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죽음과 삶의 이유들
토텐부르그, 당신의 진의는 묻지 않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믿고 행하는 것은 나 스스로가 우리 모두를 위해 죽는다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헛된 헌신이거나 기만인지는 알지 않으려 합니다.
* * *
쉭겐은 배다른 동생과 함께 테라스의 원탁에 앉아 있었다. 하인이 다과가 담긴 쟁반을 들고 올라왔다. 따스한 햇살이 찻잔에 부드러운 빛을 더했다. 토텐부르그는 한 모금을 홀짝이고서는 천천히 운을 뗐다.
"모티스가 죽었어요."
"어떻게 알았느냐?"
"모르겠어요.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요."
사방은 움트는 신록으로 푸르렀다. 바야흐로 봄이었다. 라덱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며 밤하늘의 별들도 아직은 말이 없었다. 폐허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달리 흐르므로 결과가 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이다.
토텐부르그는 쉭겐을 응시하며 물었다.
"제가 대모님께 도움이 되었나요?"
"그래, 아주 마음에 들어 하시지."
"이제 검무를 못 보겠네요. 아쉬워요."
쉭겐은 답하는 대신 테라스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넓고 푸른 호수가 반짝이고 있었다. 하늘에 덧바르고 남은 푸른빛을 한데 모아둔 듯했다. 희고 깨끗한 구름이 그 위에 그림자처럼 일렁였다. 멈춘 듯 고요한 오후였다.
"좋은 사람이었는데."
토텐부르그는 그저 꿈꾸듯 중얼거렸다. 거기에는 망가진 태엽인형을 아쉬워하는 듯한 그리움이 있었다.
* * *
<모티스가 빠르게 접근하고 있습니다―위험합니다!>
티아가 경고했지만 너무 늦었다. 요정 전사의 가슴팍에 칼을 찔러 넣는 순간 시야 바깥에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모티스였다. 그녀는 자신이 다룰 수 있는 마력 갈래를 일시에 폭발시켰고, 기억 조각에 남은 힘이 거기에 공명했다.
그리고 암전.
느낄 수 있는 아픔만을 겪은 사람은 몸이 으스러지는 경험이 그것의 총합이라고 예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의식은 뻐근한 꿈을 향해 가라앉고 몸은 머나먼 세상에 그대로 남는다.
그래, 구급차의 전등은 머리 위를 휘돌다가 천사의 원환(圓環)이 되고, 몸은 그 누구도 모를 말을 스스로 울부짖으면서, 그저 정신만이 평온하고 더운 암흑 속에…….
* * *
사업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은 날부터 강현은 인생까지 정리하려는 사람처럼 물건을 팔아댔다. 노트북과 헤드폰. 애완용 로봇청소기. 아끼고 아끼다가 마개도 따지 못한 글렌드로낙 1996. 그런 와중에도 차는 남았다. 차가 없으면 아무것도 갈무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끔은 차를 가장 먼저 팔아치웠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그게 교통사고의 핵심이 아님은 알고 있다. 사고를 복기할수록 분명해지는 것은 자신이 그냥 지지리 운이 없었다는 사실뿐이다.
하나뿐인 아들이 빚더미에 짓눌리는 와중에 부모님은 결혼 3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여행을 계획했다는 것. 참 한가하세요, 하기야 저는 서른둘이고 두 분은 서른다섯 해를 같이 살았으니 그럴 만도 하겠죠, 하고 이죽거리면서도 뭔가 효도할 궁리를 해 보았다는 것. 그래서,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빼서 운전기사 역할을 자처했다는 것. 내려가는 길만 대신 운전해 주는 식으로. 부모님은 그럴 거면 일처리나 마저 하라고 했으나 내심 다 큰 아들이 운전대를 맡아 주겠다고 나서는 게 마음에 든 눈치였다.
일정을 조율하다 보니 출발은 밤에 하게 됐다. 아무렇지도 않은 대화를 이어나가면서, 예, 예, 힘들죠, 그래도 좀 더 살아는 봐야 하니까… 그래, 죽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살아지더라… 다 제가 부족해서 그런 거다 치고… 하지만 어떤 불행은 이유도 개연성도 없이 온다.
중앙선을 넘어 돌진하는 헤드라이트의 두 눈. 피하려 핸들을 꺾었지만 늦었다. 상대 차가 측면을 들이박으면서 뒷좌석이 우그러진다. 시야가 흔들리며 세상이 어룽거리는 빛 덩어리로 변한다. 덥고 축축한 감각이 온몸으로 퍼진다. 주머니에 휴대폰이 있다. 꺼내서 가까스로 숫자 셋을 누른다. 1―1―9. 정말로 눌렀던가? 어쩌면 손을 움직인 부분부터는 망상이고 구급대를 부른 건 지나가는 차들 중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게 자신이었더라면, 왜, 왜 그랬지?
왜 살기를 바랐지?
* * *
상대가 중앙선을 넘어와 돌진했으므로 과실은 10:0이었다. 다만 가해자 측이 무보험이라 큰 덕을 보진 못했다. 자기는 도박빚이 태산인데 맞은편에서 멀끔한 차가 오기에 들이박았다고 했다. 강현은 생각했다. 이런 씨발, 람보르기니도 마세라티도 아니고 구형 제네시스에 화를 내십니까?
아무튼.
외가도 친가도 기댈 구석이 없다. 친가는 큰삼촌이 사업을 한답시고 집안 기둥까지 울궈먹었고 외가는 유산 분할 문제 때문에 서로 모르는 사이가 된 지 오래다. 사고가 난 후로 받은 도움이라고는 부조금 약간과 홍삼 진액이 끝이다. 아니, 삼촌, 간이 파열된 사람한테 홍삼을 주시다니요.
그래도 이런 관계가 엄청난 비극인 것 같지는 않다. TV만 보면 모두가 추석마다 모여 송편을 빚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지만 그게 아닌 인간은 또 얼마나 많으냔 말이다.
말인즉슨 강현의 가정은 표준분포 내에서 약간 왼쪽으로 기운 수백만 가구 중 하나였다. 마찬가지로 부모님의 사이는 좋다고는 말할 수 없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파국에 이른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여느 부부가 그런 것처럼 가끔은 싸웠고 가끔은 친하게 지냈으며 대부분은 데면데면했다.
강현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었다. 그는 불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가정의 자식으로서 부모를 적당한 존중과 의무감으로 대했다. 그러니까 강현에게 어머니와 아버지란 연옥 같은 것이었다. 저번에 네 아버지가 또 창문을 열고 에어컨을 켜 놓았더라, 하는 문제가 십 년 전의 투자 실패를 들추어내고 한 달간의 부부싸움으로 번질 때에는 지긋지긋함을 느끼다가도 삶이 지옥 같을 때에는 그마저도 위안이 됐다.
살아 나가는 것이란 연옥을 여럿 만들어두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하나가 완전한 지옥으로 변하더라도 다른 곳으로 도망칠 수 있도록. 강현에게 민혁은 그런 도피처 중 하나였다.
정민혁. 어릴 적에는 바오로라고 불렸지만 지금은 냉담자다. 그때부터 친했다. 대학은 법학과였는데 새내기 시절에 뭘 잘못 먹었는지 PD가 되고 말았다. PD는 방송국의 프로듀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넘을 것도 함께할 것도 이제는 후일담에나 등장하는 게 되고 말았는데 여전히 너머와 다함께를 찾는 사람들을 부르는 단어가 있다. 덕분에 강현도 사상의 부스러기쯤을 옆에서 주워 먹었다.
어쨌거나 민혁은 용케 사시 1차를 두 번 붙었다가 2차에서 세 번 떨어졌다(전해에 2차 낙방을 했으면 다음해에는 1차를 패스할 수 있다). 네 번이 아닌 이유는 그해 정원이 200명으로 줄었기 때문이다. 행인을 붙잡고 사법고시 정원을 물어보면, 사법고시, 그거 이미 폐지된 거 아니에요? 라는 대답이 돌아오던 시기였다.
그래서 민혁은 아름다운 가능성을 가능성으로만 남겨두기로 결정했지만 노량진에는 남았다. 사시 낭인이 아니라 공시 강사로서. 짧게 줄이자면 민혁은 빨갱이가 농담인 시대에 운동권 노릇을 하고 사시가 폐지될 무렵에 사시를 준비했다가 결국 학원 강사밖에는 할 게 없어진 사람이었다. 인생이 살짝 망한 것이다.
다만 민혁의 대단한 면은 여전한 낙관과 호의로 세상을 대한다는 데에 있었다. 그런데 그의 집안은 넉넉하지 못했고 강사 수입도 많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태도는 자해에 가까운 것이 되곤 했다. 따라서 강현은 생각했다. 이 새끼는 나랑 연을 끊어도 모자랄 판에 왜 몸 망가진 신용불량자 뒷바라지를 해 주지?
개인신용대출을 받아서라도 돈을 갚은 데에 감격을 받은 게 틀림없었다. 곳곳에 손을 벌리는 동안 연이 끊기든 칼을 맞든 할 각오로 민혁에게서도 천오백을 빌렸던 것이다. 그건 녀석의 모든 저축이기도 했다.
하여간 사업이 기울어가는 새끼에게 그걸 빌려주다니 아무리 친구라지만 제정신이 아닌 놈이었다. 기껏 돌려받은 돈으로 간병인 비용을 대 주는 것도 제정신으로 할 짓은 아니었다.
"너도 알겠지만 내가 지금 회생 인가가 나도 빚 지우려면 사오 년은 걸리거든. 이게 경기도 썩다리 전세금 물려받아서 메꿀 돈이 아니야. 사망보험금도 그렇고. 내가 몰랐는데 아버지가 저번에 돈 날려먹었을 때 그것까지 해지를 했대. 이걸 씨발, 너한테 이걸 말해서 뭐 하겠냐 싶긴 한데……."
"밥 먹다가 무슨 소리냐."
"나는 어차피 망했다 쳐도, 너는 그냥 멀쩡하게 살 수 있지 않냐. 멀쩡하게 살아야지. 멀쩡하게 살려면 돈이 있어야지. 그런데 왜 그 아까운 돈을 나한테 낭비하고 있냐 이거야."
"안 먹을 거면 뚜껑 닫아둬라. 식는다."
허여멀건 황태국을 내려다보다가 한 술을 떴다. 아무 맛이 없었다. 내장이 파열되고 뼈에 철심을 박았다고 해서 혀까지 비뚤어진 것은 아니다. 기분의 문제일 뿐이다. 누군가가 옆에 있을 때에는 감상이 모두 달아나고 초연해졌다. 몸 안이 완전히 텅 비는 것처럼. 강현은 그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복작거리는 8인실에 홀로 남기만 하면 소리도 눈물도 없이 울게 됐다. 여행길에 따라 나서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혹은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들이박았더라면, 그래서 자신이 즉사하고 두 분이 살아남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니면 출발을 낮에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공허한 가정문을 툭툭 마음속에 던져 넣으면서.
서로 관련 없어 보이는 조건이 모여 빚어낸 결말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놀라웠다. 첫 번째 생명은 유기화합물의 바다 속에서 아주 희박한 확률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화학 반응을 수도 없이 거듭하면서, 절묘한 결과가 이어진 끝에. 강현은 자신의 교통사고도 그런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사고 그 자체가 아니라 다른 것을 묻기 시작했다. 민혁에게 빌린 돈을 갚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연이 끊겼더라면. 그랬더라면 놈이 없는 형편에 남을 챙길 일도 없었을 것이며 자신이 이토록 꾸역꾸역 살아 있을 이유도 없을 것이다.
강현은 이렇게 묻고 싶었다. 너는 어째서 나를 죽지 못하게 만드느냐? 이만 포기한다면 서로가 편할 텐데? 그 은혜를 되갚을 방법도 없는데? 민혁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에게도. 그러나 입 밖에 낼 말은 아니었다. 애써 도와주는 이들에게 그런 소리를 내뱉는 건 망종도 하지 않을 짓이다.
다만 왜 자살하지 않으냐며 비아냥거린 놈이 하나 있었다. 전해 듣기로는 그랬다. 예전부터 사이가 나빴던 새끼였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속마음을 알아준 한 명이 다른 누구도 아닌 그런 새끼라는 사실이 우습고 서글펐다. 그 하나를 제하면 순수한 호의로, 염려와 우정으로, 넘쳐흐르는 은혜를 베푸는 친구들만이 있었다.
남에게 떠넘길 수 있는 문제는 차라리 쉽다. 하지만 괴로움의 핵심은 귀책을 묻기 어려운 부분에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를 탓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고통이 된다.
강현은 선량한 친구들에게 눈먼 분노를 쏟아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택할 수 있는 길이 하나밖에는 없었다.
서른세 살의 이강현은 성격이 개차반이고 인간을 싫어한다네.
그래서 아무도 안 만나고 지낸다네.
서른네 살의 이강현은 빌딩 관리인이 되었다네.
관리실에서 게임만 한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