필요 없습니다. 협박도 소용이 없고요. 다 들켰거든요."
"맙소사, 높으신 분들끼리 뭔가 작당을 벌였군요. 그래서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아우님이 스스로 칼질을 한 것까지는 기억이 납니다만, 죽지도 않고 이렇게 떠들어대고 있으니 말입니다."
"쟤 상사 만나고 왔다."
"이야기가 잘 풀린 모양이군요."
"잘 풀렸지. 잘 풀렸으니까 내가 너한테 이렇게 묻고 있는 거고."
여기까지 대화를 나눠 보니 궁금증이 배로 커졌다. 이 새끼는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너 똑똑한 건 잘 알았으니까 짧게 두 개만 대답하자. 첫째, 쟤 정체는 어떻게 알았는지. 둘째, 솔로틀이 우리랑 사이 안 좋은 건 어떻게 알았는지."
곧바로 벤트레스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웃음이 떠올랐다. 뭔가 언짢은 느낌이 있는 표정이었다. 웃는 얼굴에는 침도 못 뱉는다던데 이렇게 보는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들 수 있는 것도 재주였다.
"첫 번째 질문부터 답하겠습니다. 들쥐에 정신 지배를 썼지요. 본가에 붙어 있는 동안에는 온종일 아자라스 삼촌의 뒤를 쫓도록 했습니다. 아우님이 갑자기 미친 것이나, 우리 영감쟁이가 급사한 것이나 이상한 일이었거든요.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인들이 어찌나 쥐를 열심히 잡아대던지. 엘드리그에게 들킬 뻔한 적도 많았고요. 그래도 그 짓거리를 십 년쯤 했더니 결실이 생기더군요."
"쥐로 남 이야기를 엿듣는 게 얼마나 고약한 짓인지 역지사지가 안 되십니까? 스티그미르 삼촌께 죽도록 얻어맞은 날이 내 기억에도 선한데요……."
"아니, 아우님. 아들이 불장난 좀 쳤다고 매타작을 벌인 쪽이 잘못이지 그게 어디 내 문제인가. 게다가 쥐가 아니었으면 아우님과 다시 만나지도 못했을 텐데!"
벤트레스는 능청스레 맞받아치고서는 대답을 이어갔다.
"아무튼,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도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솔로틀이 요정들과 친하지 않으리라는 건 쉽게 짐작했어요. 삼촌과 나누던 대화도 대화거니와… 그랬더라면 역사에 그 이름이 모두 지워져 있진 않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저승의 신이 인간의 편을 들기로 했는지, 아니면 그저 첩자를 보냈을 뿐인지는 알 수가 없었죠. 그래서 한 번 떠 보았더니 우리 아우님이 득달같이 화를 내시더군요."
란드와르는 벤트레스의 행동력과 판단력에 내심 감탄했다. 정신머리를 포기한 대신 그만큼의 지능을 얻은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동료 자격은 충분하다는 계산이 섰다. 야스와다 학파의 마법사인데다가 머리도 잘 굴러가니까. 술상대 기능은 덤이다.
하지만 테네브로즈의 의견은 조금 다른 듯했다.
"그나저나 나으리, 이렇게 됐으니 이 개자식의 쓸모를 다시 생각해 보시는 게 좋겠는데요. 말씀드렸다시피 야스와다 소식은 제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뭐든 간에 딤 나겔만큼은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똑똑하잖아."
"저도 유능하고 똑똑합니다. 저건 죽일 놈이고요."
"너도 똑똑하긴 한데 그거랑은 좀 다르지."
"나으리께서 저한테 이러시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란드와르는 예상치 못한 반격에 미간을 좁혔다.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청지기님한테 좋은 말은 다 해 주었더니 이런 식으로 배신을 하시다니요. 그것뿐만이 아니지요, 능묘에서는 팔다리도 잘렸고 타일라프람에서는 아무 잘못도 없이 욕을 얻어먹지 않았습니까. 말인즉슨 저는 나으리에게 충성을 바쳤는데 나으리께서는 저를 노예나 가축보다도 못하게 본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