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47화 (148/258)

147화 동족혐오 (2)

그들은 벤트레스를 임시로나마 살려 두기로 했고(최종적인 결정은 란드와르의 몫이었다) 의자에 묶어둔 밧줄도 풀어 주었다. 협조적인데다가 마력 구속구도 낀 상태였기 때문이다. 다만…….

"헤이딘, 이건 통역하지 않아도 됩니다―정말 귀엽게 생겼구나! 쉭겐이 기르던 애완동물이 널 꼭 닮았는데. 이제는 완전히 늙은이가 되어 버렸지만 말이야. 인간은 어찌 그리 수명이 짧은가 몰라. 아무튼 예전 생각이 나서 좋은걸."

로안은 요정 말로 떠들면서 생글생글 웃는 벤트레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언뜻언뜻 들리는 단어로 판단하건대 악담은 아닌 게 분명한데 어딘가 기분이 나빴다. 그건 사람 자체에 대한 평가이기도 했다. 테네브로즈가 이름을 듣자마자 기겁할 만한 악당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왜인지 언짢았다.

어째서일까? 헤이딘이 때때로 통역을 껄끄러워해서? 테네브로즈는 고개를 숙인 채 부들부들 떨더니 벤트레스의 소매를 붙잡고는 바깥으로 나섰다. 평소의 란드와르와 테네브로즈를 뒤바꾸어 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 일단 인간들 앞에선 인간 말을 써요. 배웠지 않습니까."

테네브로즈는 뒤따라 나온 이가 없는 걸 확인하고서는 운을 뗐다. 벤트레스의 얼굴에 상처받은 듯 슬픈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저들 말로 말하면 내가 애완동물이라고 떠드는 걸 들을 텐데! 저 늑대인간한테는 무사장(武士長)이라 별명을 붙여 놓았고!"

"말버릇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데요. 고쳐요."

"아니, 아우님. 우리네 말로 떠들면 모두가 행복한데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생각을 해 봐. 저 꼬마는 내 뜻을 못 알아들으니 좋고 나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서 즐겁단 말이야."

"제대로 말도 안 섞고 지낸 지 수십 해가 흘렀는데 지금 보니 형님은 머리가 그때보다도 더 망가진 것 같습니다."

"아우님은 그때처럼 키가 땅에 붙어 있고 말이지."

"라덱을 내가 직접 죽였어야 했다는 생각이 계속 드는데요. 그놈이 그러더군요, 나와 형님이 똑같은 정신병자라고."

"그렇지, 그런 모욕을 듣고도 가만히 있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야. 아우님을 어찌 나처럼 고매한 정신의 소유자에 비견할 수 있단 말인가?"

테네브로즈는 입을 다물었지만 벤트레스는 그의 입술이 미미하게 달싹이는 것을 알아보았다. 주문을 시전하려는 것이다. 재빨리 정강이를 걷어차 쓰러트리자 녀석은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뭐 하는 겁니까?"

"건방진 아우님을 혼내 주는 거지."

씩 웃으며 명치에 발길질을 가하려는 순간 무색 마력이 그들 사이에서 폭발했다. 벤트레스는 휘청거리며 물러났고, 가까스로 균형을 되찾았다. 그새 일어난 테네브로즈는 손가락을 움직여 수인을 만들고 있었다.

"어릴 때와 똑같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형님이 1교구에 틀어박혀 책이나 읽는 동안 나는 추적자로 싸웠다고요!"

보라색 마력 줄기가 땅에서 스멀거리며 뻗어 나오더니 벤트레스의 발을 옭아맸다. 여유롭던 요정의 얼굴에 당혹이 일었다.

"젠장, 1교구니 3교구니 하는 건 문제가 아니야. 구속구를 낀 사람한테 마법을 쓰다니 아우님은 염치도 없군. 이래서야 어디 공정한 싸움이 된단 말인가?"

"죽어!"

테네브로즈는 이동을 봉쇄한 뒤 그대로 주문을 이어가는 대신 달려들어서 벤트레스를 쓰러트렸다. 당한 걸 똑같이 되갚아주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공격은 심각한 오판이었다. 놈은 뒤로 넘어지면서 테네브로즈를 꼭 끌어안았던 것이다. 벤트레스는 땅에 발이 묶인 채 몸을 비틀어 사촌동생의 위에 올라탔고, 흥얼거리면서 뺨을 후려갈겼다.

"아니, 나한테 그렇게 맞아 놓고 몸싸움으로 덤비려던 거야? 우리 키 차이가 얼마나… 윽!"

말이 끊기면서 미간이 괴로운 듯 일그러졌다.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주문이었다. 테네브로즈는 빈틈을 놓치지 않고 윗몸을 일으켜 박치기를 시도했다.

…그때 헤이딘도 두 요정이 다투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테네브로즈가 벤트레스의 귀걸이를 붙잡고 뜯어내는 장면까지 관람한 뒤 인간들에게로 되돌아갔다. 바보 둘을 붙여 놓으면 바보짓을 하는 게 세상의 이치라지만 연장자 된 입장으로서 말릴 필요가 있었다.

벽을 통과해 나아가면서, 그는 자신이 젊었을 때 어떤 사람이었을지 자문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저러지는 않았을 듯했다. 저러진 않았어야 했다. 헤이딘은 늑대인간과 인간 소년을 눈앞에 두자 마음이 안정감으로 가득 차는 것을 느꼈다.

<얘야, 요정 놈들 하는 짓이나 보러 가자꾸나. 늑대인간도 함께 가는 게 좋을 게다. 이야기를 전해.>

"둘이 뭔가 꾸미고 있나요?"

볼로디아가 로안의 질문을 듣고서는 고개를 홱 돌렸다. 내색은 하지 않아도 신경이 잔뜩 곤두선 투였다. 심경은 이해했다. 란드와르는 쓰러져 누운데다가 미심쩍은 요정까지 일행으로 둔 판이다. 사악한 음모를 상상하는 것도 당연하다.

헤이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차라리 나았겠구나. 적어도 저 꼬락서니를 볼 일은 없었을 테니 말이다.>

*  *  *

그때 솔로틀도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게 참으로 한심스럽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  *  *

그들은 서로 뒤엉켜서 주먹다짐을 벌이는 요정 둘을 발견했고, 할 말을 잃어버렸다. 볼로디아의 머릿속에서 지금껏 만나본 요정의 면면이 휘돌았다. 이들이 헤이딘이나 모티스와 같은 종족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니, 그 이전에, 진지할 때의 모습은 모두 꿈이었는지 묻고 싶을 정도였다.

"내 기억이 옳다면, 우리네 요정의 나이가… 인간으로 치면 서른이 약간 넘는다는 말을 들었다네. 그렇다면 저 사촌 형님이라는 자는 그보다 더 많다는 이야기가 되겠지."

"그런가요……."

로안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 역시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요정들은 어찌나 싸움에 몰두해 있는지 구경꾼들이 무슨 말을 하든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헌데… 사관학교에 막 들어온 여자아이들을 보는 것 같군."

볼로디아는 싸움에 끼어들어 둘을 떼어놓은 뒤 양팔에 요정 하나씩을 꼈다. 테네브로즈는 분을 이기지 못한 듯 씩씩거리며 상대를 노려보았고, 벤트레스는 찢어진 귀를 만지작거리다가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잠깐만, 무사장님. 팔 좀 풀어 주십시오. 저 버릇없는 자식이 내 귀걸이를 던져 버렸단 말입니다. 그게 얼마나 귀한 건데요."

"인간 말을 할 줄 아는군!"

"압니다. 역사학자의 기본적인 소양이지요. 아무튼 귀걸이만 좀 찾아 주십시오. 야스와다에서 제일가는 장인이 만든 것이거든요. 내 부덕한 사촌동생 열 마리를 가져다 팔아도 못 구할 물건입니다."

그녀는 착잡한 표정으로 벤트레스를 내려다보다가 로안에게 눈짓했다. 소년이 마지못해 귀걸이를 찾아 나서려는 찰나 테네브로즈가 으르렁거렸다.

"형님은 그게 진품인지 가품인지 구분하지도 못하면서 뭘 그리 따집니까? 진짜는 내가 출가하면서 가져갔단 말입니다. 보석은 빼내어 팔았고 테두리는 브로치로 변해서 사이라크의 보석함에 들어가 있지요. 나뭇가지나 꺾어서 꽂고 다녀요!"

"아니, 아우님이 막돼먹은 배신자인 줄은 알았지만 도둑질까지 하고 다녔을 줄은 몰랐는데. 가문에서 쫓겨난 게 언제더라? 벌써 사십 년도 더 된 일 아니야? 반세기던가? 나는 그동안 가품을 끼고 다녔고? 도대체 그게 손윗사람에게 할 도리인가?"

"형님이 내 물건 망가뜨린 것만 하겠습니까?"

"아무튼 찾아야 돼! 가품이든 진품이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귀걸이란 말이야! 일부러 끼고 나왔는데!"

벤트레스가 절규하더니 눈물을 뚝뚝 흘렸다. 면사포를 연상시키는 은발 때문에 부군을 잃은 새신부처럼 보였다. 테네브로즈는 고개를 틀어 볼로디아와 시선을 맞추고는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죽여 버리죠."

"그런 일을… 내가 결정할 수는 없소."

볼로디아는 깊은 고민 끝에 대꾸했다.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는 이유로 투항자를 죽이면 안 된다는 생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워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가능하다면 테네브로즈도 없애고 싶었지만, 이 경우에는 아무래도 보아온 정이 있었다). 그녀는 벤트레스가 그대로 증발해서 공기로 변하길 빌었다.

*  *  *

란드와르는 개 같은 느낌들과 함께 의식을 되찾았다. 그래, 느낌들. 하나가 아니었다.

일단 모티스의 자폭 테러 덕분에 넉넉하던 신앙심이 순식간에 바닥을 쳤다. 그래도 신앙심으로 해결이 된 건 다행이다. 놈이 볼로디아를 끌어안고 터졌더라면 어쨌을 것인가? 어차피 나우파나 마법사란 걸핏하면 폭발하는 족속이니 자신이 당하는 게 차라리 나았다.

둘째, 지금껏 감춰 두었던 기억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란드와르는 눈을 감은 채 잠시 묵상했다. 그게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도록. 망각은 축복이며 악몽을 굳이 간직해가며 곱씹을 필요는 없다.

기억해야 할 것은 단 하나.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것뿐. 그러기 위해서는 이 짓을 끝마쳐야 한다. 몸이 몇 번이 으스러지든 상관없다. 이미 겪은 일이니까. 신앙심만 불태운다면 멀쩡한 몸을 되찾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 죽인 사람에 대해서도, 죽일 사람에 대해서도 너무 깊은 비애는 품지 않도록 하자. 그들에게도 각각의 삶이 있고 각각의 은혜가 있겠지만 그건 강현의 몫이 아니었다. 은원이란 원래가 사사롭고 개인적인 것이므로.

물론 세상은 그러한 은원의 총합이지만, 한 명의 사람이 세계를 떠받칠 수는 없다…….

눈을 떴다. 테네브로즈가 다소곳이 앉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억보다는 머리가 약간 자란 것 같았다. 키도. 낯선 장신구가 눈길을 끌었다. 이렇게 눈에 띄는 은색 링 귀걸이를 무심코 지나쳤을 리는 없는데.

"귀는 대체 언제 뚫었냐?"

눈만 깜박일 뿐이지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귀를 뚫은 게 아니라 귓구멍을 막았나? 몸을 일으켜 앉은 란드와르는 앞섶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수정 가루를 보고는 기겁했다.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찔러 넣자 거기도 마찬가지였다.

"물 좀 만들어 봐라. 나 목욕 못 하면 미치는 거 알잖아."

란드와르를 빤히 바라보던 테네브로즈의 표정이 짐짓 심각해졌다.

"나으리, 큰 상처를 입고 쓰러지신 후로 다섯 해가 지났습니다."

"그게 대체 무슨 개소리냐."

"제 키가 이렇게 커진 걸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너 성인이잖아. 요정은 성인이어도 자라?"

"제가 어릴 때 못 먹고 자랐더니 여기 와서 키가 컸나 봅니다."

란드와르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분명히 목소리도 똑같고 얼굴도 비슷한데 키만 훌쩍 자라 있었다. 아니, 성격도 좀 더 뻔뻔하게 변한 것 같다. 원래는 진지해야 할 때에는 진지해지는 놈이었으니까.

정말로 5년이 지났다고? 그럴 리가. 차원 생쥐 놈들이 그걸 두고 볼 리도 없거니와… 무엇보다도 여긴 아직 폐허였다. 매끄럽고 반짝이는 나무 벽. 빛으로 일그러지는 창밖의 풍경. 딱딱한 침대까지.

티아에게 물어보려던 찰나 누군가가 슬며시 들어왔다. 놈은 손날을 세워 테네브로즈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머리가 송판이었더라면 열 장쯤은 깨졌을 것 같았다. 이윽고 란드와르는 어둠 속의 암살자를 알아보았다. 테네브로즈였다.

테네브로즈가 둘이었다.

병신이 단성생식을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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