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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44화 (145/258)

144화 내가 나를 버리고 (4)

모티스가 대뜸 도망치기야 했지만 아직까지는 순조로웠다. 란드와르가 판단하기로는 그랬다. 혈마법사 둘을 죽였고 테네브로즈는 나나우아친과 벤트레스의 협공에서 살아남았다. 로안도 티아의 지령을 듣자마자 재빨리 뛰쳐나와서 본대에 합류했다. 그리고…….

"벤트레스가 모티스를 배신하고 이탈했다는군요. 둘만 상대하면 된다는 겁니다. 제가 기억 조각을 맡죠. 로안은 뒤에 있고, 사제는 모티스 쪽으로 지원을 가고."

볼로디아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무투에는 이골이 난 군인인데다가 선조의 혼령까지 다룰 수 있다. 거리 조절 면에서 상성이 불리할지라도 충분히 극복이 가능할 터였다.

하지만 정면대결이 아니라 추격전이라면 기동성이 발목을 잡았다. 직전에 그랬던 것처럼, 모티스가 하늘로 치솟아서 도망친다면 뒤따라갈 방법이 마땅치 않은 것이다. 테네브로즈가 발을 묶든 고통을 가하든 간에 원거리에서 보조를 넣어야 했다.

묵상하던 볼로디아는 신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다시 만날 때에는 무예를 겨루어 보자더군. 그때는 도망치지 않으리라고 했소… 그런 승부에 다른 이의 힘을 빌려서는 안 되오."

"도망치지 않는다고요. 그 말을 믿을 수 있습니까?"

"요정은 무인이었소."

단호한 대답에서는 서부극이랄지 시대극에서나 볼 법한 낭만주의가 느껴졌다. 란드와르는 잠시 갈등하다가 볼로디아의 입장을 존중하기로 했다. 결국 핵심은 기억 조각이었다.

"그러도록 합시다. 홀로 도망친다면 수정 조각으로 변할 테고, 기억 조각을 데리고 간다면 어차피 추격해야 할 테니까요. 자, 그러면… 혹시 모르니까 반지는 로안이 끼고 사제가 공격을 돕자. 됐지."

테네브로즈는 헤이딘의 반지를 로안에게 건넸고 볼로디아는 배낭에서 장검을 꺼내들었다. 단정한 묵색 손잡이에는 늑대인간 왕실의 문장이 양각되었고 검신에는 각인이 희미하게 일렁였다. 대상을 파괴와 손상으로부터 보호하는 주문이었다.

손수건으로 날을 닦아낸 볼로디아는 팔만을 움직여 몇 가지 자세를 취해 보았다. 그 궤적에는 유연함과 강직함이 동시에 어려 있었다.

*  *  *

모티스는 늑대인간을 올려다보았다. 머리카락은 짧게 깎았고 표정에는 근엄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얼굴의 반절을 뒤덮은 상흔은 삶의 궤적을 대언하는 훈장 같았다.

3교구 신관으로서의 자아와 환영검으로서의 자아가 손을 맞잡았다. 이 늑대인간은 충분한 적수가 될 터였다.

"응답을 기대하고 남긴 말은 아니었는데. 본모습을 보게 되어 기쁘군… 나는 서리칼날의 모티스라고 한다. 늑대인간 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게 당신인가?"

"말루카의 통치자, 볼로디아가 서리칼날의 모티스에게 예를 갖추오."

볼로디아는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고, 몇 문장을 덧붙였다.

"괴수의 형상도, 인간으로서의 형상도 모두 나의 일부요. 다만 나는 당신에 비하면 살아온 생이 짧은지라, 동작이 서투른 점 미리 사과드리겠소."

"사죄할 필요는 없다. 미숙한 자는 목숨으로 그 값을 치르게 될 테니!"

그 말과 함께 공기가 돌변했다. 볼로디아와 모티스는 서로를 마주본 채 정확히 필요한 만큼만 움직이며 탐색을 시작했다. 둘의 자세는 지극히 안정되어 있었으며 언제든 달려 나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모티스가 먼저 돌진하다가 갑작스레 뛰어올라 상박을 쳤다. 무색 마력을 이용한 도약은 그녀의 주특기였고, 괴수들은 종잡을 수 없는 움직임에 당황하다가 그만 피를 흩뿌리곤 했다. 그러나 볼로디아는 한 발짝 물러나며 어렵잖게 검격을 막아냈다.

요정은 날쌘 공세를 이어갔고 늑대인간은 절제된 동작으로 대응했다. 칼날이 맞부딪히며 수정 폐허의 빛무리에 날카로운 번쩍임을 더했다. 합을 나눌 때마다 둘은 조금씩 물러서거나 나아갔지만 결국에는 그 자리를 유지하게 되었다.

"나는 땅에 붙박여 있는데 당신은 매처럼 하늘을 가르는군. 당신처럼 검술과 주문에 모두 능한 요정이 얼마나 있소?"

한바탕 칼날을 주고받은 후, 둘의 거리는 다시 멀어져 있었다. 볼로디아는 긴장을 거두지 않은 채로 질문을 던졌다.

"제국 시절에, 나우파나의 귀족들은 검술을 연마했다. 하지만 대부분이 수정 폐허의 일부가 되고 말았지. 이제는 아무도 검을 배우지 않는다. 나 혼자뿐이야!"

모티스는 칼끝을 볼로디아의 심장에 겨누고는 돌진했다. 볼로디아는 맞서지 않고 그 공격을 힘주어 쳐내기만 했다.

"허면 누가 당신에게 무예를 가르쳤소?"

"내가 열 살이 되었을 때, 부모님께서는 인간 하나를 노예로 들이셨다. 연회가 열릴 때마다 괴수를 상대했지. 검 한 자루로 말이다. 내가 먼저 가르침을 청했다."

노예는 모티스가 성년식을 치르는 것까지 보고서는 눈을 감았다. 다친 것도 아니고 큰 병을 얻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되었다. 인간은 요정보다 빠르게 늙고 빠르게 죽는다고 했다.

부모는 막내딸을 사랑하는 만큼 그녀의 뜻을 존중했지만 인간의 죽음을 내심 기뻐했다. 요정은 보통 체술이 야만적이고 천박한 것이라 여겼으며 그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홀로 스승의 무덤을 만든 뒤 밤새 그 앞에 서 있었다. 이제는 마법에 관심을 기울여 보라는 부모의 말을 천천히 삭여 가면서.

인간은 한때 카스바 투기장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했다. 부상을 입고는 신세를 망쳐서 스스로를 요정에게 팔아넘기고 말았지만, 훌륭한 제자를 세상에 남길 수 있어 기쁘다고.

스승은 카스바 투기장에서의 무용담을 읊을 때마다 머나먼 환희에 잠기곤 했다. 검을 쥐고서도 존경받을 수 있는 세계가 있었다. 그 세계의 한 조각이 눈앞에서 저물었다… 그녀는 방탕한 도시와 칭송받는 검사에 대한 이야기를 잊어버렸다.

"하찮은 퇴물에 불과했다.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아!"

"그렇군."

모티스가 내지른 칼은 볼로디아의 뺨을 스치며 살갗을 갈랐다. 그녀는 흐르는 핏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물었다.

"그 후로는 누구와 검을 겨루었소? 인간의 피로 경험을 쌓았소, 아니면 다른 하인을 들였소?"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더 흘러, 모티스는 3교구의 신관으로서 인간들의 땅에서 첫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어느 인간이 그녀의 정체를 의심했다. 아즈리온 교단의 젊은 사제였다. 모티스는 그를 불러내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냈고, 스승에게 배운 예법에 따라 생사결을 청했다.

그들은 합을 주고받았고, 떨어져 우아한 원을 그렸고, 서로에게 돌진했다. 목숨을 노리는 칼끝에는 엄숙한 존경마저 깃들어 있었다. 마침내 결판이 났을 때, 그녀의 검은 심장을 찌르기 직전에 멈췄다. 쓰러져 누운 인간은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기쁜 듯 웃었다.

― 죽이지 않는군요, 그렇죠? 무예의 길을 밟는 사람은 호적수의 목숨을 쉽게 거두지 않아요. 당신 같은 요정은 처음입니다. 대부분은 전사를 얕잡아보니까요. 누구에게 검술을 배웠습니까?

모티스는 침묵했다. 남자가 계속 이야기했다.

― 나는 정보사 소속이에요. 지금은 세카두 서부 회당에 적을 올리고 있을지라도, 실제로는 정보사의 명을 받아 움직이죠. 요정은 우리의 적이지만 우리네 일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당신과 동료가 되고 싶어요. 함께 갑시다.

― 죽음이 두려워 허튼 소리를 하는구나! 내가 패배자의 말에 휘둘려 동족을 저버릴 것 같으냐?

― 그러면 칼을 마저 찔러 넣어요. 어차피 당신이 이겼으니까. 당신처럼 아름다운 검을 쓰는 사람에게 최후를 맞이하는 건 누구에게나 영광일 겁니다.

그리고 긴 시간이 흘렀다. 인기척이 모티스를 현실로 이끌어왔다. 남자의 동료가 그들을 찾고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환술로 인간의 모습을 되찾고는 사제를 맞이했다.

사제는 둘의, 땀에 젖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모티스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녀의 등 뒤로 남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 내 목걸이를 가져가요! 마음이 변하면 세카두 서부 회당으로 와서 내 이름을 대요! 언제라도, 내가 늙어 죽은 뒤라도 좋아요!

모티스는 남자가 던진 목걸이를 잡아챘지만 이름은 잊어버렸다. 그녀는 즉시 야스와다로 돌아왔고, 인간 세상을 돌아다니는 대신 어린 신관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맡게 되었다.

전투 교관이라는 말직(末職)에 머무르면서, 모티스는 연회에 드나들며 환영검으로서의 명성을 쌓아 나갔다. 키가 두 배에 달하는 괴수조차도 그녀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가끔은 인간과의 검투를 구경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었다. 모티스는 그런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요정은 그녀가 인간에게 패배했으리라 비웃곤 했다. 첫 번째 임무에서 도망치고는 교관으로 보직을 변경한 것도, 인간과의 대결을 피하는 것도 모두 그 탓이라고 했다. 모티스는 변명하지 않았다.

"모른다! 나는 평생토록 야스와다에만 있었어. 인간의 피보다는 요정의 피를 더 많이 보았다. 모두 살이 물렁한 마법사였지."

"헌데 인간 말이 나보다도 능숙하오."

"무슨 소리를 하려느냐?"

부모는 막내딸이 어릿광대 노릇에 매진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교관 자리에 만족하는 것을 아쉬워했다. 그들은 모티스가 제사장 직분은 어렵더라도 추적대의 지휘관 자리까지는 탐낼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사실이었다. 하지만 추적대에 복귀한다면 재차 인간들의 땅을 밟아야 할 터였다.

그녀는 늙은 부모를 사랑했고, 자신이 나고 자란 도시를 사랑했고, 귀가 길고 마법에 능한 동족을 사랑했다. 그래서 야스와다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들에게 배반자로 남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잊어버렸지만 어떤 것도 잊히지 못했다. 그녀는 두 개의 세계 사이에서 오래도록 방황했다.

은빛매 본가의 후원에서 토텐부르그를 마주친 것은 고뇌가 숨 쉬듯 당연한 우울로 변한 뒤였다. 그는 모티스의 검무를 칭찬했고, 그저 웃었다. 그 미소에는 명문가의 요정들이 보이던 경멸도, 부모가 드러내던 미련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녀는 정원에 앉아 그와 조금 더 이야기했다. 토텐부르그는 은빛매의 이름 아래 무능력자로 살아가는 게 어떤 일인지를 말했고, 모티스는 귀족 중에서 검을 다루는 이가 자신뿐이라고 밝혔다. 햇살이 이상하리만치 엷게 부서지고 산딸나무가 막 꽃을 펼치던 날이었다. 그래서 모티스는 자신이 토텐부르그와 혼례를 올리게 될 것임을 예감했다.

그녀에게 토텐부르그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곁에 앉아 햇볕을 마주할 때에는 모든 것을 진실로 잊을 수 있었다. 인간 사제를 따라가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다. 도시와 그 도시의 사람들에게 사랑할 가치가 있다고 믿을 수 있었다. 모티스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그렇게 느낀다는 사실이었지 토텐부르그의 진의가 아니었다.

…두 칼날이 계속 불꽃을 튀겼다. 볼로디아의 자세는 흐트러짐 없이 견고했지만 목소리는 불안과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다.

"나는… 나는 당신 같은 이가 여기에서 목숨을 저버리는 것은 실로 아까운 일이라고 믿소. 내 손으로 보석을 부수고 싶지 않아."

"그래서? 그래서 어쩌겠다는 말이냐? 그러면 내가 네 목을 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볼로디아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서는 천천히 운을 뗐다.

"화신께서는 너그러운 분이라오. 요정이라도 성품이 훌륭한 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지. 당신은 명예로운 검사요… 나는 알 수 있소. 당신과 동료가 되고 싶소. 당신과 함께 전장을 누비고 싶소."

그 대답과 동시에 오래된 절망이 폭발했다.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 동족을 저버릴 것이라면 이미 그랬어야만 했다. 스승에게 카스바 투기장 이야기를 듣던 시절에. 혹은 인간 사제의 목걸이를 잡아챈 날에. 그러나 모티스는 3교구의 신관이자 토텐부르그의 반려였다…….

모티스는 그저 울부짖었고, 미칠 듯한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무아경 속에서 속삭임이 크기를 키웠다. 어룽대는 빛무리 너머 제국의 망령이 그녀를 불렀다. 그것이 손짓했다. 손짓하면서 나나우아친의 최후를 알렸다. 시야는 어떤 것도 분간하지 못할 만큼 흐려졌지만 몸은 나아갈 방향을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

"볼로디아!"

모티스는 마지막으로 절규했다.

"내 목걸이를 세카두 서부 회당으로 가져가 다오! 나를 기다리는 인간이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녀는 방향을 틀어 아득한 힘의 소용돌이를 향해 몸을 던졌다. 세계의 한 자락이 일그러졌고 살과 뼈는 수정 가루로 변해 산산이 흩어졌다. 이윽고 폐허가 그 혼을 완전히 으스러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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