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Catastrophisme eclaire (3)
"큰 문제는 아니야. 두 해, 두 해만 더 기다려 줘. 그러면 모든 걸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어. 이시 타브까지 죽은 후에. 그러면……."
파울리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다가 입을 다물었다. 솔로틀의 뒤편을 맴돌던 녹색 불꽃이 폭발하듯 치솟았다.
"나, 솔로틀은 저승의 청지기이자 모든 혼의 관리인이다. 정원사들이 보내온 혼은 나의 백성이며 그 기억 또한 나의 몫이다! 너희 이방인들이 해온 일들을 내가 모르리라고 생각했느냐? 나는 네놈들의 수법을 알아! 두 해를 약속하고서는 내 정원사를 죽여 없애겠지!"
"아니야. 우리는 정말로……."
강현은 솔로틀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300페이지짜리 계약서를 날치기로 서명시키고, 계약상의 중요사항은 전혀 고지하지 않은데다가, 천 년 동안 약속을 뭉개 온 놈들이다. 울먹이는 표정에 속아 넘어가는 건 뒤통수를 쳐 달라며 머리를 들이대는 꼴이다.
"게다가 주인님께서는 아직도 잠들어 계신다. 세 번째 눈이 이렇게나 요동치는데 깨어나지 못하시지! 고작 꿈이 멈췄을 뿐이야! 그러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말해라! 세 번째 눈을 가라앉힐 방법은 나만이 알고 있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청지기의 편을 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스트리아의 존속과, 거기에 사는 모든 사람의 앞날과, 15억의 보수가 달린 문제가 아닌가… 잠깐만. 이거 돈을 주긴 주는 거야?
그는 윤리적 딜레마를 한순간에 떨쳐내고 두 신에게로 걸어갔다. 철학도 숨통이 붙어 있을 때에나 하는 것이었다. 이강현에게 15억은 생존의 문제였다.
"이봐요, 바쁘신 와중에 미안한데 얘기 좀 묻겠습니다. 15억은 주는 겁니까?"
파울리스가 먼저 고개를 돌리더니 솔로틀까지도 이글거리는 눈으로 강현을 바라보았다. 이글거린다는 것은 비유가 아니다. 그는 일단 자신이 전략적 동반자라는 사실을 청지기에게 납득시키기로 했다.
"일단 제가 이 생쥐들이랑은 같은 편이 아니라는 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오시기 직전에 저 요정 놈한테 말해 두었으니 아시겠지만, 저도 또 다른 세계에서 불려 왔을 뿐이에요.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요정 신들만 죽이면 돈을 좀 준다길래요. 그런데 와서 보니 엄청난 진실이 기다리고 있지 뭡니까. 게다가 천 년 동안 이래 온 놈들이 약속한 보수를 줄 것 같지도 않더군요."
"아니야! 계약서에 쓰인 건 모두 이행하게 되어 있어. 너도 보수 항목은 봤잖아… 계약서의 내용은 우리와 상대를 모두 구속해. 그건 우리 세계의 규칙이야."
파울리스가 황급히 놀라 반론했다. 강현은 미간을 좁혔다.
"그러면요. 저승 분들한테는 계약서에 장난이라도 쳤다 이겁니까?"
짧게 으르렁거린 강현은 솔로틀에게로 고개를 돌렸고, 서로가 똑같은 피해자임을 강조하기 위해 한심함과 짜증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을 얼굴에 그렸다. 해골의 감정을 알아내긴 어려웠지만 최소한 적대감은 누그러진 듯했다. 그러면 됐다.
그는 침묵 속에서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파울리스가 고통스럽게 실토했다.
"그때는… 계약서를… 안 썼어."
* * *
격론이 길어지더니 볼로디아마저 합세했다. 그녀는 사건의 전말을 모두 들은 뒤 실로 묘한 표정으로 파울리스를 바라보았고, 강현에게로 치우친 기권표를 내던졌다. 말루카의 일은 참작 가능한 면이 있고, 이것 역시 자신으로서는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파울리스를 때려눕히는 게 아니라 중립을 취하다니 놀라운 참을성이었다.
"대장군님, 저한테 고마워하셔야 합니다. 이놈들이 대장군님한테도 계약서를 들이밀려 했거든요. 제가 그걸 막았단 말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진심 어린 감사를 표하오. 지금으로서 도울 수 있는 일이 없는 듯해 기권표를 던지오만… 만일 당신의 입장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면 기꺼이 그러도록 하겠소."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볼로디아도 신위에 올랐으니까 영향력으로만 따지면 생쥐들에게 밀릴 게 없다. 물론 머릿수에서는 큰 차이가 나고, 아직은 심장의 힘도 온전히 다루지 못하지만… 늑대인간 전체가 작정해서 개판을 놓는다면 차원 생쥐들도 귀찮아질 터였다. 협박용 카드가 하나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안도감을 느끼기에는 남은 일이 태산이었다. 강현은 그 사고란 것의 진상을 되짚어 보았다. 그러니까, 꿈 조각을 처음 받아갔을 때에는 구두로만 약속해 두었다가, 아즈리온이 돌아가겠다는 뜻을 밝히자마자 계약서를 쓰게 시켰다고 했다. 심각한 결함이 있는 계약서를.
거기까지 듣자 자신의 서류에는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이런 씨발, 나도 똑같은 꼴 날 뻔한 거 아니야? 파울리스는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믿을 수 없었다. 요정 놈에게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테네브로즈가 겸사겸사 자신도 함께 구해 준 꼴이었다.
파울리스에게 두 부를 모두 가져오게 시킨 다음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초월자들이 옆에 와서 자리를 잡았다. 전담 천사와, 저승의 청지기와, 정원사와, 정원사의 또 다른 일부와, 늑대인간들의 신과, 쓰러져 누운 마법사 소년과… 애꿎은 한국인이 한데 모인 것이다.
어색하고 심각한 침묵이 흘렀다. 마음 같아서는 욕이라도 퍼붓고 싶었지만 솔로틀이나 볼로디아도 가만히 있는 판에 자신이 날뛰면 모습이 안 좋을 것 같았다. 그저 로안이 깨어나지 않길 빌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테네브로즈는 눈치가 없었다.
"나으리,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뭐가 궁금하냐."
"나으리께서는 저치들과는 또 다른 세계에서 오셨다지 않습니까. 거기에서는 서른네 살의 인간이었다고요."
"오냐."
"그러면 나으리께서 제 아들뻘이라는 이야기가 되는데요."
이거 미친 새끼 아니야?
"너는 씨발, 지금 이 상황에서 그딴 소리가 나오냐?"
"제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개기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억울한 투였다. 강현은 심호흡한 뒤 테네브로즈의 정신 상태를 상기했다. 이 요정이 사실은 지구인으로 치면 전두엽의 상당 부분이 비활성화된 신경다양인이라는 것. 원래는 고통과 우울만 없애려 했는데 솔로틀의 실수로 다른 부분까지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 그래서 눈치와 사회성에 큰 타격을 입고 말았다는 것.
과거의 테네브로즈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짐작은 가능했다. 수정 구슬이 오작동하고 세계가 멈추면서 녀석의 나머지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니까 지혜의 고리를 들고 있다가 내던진 쪽이 나머지였고 지혜의 고리가 바로 본체였다.
나머지는 말없이, 본체를 경멸 어린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보자니 벤트레스의 말이 귓전에서 윙윙거렸다. 예전에는 멀쩡했다고 했지. 마음이 여리고, 말을 잘 듣고, 가문 원로들에게도 사랑을 받았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정신이 나갔다고.
강현은 나머지의 마음을 상상해 보았다. 저승에 붙들린 채 자신이 미친 짓거리를 하고 돌아다니는 걸 속절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나도 하나만 묻자. 쟤는 계속 저승에 있었다며. 그러면 니가 개짓거리 하고 다니는 것도 다 봤다는 거잖아."
"그렇지요. 가끔 몸을 차지하려고 해서 귀찮을 때도 있습니다만. 저게 들어오면 눈물이 나고 기분이 나빠지거든요. 누님을 떠올릴 때면 특히 그렇고요. 그게 답니다."
"그 부분은 좀 고민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오래전에 버린 찌꺼기일 뿐입니다. 저것도 절 싫어하고 저도 저게 귀찮은데 뭐가 더 있겠습니까."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면 예전처럼 요정 놈에게 욕을 퍼붓진 못할 듯했다. 그건 도의적으로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강현은 헛웃음을 흘리다가 겨우겨우 두 문장을 입밖에 냈다.
"귀찮은 게 아니야. 그게… 그게 정상적인 거야."
"나으리, 저번에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복잡한 마음이 있었던 시절을 기억합니다. 그게 얼마나 불편하고 귀찮은 것인지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때의 고통을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그래도 되는 거냐."
"안 될 것도 없지요. 저는 지금이 좋습니다."
"지금이 좋다고."
"저게 제 일부였을 적에, 저는 울지도 못하고 살았습니다. 동료 신관들 앞에서는 멀쩡한 척 돌아다니다가도 본가로 돌아오면 시체처럼 누워 있었지요.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서요. 제가 저택에서 그랬다가는 나으리께서 욕을 하실 텐데요."
"아니, 욕을 듣고 안 듣고가 중요한 게 아니야. 내가 성격이 나빠도 그런 사람한테 화를 내진 않아. 이건 그냥… 내가 이러는 이유는……."
강현은 아무런 유감이 없어 보이는 테네브로즈의 얼굴 앞에서 할 말을 잃어버렸다. 헤이딘이 메기도와의 일을 잊어버린 것처럼, 자신이 교통사고를 잊으려 애쓰는 것처럼, 테네브로즈에게도 똑같은 비애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뜻 영혼의 한 귀퉁이를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래서는 안 된다는 느낌은 여전했다. 뭐가 안 되는 걸까? 솔로틀이 시도한 일이 항우울제의 원리와 아주 다르다고 말할 수도 없는데, 실수를 했다 쳐도 당사자가 만족하는데다가 원래대로 되돌아오면 또 다른 의미로 미쳐 버릴 게 분명한데, 하지만, 하지만 씨발…….
초월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이런 고민이나 하고 있다니 참 기묘한 일이었다. 강현은 그만 생각을 멈췄다.
* * *
질식할 듯한 정적이 계속되던 끝에 파울리스가 되돌아왔다. 강현은 솔로틀을 도와 아즈리온의 계약서를 검토해 주었고, 치명적인 결함을 발견했다. 결국 늑대의 악몽은 계약서를 정정하는 것만으로는 해결하지 못할 문제였다. 슈문과 이시 타브가 여기에 얽혀 있었고, 둘 중 하나를, 혹은 둘 모두를 직접 만나야만 했다.
결국에는 강현이 계속 화신 행세를 하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늑대의 악몽을 끝내기 위해서든, 인류의 명운을 위해서든 간에. 마지못해 동의한 솔로틀은 새로운 계약서를 요구했다. 이시 타브의 심장을 회수한 뒤에는 정말로 꿈 조각을 돌려주겠다는 내용으로.
생쥐들이 서류 작업을 하는 동안 강현은 자신의 계약서를 살폈다. 놀랍게도 (조금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있었고, 결정적으로는 정보 공유에 대한 부분이 모두 엉터리였지만) 대부분의 조항이 멀쩡했다.
지구인은 이곳 사람들과는 달리 계약서 양식에 익숙하니까, 강현은 사업체를 운영한 경험도 있으니까, 책잡힐 일이 없도록 필요한 내용만을 넣었다는 게 티아의 설명이었다. 머릿속을 사찰하는 것도 강현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고. 그런데 강현이 살펴보지도 않고 대충 넘기고서는 도장을 찍었다고.
안심해야 할지 짜증을 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요, 여러분 기대가 참 크셨군요. 인생은 망한데다가 잠에서 막 깬 신용불량자가 그 두터운 서류더미를 모두 확인할 거라고 기대하시다니요. 사장씩이나 했는데 계약서도 제대로 안 읽는 새끼라서 미안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회사가 망했나 봅니다.
여하튼 차원 생쥐들은 자신의 몫을 마쳤다. 이제는 솔로틀이 나설 차례였다. 그는 쓰러진 로안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이글거리는 녹색 불꽃이 살갗을 뚫고 치솟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수정 심장에 갇혀 있던 영혼들일 터였다. 어찌나 많은지 한참을 뽑아내도 끝이 없었다.
강현은 마력 폭풍의 원인이 이 영혼들이었음을 떠올렸다. 달리 말하면, 솔로틀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거기에서 그대로 전멸했으리라는 이야기였다.
"잘 생각해 봤거든요. 이러면 처음부터 수정 요새를 게임처럼 깰 방법은 없었던 게 아닙니까. 이 짓거리 자체가 그 시뮬레이터대로 해서 끝날 일도 아니었던 것 같고."
"이제 보니 그렇더군. 미안하게 됐어."
파울리스는 순순히 인정했다. 강현은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지 않으면 주먹이 날아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