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동족혐오 (4)
"비밀이란 게 뭔데."
"집안 사정입니다. 우리 아우님이 나보다 더 잘 알지요."
벤트레스가 사촌동생을 와락 끌어안았다. 테네브로즈의 표정이 당장에라도 토할 듯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보자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란드와르는 요정 놈이 몸부림치며 품에서 벗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나으리는 저를 믿으십니까, 아니면 처음 본 요정을 믿으십니까? 우리의 적이 야스와다의 신관들임을 잊으셨습니까?"
어디서 보고 배웠는지 나야, 쟤야, 를 읊고 있었다. 테네브로즈가 이렇게까지 절박한 걸 보니 기뻤다. 란드와르는 흐뭇하게 웃었다.
"요정아, 난 널 좋아해. 네가 마음에 들어."
"저도 나으리가 좋습니다."
"그런데 가끔 죽이고 싶을 때가 있어."
"제가 죄송합니다."
"네가 내 마음을 꼭 알아 줬으면 좋겠어."
"알려고 노력해 보겠습니다."
"아니야. 넌 노력해도 몰라. 그건 직접 겪어 봐야 하는 거야."
사촌 형제가 어떤 악연으로 얽혔는지는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얼음 정수기 기능 덕분에 호감이 생기기야 했지만) 벤트레스가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요정 녀석한테 고통을 줄 수만 있다면 아무렴 괜찮다고 생각했다.
란드와르는 벤트레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데리고 다니긴 할 건데, 조건이 있다. 일단 개종을 해야 돼."
구속구를 풀어 줬는데도 얼음컵이나 만들고 끝내는 걸 보면 덤빌 마음은 없는 듯했지만,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몰랐다. 수정 심장 앞에서 뒤통수를 얻어맞는 상황을 방비하려면 맹약을 시킬 필요가 있었다. 정보사 사제들이 그런 것처럼 신에게 맹세하는 것이다.
"무릎이라도 꿇으면 됩니까?"
"내가 누군지 눈치는 채고 있지?"
"혼을 들여다보았죠. 인간의 것은 아니더군요."
누가 가족 아니랄까봐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어쨌든 힘들여 납득시킬 필요가 없으니 편했다. 란드와르는 견습 천사를 불러내 개종용 기도문을 읊어 주게끔 시켰고, 벤트레스가 모두 따라할 때까지 기다렸다.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만."
"실패했어. 진심으로 기도해야 돼. 이건 내가 어떻게 못 해 준다."
"없는 믿음을 만들어내는 건 신의 기적이지 신도의 몫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뭐, 한번 해 보죠. 이러나저러나 아즈리온 앞에 선 요정이 살아남으려면 기적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벤트레스는 열세 번째 시도에서야 겨우 개종에 성공했다. 란드와르가 칼자루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한 직후였다. 삶을 향한 미련은 기적을 만든다.
"그러면 이제 약속을 하자. 내가 딱 하나만 말할 테니까 기도문 따라한 것처럼 똑같이 읊으면 된다."
"기꺼이."
"자, 맹세. 아군에게 해로운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면 즉시 머리가 터져서 죽는다. 여기에서 아군이란 인간 집단 전체를 의미하는데 만약 인간끼리 다툼이 일어날 경우에는 가만히 있거나 무조건 아즈리온의 뜻을 따른다. 그러지 않으면 반신불구가 된다."
맹약의 핵심은 맹세 그 자체였지 형식이 아니었다. 천사가 공증을 서고 아즈리온의 화신이 그걸 승인하기만 하면 내용이나 말투는 아무렴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물론 신앙심이 패시브로 조금씩 나가긴 하지만 큰 부담이 되진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체면이 발목을 잡았다. 벤트레스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이 일었다.
"귀가 찢어졌더니 이런 환청을 다 듣는군요. 화신이 술병을 꺼내드는 것에서부터 이상한 느낌은 받고 있었습니다만 내가 드디어 말도 안 되는 걸 볼 만큼 미쳐 버렸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언제부터가 환영이었죠? 내 부덕한 사촌동생을 만났을 때부터인가요?"
"아직 안 미쳤어. 너 의외로 제정신이야."
"불멸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한낱 요정 따위가 무례하게 떠드는 걸 내버려두지도 않을 테고요."
"똑똑하다면서. 현실이랑 선입견이 충돌하면 뭘 골라야 하냐."
"나는 이게 현실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옆에서 테네브로즈가 기다렸다는 듯이 추임새를 넣었다. 나으리, 더 이야기할 게 있습니까? 죽여 버리시지요. 그 말을 듣자 잠시 흔들리던 마음이 확고해졌다. 뭐가 어쨌든 요정 놈이 엿을 먹는 꼴을 보고 싶었다. 란드와르는 벤트레스를 잘 달래서 맹약을 마무리 지은 다음 일어섰다.
"어디 가십니까?"
"로안이랑 할 얘기 있다. 왜."
"대장군이 사죄하고 싶은 게 있다던데요. 모티스를 죽일 기회가 있었는데 놓쳤다고."
"단번에 못 죽였으면 어차피 터졌어. 신경 쓰지 마시라고 그래라. 그 양반이 죽는 것보단 내가 당하는 게 훨씬 나으니까."
요정 둘을 방에 내버려두고는 나왔다. 벌써부터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란드와르는 걱정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목소리들을 배경 삼아 계획을 점검했다. 일단은 야스와다 요정을 모두 죽였다. 남은 단계는 기억 조각을 완전히 모은 뒤 옛 지성소에서 수정 심장을 승계 받는 것뿐이다. 그 전에 로안에게 진실을 밝혀야 한다.
낙관론과 회의론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 * *
갖가지 일이 한꺼번에 몰아칠 때에는 마냥 우울에 잠기기도 어렵다. 로안의 심경이 정확히 그랬다. (곧 깨어날 거란 말을 듣기야 했지만) 란드와르는 쓰러졌고 볼로디아는 혹시 모를 적을 경계해 순찰을 도느라 바빴다. 요정 둘은 여기가 폐허 한복판이라는 것조차 잊었는지 시종일관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로안은 휴식처 근처를 돌아다니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신탁이 내려왔으니만큼 너무 걱정하지는 않아도 괜찮을 터였다. 천 년 전의 환영을 다시 보는 일도 없었다. 한편으로는 옛일을 계속 곱씹는 건 낭비라고 생각했다. 알세스트는 영웅인 동시에 비겁한 사람이었고, 셀리멘의 희생에는 비극적인 면이 있었다. 그래서? 그것으로 끝이었다. 추한 면은 모두 사라지게끔 천칭을 한쪽으로 기울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둘 모두에게 예의가 아닌 일이었다.
그런 식으로 생각을 갈무리한 뒤에도 찌꺼기는 남았다. 셀리멘을 눈앞에 둘 때면 무표정한 얼굴 아래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숨이 막혔고, 란드와르가 영영 깨어나지 않는 미래를 상상하다가 고개를 내젓기도 했다. 고함을 내지르기엔 평온하고 해먹에 몸을 누이기에는 속이 번잡스러운 시간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란드와르가 깨어났다. 안도는 잠깐이었다. 지금까지 들었던 것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가 쏟아졌다.
"…이걸 이제야 이야기하는 건 미안한데, 아무튼, 너 말고는 할 사람이 별로 없어. 정확히 말하면 대륙 전체에서 두 명뿐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만나러 가기엔 어렵지. 결국엔 네가 수정 심장을 얻어야 한다는 거야. 언제까지고 폐허를 이 상태로 둘 수도 없는 일이고, 여기에 갇힌 영혼들도 쉬어야 할 테니까. 예전처럼 터뜨릴 것도, 네가 위험해질 일도 없으니까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말고……."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텅 비더니 불안이 그 자리를 가득 메웠다. 셀리멘과 같은 처지가 되진 않으리라는 말을 듣기야 했지만, 차라리 그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로안은 동갑내기가 신위에 오른 세계를 상상했고, 몸서리쳤다. 자신은 제대로 된 가정을 꾸리기에도 어린 나이였다.
"저는 아직 열일곱입니다! 폐허에서는 시간이 조금 다르게 흐른다니까, 이제는 열여덟일지도 모르겠군요. 어쨌건 성년식도 치르지 않은 건 마찬가지죠. 배울 것도 아직 많고 세상 물정도 잘 몰라요. 게다가 마흐트를 섬기는 사람은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을 실망시킬 겁니다."
"처음부터 멀쩡하게 신 노릇을 할 필요는 없어. 그냥 있기만 하면 되는 거야. 어차피 너도 계속 열여덟 살에 멈춰 있지는 않을 거 아니냐. 계속 보고 겪는 게 있을 테니까 나이만큼은 똑똑해지겠지."
"사실상 천 년 동안 비어 있던 신위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더 훌륭한 적임자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심장을 가지고 나갈 수는 없어. 누군가가 신위를 이어받는 게 아니면 계속 이 상태일 거야. 그런데 나중에, 가 되겠냐. 요정들도 여길 계속 노리는 판에."
"하지만, 그래도, 누구인지는 몰라도 다른 한 분이 계신다고 하셨으니까……."
로안은 거기까지 말하고서는 잠시 망설였다. 아즈리온의 화신에게, 자신에게 성흔을 내려준 신에게 이 사실을 밝히는 게 현명한 일일까? 하지만 거짓말을 하고 끔찍한 결과를 맞이하는 것보다는 이제라도 솔직해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시겠지만, 저는 겁이 많고 책임감도 없습니다… 검술의 길에 발을 들인 것도 그것 때문이고요… 단순히 무용담이 멋져서가 아니라……."
"알아."
"예?"
"내가 모르겠냐. 가출한 이유도, 세카두 회당에서 지낸 이유도 다 안다고. 삼촌이라고 부르라고 시켰더니 진짜 동네 삼촌인 줄 아나본데, 내가 그걸 모르면 여기에 안 있어."
란드와르는 짧은 쯧 소리를 내고서는 말을 이어갔다.
"세카두에서 요정이 뭐라고 했냐. 내가 널 골랐으니까 책임도 나한테 있다고 했지. 문제가 터지면 뒷수습은 나랑 다른 신들이 할 거야. 물론 네가 신위를 받고 개짓거리를 하면 널 죽이는 것도 우리 소관인데, 네가 뭐, 전쟁을 일으키거나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진 않을 거 아니냐."
* * *
라덱과의 전투에서 심한 부상을 입고 도망쳤던 요정이 있었다.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고, 폐허 인근의 요정 차원문을 통해 야스와다로 돌아왔다. 그리고 폐허에서 겪은 일들을 그대로 밝혔다.
벤트레스가 열다섯 중에서 셋을 이끌고 누구인지 모를 요정을 따라갔다는 것. 본대는 인간 무리에게 습격당했으며 그들 중에는 붉은 머리의 남자와 테네브로즈가 있었다는 것. 붉은 머리의 남자가 아즈리온의 화신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의심할 여지는 충분하다는 것.
"2교구 분석실에서는… 분석실의 보고로는 전혀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칠살성은 여전히 제자리에 붙박여 있습니다."
"하지만 별자리는 몹시도 혼란스럽지. 자미성이 움직이는 건 천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야… 중심이 옮겨 가면서 다른 별의 흐름마저 바꿔놓았을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단 말인가?"
"여섯 달째지요. 사제가 세카두의 용병 사무소에 나타난 후로 여섯 달이 지났습니다. 늑대인간 왕의 곁에도, 로야페타에도 그 남자가 있었어요. 폐허에도요. 자미성이 가리키는 곳마다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지금으로서 알아야 하는 건 그뿐이에요. 칠살이 왜 반응하지 않는지 논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진 맙시다. 더 큰 별이, 자미가 그 뒤를 쫓고 있으니까요."
의견이 한 점으로 모였다. 테네브로즈와 함께하는 남자가 아즈리온의 화신인지, 아니면 더욱 위대한 존재인지를 따지기에는 아직 일렀다. 분명한 사실은 그가 인간들의 편에 서 있으며 요정들에게는 큰 위협이 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이윽고 가문 수장들의 관심은 다른 쪽으로 옮겨갔다. 붉은 머리의 사내와 테네브로즈에 대한 소식은 의혹을 확신으로 바꿔 놓았을 뿐이지 새로운 정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반면 벤트레스의 돌발행동은 모두의 예상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벤트레스가 셋을 이끌고 무리에서 이탈했다고 했지. 자신의 혈족과 접선하려 했을 가능성은 없는가? 아자라스, 그대의 뜻을 밝혀 보게나."
일드얀은 그렇게 지적하며 비꼬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아자라스는 그것이 순전한 조롱인지, 혹은 사냥의 결실을 마주하는 쾌감인지 구분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이 늙은 요정은 어둠달을 의회 바깥으로 밀어낼 기회를 끊임없이 노렸고, 이제는 그 목표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소. 스티그미르가 죽은 후로, 나는 그 아들과 별다른 교류를 하지 않았다오."
"그대는 아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했지. 한 번이라면 그 변명을 들어줄 수 있지만, 두 번이라면 의심을 품음이 옳아. 게다가 벤트레스를 차기 가주로 내정한 것으로 아는데."
"의심만으로 고발장을 써낼 수는 없소. 저자의 증언으로만 판단하더라도, 벤트레스가 우리를 대적했다는 증거는 부족하오. 기이한 시기에 기이한 것을 따라가는 일은 통찰의 소산일지도 모르지. 서로 의견이 갈렸을 뿐이라고 봐야 하오."
실제로 벤트레스가 테네브로즈와 접선했으리라는 근거는 부족했다. 솔로틀의 지시 때문에 일어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자라스는 이미 신임을 잃은 상태였고, 이러한 항변은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기나긴 논박이 끝났을 때 그를 지지하는 요정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수십 해동안 함께한 정치적 동지들은 누구보다도 빠르게 태도를 바꿨으며 중립을 표방하던 가문조차도 일드얀의 편으로 돌아섰다. 아자라스는 미지근한 열패감 속에서 의회의 성원을 바라보았다. 실망이나 슬픔은 없었다. 예정된 파국이 조금 앞당겨졌을 뿐이다.
"나를 배반자로 지목하고 싶다면, 좋소. 가주 직분을 내려놓도록 하지. 처분은 알아서들 하시오."
이런 행동이 어둠달 전체를 위험으로 몰아넣으리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도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그는 다만 안식을 원했다. 다른 망자들처럼 저승에서 쉴 수는 없겠지만, 야스와다의 일로 괴로워하기보다는 나았다.
아자라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회를 떠나는 이로서 나의 적과 벗들에게 말씀드리겠소. 가주 자리를 물려받기 전부터, 나는 가문이 앞에서 몇 번째인지를 논하는 건 숫자 놀음일 뿐이라 생각했지. 수십 해가 흘렀지만 그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오. 이곳이 아주 지긋지긋해. 이제는 훌륭한 사람들을 짓밟고 올라설 필요가 없어서 기쁘오."
"아자라스!"
그들 중 누군가가 외쳤다. 아자라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원탁의 오른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트람이 꿰뚫을 듯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트람, 별불꽃의 젊은 가주여, 마지막으로 자네에게 뜻을 전할 수 있어 기쁘네. 처음 직분을 받았을 때 자네의 머리카락은 검었고 눈에는 빛이 있었지. 그런데 이제 어떻게 되었는가? 말해 보게. 이곳에서 자네는 무엇을 얻었지? 만족스러운가?"
답변은 필요하지 않았다. 아자라스는 품에 손을 넣어 지혜의 고리를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