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46화 (147/258)

146화 동족혐오 (1)

기억 조각이 최후를 맞이하며 흩어지는 순간 모티스는 그쪽으로 몸을 날렸고, 무색 마력 갈래를 일시에 폭발시켰다. 헤이딘의 수호 영역조차 소용이 없었다. 다른 셋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굳어 있었다.

이윽고 볼로디아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신탁이 내려왔소. 잠시 뒤에 깨어날 거라는군. 그 잠시 뒤가 이곳의 시간으로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자리를 옮기지."

모티스의 몸은 요정 검사의 기억이 그런 것처럼 산산이 부서져 새하얀 수정 가루로 변해 있었다. 볼로디아는 그 안에 파묻힌 나무구슬 목걸이를 발견했고, 품에 따로 챙겼다. 그러고서는 란드와르를 안듯이 들어올렸다. 팔 밑으로 빛 알갱이가 고운 모래처럼 흘렀다.

"괜찮을 거요."

볼로디아는 다른 이들을 다독이듯 침착한 어조로 덧붙였다. 스스로를 안심시키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태도는 테네브로즈와 비슷하게 생긴 은발의 요정이 손을 흔들며 나타난 순간 무너지고 말았다. 해맑게 웃는 표정이 기괴할 정도로 낯설었다.

"여어, 아우님! 다시 만나서 반가워!"

요정은 자신의 언어로 외쳤지만 그게 인사말임은 알 수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한 점에 멈춰 있다가 다시 방향을 틀었다. 테네브로즈는 대답을 요구하는 분위기 속에서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그 역시 이 상황이 금시초문이긴 마찬가지였다. 진작 도망을 쳤다더니 여기에는 왜 나타났단 말인가?

"아니, 무엇 때문에 그리 어물거리고 있나? 죽은 이에게는 예우를 갖추고 부상자를 옮겨야지. 수정으로 변하지 않은 걸 보니 아직은 살아 있는 모양인데……."

적당한 낱말을 찾느라 침묵하는 동안에도 벤트레스는 계속 떠들어댔다. 인간의 말로 이야기할 마음은 없어 보였다. 테네브로즈는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패가 다 떨어졌으니 투항하려는 겁니까?"

"내가 승산도 없는 싸움을 시도했으리라 추측하다니 실망스럽군. 나는 함께 도망가자고 했어. 그런데 이분께서는 삶이 더는 필요 없다지 뭔가. 그래서 혼자서만 자리를 피했다가 이렇게 나타난 거지."

벤트레스는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자신은 처음부터 동족의 운명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 역사 연구를 위해 폐허에 왔으며 나나우아친을 만남으로써 결실을 얻었다는 것. 따라서 이제는 인간들에게 몸을 의탁해 보겠다는 것. 1교구 서고에만 틀어박혀 있기야 했지만 듣고 본 게 있으므로 정보원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리라는 것까지.

테네브로즈는 그가 자신에게 별다른 주문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죽일 기회가 충분히 있었는데도 그러지 않은 것이다. 처음부터 싸울 마음이 없었던 걸까?

진의를 파악하기는 어려웠지만 분명한 게 하나는 있었다. 이 작자와 얽혀서 좋은 꼴을 본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어릴 때에는 놀리거나 괴롭히거나 때렸고 서로 성년식을 치른 후에는…….

"저희 나으리를 모욕하는군요. 죽이면 될 것 같습니다. 위험한 자입니다."

테네브로즈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고는 날조를 시도했다. 인간들은 요정 언어를 모르는데 통역사가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누가 알 것인가? 물론 벤트레스는 알겠지만, 죽은 이는 말이 없기 마련이다.

볼로디아가 고개를 끄덕이는 찰나 로안의 반론이 돌아왔다.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그건 아닌 것 같다고 해요. 일단 대화를 나누는 게 좋아 보인다고 합니다. 잔당의 첩자일 가능성도 있지만… 그래도 지금은 우호적으로 나오고 있으니까요. 아까 전에도 진심으로 싸울 마음은 없어 보였다고 하시고요."

그제야 테네브로즈는 간과하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이 꼬마는 헤이딘의 반지를 끼고 있었던 것이다. 볼로디아가 곧바로 반응을 보였다.

"무슨 말인가?"

"요정님께서 저 사람을 모함…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모함이란 건 제가 한 말이 아니고 할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셔요. 요정님께서 위험한 자라고 판단하셨다면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저자가 말한 내용을 자세히 읊어 보게나. 직접 듣고 판단해야 할 것 같군."

"아, 예! 일단 두 분 사이가 안 좋지 않습니까? 라덱이라는 요정과 다투던 걸 생각하면 말입니다……."

로안이 설명을 마치자 볼로디아의 시선이 따가워졌다. 날조 전략은 실패한 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벤트레스는 만면에 폐허만큼이나 눈부신 웃음을 띠고 있었다.

"아우님은 못 본 사이에 협잡질 실력이 많이 늘었군."

"댁에게 배운 걸 그대로 하고 있을 뿐인데요. 지금껏 어떻게 살았는지 돌이켜 봐요."

"선량하고 너그러운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그나저나 저 인간은 뭔가? 보이지도 않는 할아버지를 입에 담는 걸 보면 누군가가 따로 말을 속삭여주는 모양인데, 이 폐허와 관련이 있는 거야?"

"남에게 알려줄 내용은 아닌데요. 솔직히 말하자면 이 인간들의 뜻이 어떻든 나는 댁을 일행으로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어요. 수상쩍은데다가 쓸모도 마땅치 않고 정보원으로서의 가치도 없지 않습니까. 나도 알 건 다 알고 있으니 가서 수정 조각상이나 되란 말입니다."

"알 건 다 알고 있다고!"

벤트레스가 즐거운 듯 그 말을 되풀이했다.

"말 잘 했군. 왜, 아자라스 삼촌께서 계속 소식을 전해 주시던가? 아니면 누님들이? 언제나 궁금해 하고 있었지. 삼촌께서 갑자기 내 아버지를 죽인 후로 말이야. 아, 물론 그분을 탓하려는 건 아니야. 나도 항상 그러고 싶었거든. 사실은 내가 성인식을 치르기 전에 죽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지, 그때는 아우님이 영감쟁이를 참 잘 따랐으니까 말이야. 아무튼 그건 중요하지 않아. 내가 묻고 싶은 건 이거야. 지금껏 아우님이 섬겨온 게……."

피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솔로틀의 존재를 눈치 채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걸 떠들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이방인들이 계속 이걸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이거나 끼고 따라와요. 허튼 소리를 하면 형님이나 나나 같이 죽는 겁니다.>

영혼에 뜻을 전한 테네브로즈는 배낭에서 마력 구속구를 꺼내 신경질적으로 내던졌다. 순순히 자백하는 꼴이 되고 말았지만 입을 다물게 만들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결국에는 이 미친 사촌과 얽히게 될 모양이었다.

이윽고 초점 없이 흔들리던 벤트레스의 눈이 환희 속에서 심지를 얻었다.

"아, 드디어!"

*  *  *

볼로디아는 주택가의 건물 중 하나를 휴식처로 삼았고, 2층의 침대에 모포를 깐 뒤 란드와르를 눕혔다. 겉으로 보이는 부상은 없었지만 수정 가루가 온몸을 뒤덮은 채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수천수만 개의 작은 이빨이 살갗을 갉아먹는 듯했다.

목덜미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혈류가 느껴지기는커녕 미지근하기만 했다. 지금으로서는 신탁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란드와르의 이름을 몇 차례 불러 보다가 그만두었고, 품에서 나무구슬 목걸이를 꺼냈다. 손끝으로 구슬을 하나씩 세어 가는 동안 모티스의 최후가 눈앞에 되살아났다.

그녀의 유언은, 목걸이를 세카두 서부 회당에 전해 달라는 것. 그곳에 그녀를 기다리는 인간이 있다는 것. 스승의 얼굴조차 잊어버렸다는 말은, 평생토록 야스와다에만 있었다는 말은 거짓이었으리라.

그녀는 대답 없이 울부짖던 모티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후회와 의문이 동전의 양면인 듯 서로 몸을 겹쳤다. 함께하자는 권유가 무언가를 일깨웠던 것일까? 그렇게 묻지 않았더라면 다른 결말을 마주할 수 있었을까?

다른 결말이라면, 어떤 것을?

모티스의 목숨을 거둘 기회가 몇 차례 있었다. 위험을 감수하고 나아가느냐, 신중함을 덕목으로 삼느냐가 순간의 움직임을 갈랐을 뿐이다. 볼로디아는 시간을 되돌린다면 선뜻 전자를 고를 수 있었을까, 그래서 이 상황을 막을 수 있었을까 자문해 보았다. 확언은 어려웠다. 그것은 몸에 배인 태도 때문일 수도 있었고 모티스의 절규 때문일 수도 있었다.

묵상은 계속 이어졌지만 회반죽 속을 걸어 나가듯 진전이 없었다. 어느덧 손 안에서 구슬이 한 바퀴 돌았다. 볼로디아는 목걸이를 내려다보며 어떤 요정의 죽음을 생각했다. 평생토록 누군가를 간직해온 삶이 이런 식으로 끝나 버렸다는 사실이 저급한 농담 같았다.

하지만 그 최후가 어때야 했느냐고 묻는다면, 답할 말이 없었다. 그녀에게 모티스의 평생은 막연하고 아득한 것이었다.

"그 요정을 죽일 수 있었소… 그러지 못했소."

볼로디아는 고해하듯 중얼거렸다. 란드와르는 여전히 굳은 듯 누워 있었다.

"미안하오."

이 순간의 죄책감과 도달하지 못한 죄책감이 뒤섞였다. 무엇을 택하더라도 어느 하나는 남게 될 것임을 알았다. 그녀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고, 눈을 감은 후, 아직은 자신을 굽어 살피는 신을 향해 속죄의 기도를 올렸다.

*  *  *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 볼로디아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벤트레스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두 팔은 뒤로 돌려 묶인 채였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로안이 새로운 요정의 신상을 읊어 주었다. 역사학자고, 종족의 뜻에는 별 관심이 없으며, 폐허에 따라온 것은 연구를 위함이라고 했다. 라덱이 격분해 쏟아내던 말들과 완벽히 같은 내용인 걸 보면 진실인 듯했다.

"자세한 것을 물어보려 했는데, 그건 싫다고 합니다. 정보만 얻어내고서 죽이려 들면 자신으로서는 억울한 일이 아니겠냐더군요. 삼촌께서 깨어난 뒤 그분과 이야기를 해 보겠다고 하십니다."

마지막 문장을 들은 볼로디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벤트레스가 나타난 후로는 정체가 드러날 만한 발언은 최대한 아꼈던 것이다.

"설마 정체를 말해 주었나?"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폭발에 휘말리고서도 살아 계시니… 눈치를 챘을 겁니다.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꺼내진 않아서 확실하진 않지만요."

볼로디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폭발을 일으킨 것은 모티스 혼자만의 마력이 아니었다. 조각의 힘이 함께 공명한 것이다. 그런데도 몸이 형체를 유지하는 시점에서 평범한 인간은 아니리라는 추론이 가능할 터였다. 심지어 머리카락마저 붉다.

"그나저나 이 요정은 우리네 말을 할 줄 모르는 것 같던데."

"아, 예! 대충 알아듣기는 하지만 직접 문장을 지어내진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말뜻을 옮겨 주시고 있어요. 요정님은 같은 곳에 있기도 싫다면서 나가 계시고요."

그녀는 벤트레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초점 없이 흔들리는 보랏빛 눈동자 아래로, 입만이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자네 생각을 말해 보게나."

"어떤 의미로 하신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자를 곁에 두는 게 현명한 일이겠냐는 말일세."

"저는… 제가 판단할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요정님은 당장 죽이라 성화시지만 할아버지께서는 두고 보는 게 좋겠다 하시더군요."

가문의 일은 외부인이 판단할 사안이 아니었다. 그러나 모티스의 얼굴만큼은 계속 뇌리에 어른거렸다. 동료를 저버리고 투항한 요정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볼로디아는 벤트레스를 똑바로 마주보았고, 말했다.

"모티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소. 당신의 의견이 어떠한지도."

정적이 한동안 불어나다가 목소리가 빈틈을 비집고 나왔다. 벤트레스의 시선은 어딘가 먼 곳을 향해 있었다.

"세상에는 풀려나는 게 두려워서 죽음을 택하는 노예들이 있더군요. 나는 그런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모두가 아름다웠습니다."

로안은 벤트레스의 답을 그대로 읊어 주었다. 볼로디아는 그 해제(解題)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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