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동족혐오 (3)
티아가 곧바로 지금까지의 경과를 전해 주었다. 테네브로즈와 비슷하게 생긴 요정은 녀석의 사촌인데, 승산이 없는 걸 깨닫고 투항해 왔다고. 1교구 소속이긴 하지만 정보원으로서의 가치는 있을 거라고. 하지만 란드와르는 그런 사정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는 생각했다. 온몸이 박살나서 쓰러졌다 깨어난 사람한테, 그것도 초면에, 그딴 장난을 친다고? 심지어 여기는 폐허 한복판인데? 이거 제정신이야? 라덱이 입에 게거품을 물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사제야, 궁금한 게 있다. 그거… 핏줄이냐?"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둘이 성격 닮은 게 집안 내력인지 그냥 우연인지 알고 싶다는 거야. 진지하게."
그렇게 질문을 던져놓자마자 요정 둘의 얼굴이 불쾌하다는 듯 일그러졌다. 이것까지 똑같았다.
"아니, 내가 이놈을 닮았단 말입니까?"
"딱히 동의하진 않습니다만… 집안에서 쫓겨나기 직전에, 가문 어르신들께 이런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정신이 나가더니 사촌 형님과 비슷해졌다고 말입니다."
"그거야 그 늙은이들이 노망이 난 탓이지. 어찌 아우님과 나를 비교한단 말인가? 나는 아우님보다 훨씬 현명하고 아름답고 키도 큰데……."
병신 경보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세기로 울렸다. 이 요정에 비하면 테네브로즈는 성인군자일 거라는 직감이 왔다. 도망치려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았더니 또 다른 물음표가 생겼다.
"잠깐만, 어릴 때에는 안 그랬어? 갑자기 미친 거야?"
"전 지금이 더 좋은데요. 애당초 정신이 나가지도 않았고요."
"그 대답 들으려고 한 질문이 아니야. 옆에 있는 애한테 묻는 거라고."
"아주 순하고 얌전한 아이였지요. 하인들을 괴롭힌 적도 없는데다가 내가 때리면 덤비지도 않고 도망치기만 했어요. 가문 어르신들한테는 항상 공손했고요. 그런 아이가 어쩌다 이렇게 되어먹지 못한 망나니로 자랐는지, 원."
이 새끼가? 정말로?
"진짜야?"
"그랬던… 것… 같긴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래?"
"잘 모르겠는데요."
뭔가 큰 사고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머리를 어디에 세게 부딪쳤다거나, 마법의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다거나 하는. 지금까지 갈군 게 미안해질 정도였다. 란드와르는 벤트레스와 따로 대화할 필요성을 느끼고는 질문을 이어갔다.
"아무튼, 저거 인간 나이로는 몇 살이냐."
"마흔쯤입니다만, 나이가 비슷하다고 해서 볼로디아와 같은 인격자라고 생각하신다면 오판입니다. 아무리 늙어도 현명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단 말입니다."
"아우님처럼 말인가?"
그는 첨언을 한 귀로 흘렸다. 마흔이라. 울쿠스가 실제로 살아온 햇수가 그쯤이라는 데에 생각이 닿았다. 사십 년을 살고서도 마음만큼은 열여섯인 게 요정이라는 종족이니까… 반대로 말하면, 벤트레스는 한 세기가 넘게 살아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연장자한테 예의를 갖춰야 하는 건가? 볼로디아에게 그랬던 것처럼? 란드와르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존댓말도 들을 자격이 되는 놈이나 듣는 것이었다.
"볼로디아가 저거 보고 뭐래?"
"투항해 온데다가 적의도 없는 사람을 죽이긴 껄끄러우니, 눈이 녹듯 사라져 있으면 좋겠다던데요."
란드와르는 여기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웃는 낯에는 욕도 못 한다는데, 생글거리는 사람을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죽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었다. 그게 바로 인류와 요정을 위한 선택이었다.
이제 보니 라덱의 말이 모두 옳았다. 현자였나 보다.
"내가 누구인지는 알려줬어?"
"설마 했겠습니까, 믿음직한 상대에게도 쉽게 꺼낼 이야기는 아닌데요. 그래도 눈치는 챘을 겁니다."
"잘 했다. 일단 나가서 기다려."
테네브로즈는 벤트레스를 째려보더니 자리를 떴다. 란드와르는 놈을 재차 살폈다. 키는 사촌동생보다 두세 뼘쯤이 크고, 양쪽에 커다란 링 귀걸이를 달고 있다. 분명히 미청년으로 분류할 수 있는 외모인데 어쩐지 불쾌했다. 눈빛이 땡볕에 널어놓은 삼치를 닮아서 그런 것 같았다. 눈동자를 빼내 물에 씻은 다음 다시 끼워 주고 싶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듯 중얼거렸다.
"내가 이걸 어떻게 해야 되냐."
"식객으로 받아 주시지요. 저놈을 일행으로 들인 것처럼, 나 역시 어디에든 쓸 데가 있지 않겠습니까. 3교구 소식도 조금이나마 알고 있어요."
"나는 네가 인간 편에 붙고 싶어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모티스는 모티스고, 너는 그냥 야스와다로 돌아가면 됐던 거잖아. 집안도 좋은 놈이."
"반려도 없이 백 년을 살다 보니 아우님이 보고 싶어지더군요. 친구도 동료도 중요하다지만 결국 곁에 남는 건 혈육이라지 않습니까."
"계속 그렇게 개소리 하면 버리고 간다. 제대로 대답해."
반쯤은 진담이었다. 죽이지 않을 이유는 기분뿐인 반면 죽일 이유는 구체적이었다. 성격에 문제가 있는데다가 투항 동기가 불분명하다는 점. 순순히 마력 구속구를 꼈다는 이유만으로 믿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는 점.
"정식으로 자기소개를 하자면, 나는 1교구 지하서고의 관리자이자 역사학자입니다. 평생을 제국 시절의 역사를 톺아보는 데에 바쳤지요. 폐허에는 네 번을 드나들었고요. 그 중에서 한 번은 아버지가 나를 치우려고 보낸 겁니다만, 아무튼, 그건 요점이 아닙니다. 핵심은 내가 그 경험을 계기로 폐허를, 고대의 검사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데에 있어요."
뜻밖에도 흥미로운 화두가 던져졌다. 게임상에는 요정 전사의 과거가 제대로 구현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제국이 세워지기도 전의 인물이라는 암시만이 있을 뿐이지 정확히 무슨 사연이 얽혔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폐허에서 돌아온 후로도 계속 환영에 시달렸습니다. 그 내용이 궁금해졌어요. 1교구로 옮겨가서 지하서고에 틀어박혔습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어요. 내 어리석은 동족들은 옛 일에 큰 관심이 없거든요. 서고 관리자를 자처할 이는 더더욱 없고요. 그건 오로지 나만이 할 수 있었던 일인 겁니다―그리고 했습니다!"
수정 심장과, 황제와, 그의 쌍둥이 동생과, 동료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황제가 저승에서 수정 심장과 두 종족을 데려온 것까지는 신화에 남아 있지만 다른 둘에 대한 것은 거의 지워져 있다고 했다.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수정 돌연변이를 쓰러트리자 잔해에서 요정 검사가 나타나더군요. 얼굴을 보자마자 그게 누구인지 알아보았어요. 나나우아친이였습니다. 나를 반 세기가 넘도록 괴롭힌 목소리까지 거기에 있었지요. 따라갔습니다……."
"그거 내가 죽였잖아. 망한 거 아니야?"
"나나우아친에 대한 것은 그 존재를 알고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어요. 그 시점에서 내 가설이 입증되는 셈이니까요. 남은 과제는 황제의 쌍둥이 동생의 행방을 밝혀내는 것입니다. 지하서고의 가장 오래된 문서에서도 거의 언급되지 않는 인물이지요."
벤트레스는 그 지점에서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갑작스럽게 굳었다. 심장이 예닐곱 번 뛸 정도의 침묵이 지나고서야 다시 말이 시작되었다.
"―아무튼, 알아야 할 게 한참이나 남아 있습니다. 그건 야스와다에서는 이룰 수가 없는 목표예요. 일단 삼촌은 내게 가주 자리를 넘기려 하고 있어요. 내 현명함을 알아본 건 고마운 일입니다만, 덕분에 목숨이 언제 달아날지 모르는 신세가 되었단 말입니다. 모티스가 나를 따라온 이유도 그것이거든요. 암살 지령을 받은 겁니다. 나를 제외하면 가주가 될 재목이 없고 친애하는 아자라스는 너무 늙었으니까……."
야스와다에 있어 봤자 죽을 일만 남았으니까 인간 편에 붙겠다 이거지. 겸사겸사 필드도 돌아다니고. 동족이고 뭐고 간에 자기 연구가 더 중요하다는 투였다. 정신상태로 보아서는 괜한 변명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굳이 따지자면 헤이딘이라는 선례도 있었다… 어르신, 이런 놈이랑 비교해서 미안합니다…), 어쩐지 심술이 삐죽 돋았다.
"그렇게 인재가 없어?"
"내가 너무 뛰어난 탓도 있지요. 이 몸의 통찰은 야스와다에서 제일가는 수준이랍니다."
일단 요정들 중에서 폐허의 정답을 밝혀낸 놈은 벤트레스가 유일했다. 모티스와 결별한 것까지 계산에 넣는다면 실로 압도적인 판단력이라고 평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성격이 문제였다. 이 집안 요정들은 자아도취를 안 하면 죽는 병에 걸렸나?
"알았으니까 이제부터는 겸손하게 살아 보는 게 어떻겠냐."
"사실을 적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름다운 것을 두고 추하다 평하는 것은 겸양이 아니라 가식이자 위선이지요."
"그냥 입을 다물자."
이걸 데리고 다녀야 하는지가 의문이었다. 명문가 요정이니까 마법 실력은 보장되어 있다고 쳐도… 이렇게 마이페이스인 놈은 능력이 어떻든 간에 수도원에나 쑤셔 박는 게 옳았다.
게다가 기억 조각이 모인 덕분에 정신 보호 범위가 늘기야 했지만, 지금으로서는 별다른 이득이 없었다. 남은 요정도 없고 조각 수집도 거의 끝났으니 동료가 더해지더라도 쓸모가 마땅치 않은 것이다. 정보원으로서의 가치도 분명치 못하다.
그냥 풀어 주고 알아서 하라고 해? 그랬다가 야스와다로 돌아가서 온갖 허튼 소리를 하면 어쩔 텐가?
고민의 연속이었다. 란드와르는 신음을 삼키며 품에 손을 밀어 넣었다. 시가라도 태우면서 생각을 정리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손끝에 잡히는 것이라고는 산산이 부서진 나무 조각뿐이었다. 어쩐지 아까부터 가슴께가 거슬렸는데 이것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도대체 옷은 복구시켜 주면서 담배 목함은 복구가 안 된단 말인가? 이거 기준이 뭐야?
<이 김에 끊는 걸 권장합니다.>
이런 낙이라도 있어야죠. 도박장 가서 교단 재정 파토내는 것보단 흡연이 낫지 않습니까.
주위를 둘러보던 란드와르는 각인 배낭을 발견했다. 바로 옆에 놓여 있었다. 텅 빈 구멍에 대고 필요한 품목을 외치자 요정의 손이 튀어나와 위스키와 시가를 건네주었다. 고마워요, 헤이딘.
그걸 보자마자 벤트레스의 눈이 갑자기 반짝였다.
"혹시 술상대가 필요하진 않습니까?"
"잘 마시냐? 너 동생은 입에도 안 대던데."
"상자가 똑같이 생겼을지라도 거기에 무엇이 담겼을지는 서로 다른 법입니다. 하나는 잡동사니로 가득하고 다른 하나는 보석함이에요. 구속구를 풀어주시면 내 보석을 보여드리죠."
"왜. 마법으로 뭐 하게."
"잔이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란드와르는 한 손에는 칼을 쥔 채 다른 손으로는 구속구를 풀어 주었다. 허튼 짓을 하면 바로 목을 칠 작정이었다(이제 살인 자체에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다행히도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섬세한 손가락이 허공을 휘젓자 얼음으로 만들어진 잔이 나타났다. 벤트레스는 떨어져 깨질세라 둘을 재빨리 붙잡고서는 하나를 란드와르에게 건넸다.
"원소학도 할 줄 아네?"
"애주가의 덕목 아니겠습니까."
란드와르는 채점표에 가점을 더했다. 지금까지 모은 동료 중에는 술상대를 시킬 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얼음잔을 만드는 것은 실로 유용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만으로 동료로 받을 수는 없겠지만.
테네브로즈와의 관계도 마음에 걸렸다. 란드와르는 첫 잔을 들이키고는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사촌동생이랑 사이가 나빠 보이던데."
"나는 아우님을 진심으로 아낀답니다. 아우님이 버릇이 없어서 문제지요."
그 지점에서 벤트레스의 시선이 갑작스레 허공을 향했다.
"어이, 아우님! 그러지 말고 들어와서 말해!"
"나간 놈이 뭘 한다고 난리야."
"가끔 환청을 듣거든요.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뭔가 마법이라도 쓰고 있나? 생각이 길어지기도 전에 테네브로즈가 씩씩거리면서 들어왔다.
"다 거짓말입니다. 이 자식은 본가에 있을 때부터 줄곧 절 괴롭혔단 말입니다. 누님이 준 손수건을 찢고 절 연못에 던졌지요. 당한 걸 써내면 책이 세 권은 나올 겁니다. 살려 둬서 좋을 게 없는 놈입니다."
"아니, 목숨이 경각에 달한 사람이 무슨 짓을 저지를 줄 알고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내가 아우님의 비밀을 까발리고 다니면 어쩔 생각이야?"
테네브로즈는 일시정지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굳었다. 이윽고 벤트레스의 입가에 미끄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손윗사람에게 건방지게 굴었으니 사과를 해야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란드와르는 뜻밖의 전개에 눈을 깜박였다. 언제고 태연하게 개소리를 늘어놓던 놈이 사촌 형제 앞에서는 갑자기 이상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뭔가 단단히 약점을 잡힌 게 틀림없었다.
"비밀이란 게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