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내가 나를 버리고 (3)
모티스는 힘이 다할 때까지 내달렸고, 폐가 중 한 곳에 몸을 숨겼다. 벤트레스는 그제야 겨우 진지한 태도를 취했다.
"붉은 머리의 남자가 있었다고 했죠?"
"허공으로 뛰어올랐을 때 잠시 본 것뿐이지만… 다른 둘을 처치한 뒤 나오고 있더군요."
"그쪽은 그게 아즈리온의 화신이라 의심하고 있고요."
"확실하진 않습니다. 다만… 2교구 분석실에서는 아니라고 했어도, 요새는 정말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니까, 밤하늘마저 거짓말을 하게 됐는지도 모릅니다. 화신이 내려올 이유도 충분하고요. 당신의 의견을 묻고자 합니다."
"그래요, 나도 딱히 반론할 마음은 없어요. 잠든 분께서 깨어나셨는데 아즈리온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니까요. 자, 보자… 요정 둘과 망령 하나가 아즈리온의 화신과 맞서 싸워야 한단 이야기군요. 필멸자가 향하는 곳을 살피는 신께 영광 있으라!"
벤트레스는 즐거운 듯 외치고서는 모티스에게로 고개를 기울였다. 친구에게 짓궂은 농담을 속삭이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마저 도망칩시다. 폐허 바깥으로 가요."
"도망치자고요?"
"당신도 보았겠지만, 여기에서 목숨을 잃거든 박제조차 되지 못해요. 그대로 바닥에 스며들어 수정 융기로 변하죠. 그것보다는 도망이 나을 겁니다. 혹은 투항을 선택지에 넣을 수도 있어요."
뜻밖의 대답에 당혹이 밀려왔다. 폐허의 문제를 해결할 단서도, 작금의 적수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 도망이나 투항을 입에 담는단 말인가? 어째서?
그녀는 테네브로즈와 벤트레스가 어둠달의 일원임을 떠올렸다.
"나나우아친과 함께하고서도 배신자를 죽이지 못한 이유를 묻고 싶군요. 혈족을 마주하고서는 그릇된 마음이 생긴 건 아니겠죠!"
"아뇨, 혈육의 정과는 관련이 없어요. 합리적인 계산의 결과일 뿐이지요. 내 통찰력이 말하기를 지금으로서는 도망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는군요."
모티스는 그 말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인간 무리를 이끄는 것이 아즈리온의 화신일지라도, 이쪽은 아 드지즈의 파편을 조력자로 두고 있었다.
나나우아친은 지금껏 열두 체의 분신을 흡수했다. 검술과 마법은 그만큼 정교해졌으며 몇 가지 신호도 알아듣게 되었다. 완전히 대등한 싸움을 벌일 수는 없겠지만 타격을 입히는 것은 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마지막 수단까지도 계산에 넣고 있었다. 무색 마력 갈래를 일시에 터뜨려서, 폭발이 서로의 몸을 산산이 조각내게끔 하는 것이다…….
"승산이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알아요. 그래도 반드시 압승을 거둘 필요는 없습니다. 한 명이라도 죽이는 걸 목표로 삼아요. 나는 3교구의 말단 신관일 뿐이니까, 아무것도 아닌 칼잡이 하나와 저들 중 하나를 맞바꾼다면 우리에게는 훌륭한 거래가 되는 셈입니다."
"아니, 싸우다가 죽겠다고요? 그게 도대체 누굴 위한 선택인지 모르겠군요."
벤트레스가 반문했다. 의아함보다는 비아냥거리는 기색이 더욱 짙었다.
"임무를 위해서요! 동족과 도시를 위해서요!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요!"
"나는 동족을 위해 역사를 연구한 게 아닙니다. 나나우아친을 따라온 것도 임무 때문은 아니고요. 그건 모두 나를 위한 일이었어요. 내가 궁금했던 것은 모두 알게 되었으니, 여기에서 피를 쏟을 마음은 없습니다. 그건 어리석은 짓일 뿐이에요."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모티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희생은 숭고한 일입니다!"
"희생은 덧없도록 숭고한 일이죠."
벤트레스가 비꼬듯 반복했다.
"나는 거짓되고 좋은 말을 위해 몸 바치는 이들을 사랑해요. 역사는, 우리의 세계는 헌신적인 사람들의 피로 이루어져 있거든요. 그 피가 어디를 향해 흐르는지가 다를 뿐입니다."
"그 말이 옳다고 칩시다. 대의를 위해 몸바친 이들은 거짓말에 넘어간 얼간이일 뿐이고, 오직 살아남은 이들만이 행복하다고요. 하지만 사람을 살아 있게끔 하는 건 바로 그런 어리석음입니다. 야스와다를 지켜낸 선조들의 목숨이 우리를 낳고 길렀죠. 이제는 우리 차례가 온 거예요!"
"난 그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껴요. 당신의 뜻도 존중합니다. 단지 나만큼은 그 핏줄기에 몸을 담그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이기적인 태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다니 애석한데요."
조여드는 침묵을 사이에 두고는 완전히 다른 화두가 던져졌다.
"그쪽이 나를 왜 따라왔는지 알아요.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처럼 아름다운 존재가 그런 불한당에게 얽매여 읽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일드얀은 교활하긴 하지만 너른 세상을 볼 마음이 없고, 쉭겐은 대모님의 말을 실어 나르는 일밖에는 하지 못하는 놈이니까요."
모티스는 숨이 한순간에 멎는 것을 느꼈다. 모두 알았단 말인가? 쉭겐의 명령도, 자신의 목적도? 머릿속이 새하얘지더니 손이 무의식적으로 칼자루를 붙잡았다. 벤트레스는 그녀의 안색을 살피고는 계속 흥얼거렸다.
"당신이 곧바로 칼을 겨누지 않으니 다행이군요.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칼잡이를 이길 자신은 없거든요. 자, 그렇다면, 당신의 반려에 대한 것도 이야기해 볼까요?"
"닥쳐요!"
그 이야기까지 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절규하듯 외친 모티스는 벤트레스의 뺨을 후려갈겼다… 팔을 뻗기 전에 숙고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떠올리고 있던 바였으므로.
"토텐부르그는 나의 가족이에요.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벤트레스는 붉어진 뺨을 손등으로 문질렀고,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그래요, 그만두도록 합시다. 원래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요. 이제부터 할 일은 무엇인가요? 동족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겁니까, 아니면 모든 것을 저버리고 야스와다로 돌아가 그 유약한 가족과 함께할 겁니까?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죠?"
모티스는 말없이, 얼어붙을 듯한 분노 속에서 은발의 요정을 노려보았다. 그 감정이 어디를 향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윽고 시야가 넓어지면서 그 뒤편의 빛을 눈에 담았다. 사방을 덮은 수정막은 각자의 장소에 배치된 광점으로 변해 하나의 거대한 점묘화를 이루어갔다. 누군가의 초상화였다.
누구일까? 토텐부르그? 아니면… 인간들? 모티스는 잠시 잃어버린 시간 속에 멈추어 있었다. 이윽고 벤트레스가 화려한 앵무의 깃을 만지작거리듯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흠칫 놀라 현실로 되돌아왔다. 어룽거리는 빛무리가 한순간에 멀어지며 초상화 역시 허물어졌다.
대신 빙긋 웃는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충고를 해 드리겠습니다. 나를 죽이고 도망칠 생각이라면, 폐허를 벗어나기 전까지는 나나우아친의 곁에서 결코 멀어지지 말아요. 그러지 않는다면 분명 폐허의 일부가 되고 말 테니까요. 목소리에 저항하려면 당신만이 당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희생과 헌신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타인이 속삭이는 사명이 아니라 자기만족과 착각임을 이해해야 하지요. 그것의 결정권자는 오로지 자신뿐이에요."
그 문장은, 문장을 이루는 낱말은 다른 세계를 넘어오는 데에 힘을 다하고는 그만 추락해 버리는 듯했다. 어절만이라도 약간이나마 건지려 노력해 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어쩌면 그 모두가 그녀의 안쪽에, 완전히 다른 형태로,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삶을 계속 사랑할 수 있으려면, 고통조차 환희로 바꾸려면 많은 것을 망각 속에 숨겨야 했다. 쉭겐은 토텐부르그와 단둘이 있을 때에는 누구보다도 친한 형제처럼 보였다는 것. 하지만 모티스의 앞에서는 비정한 계략가로 돌변했다는 것. 그리고 오래전에 잊어버린, 더 많은 것들이…….
"그런데 당신은 그런 생각을 받아들이는 일에 익숙지 못한 것 같군요."
"나도… 알고 있습니다. 언제나 알았어요. 모르는 게 더 나았을 뿐이에요."
진실을 고르는 것은 자신의 몫이었다. 선택이 옳았는지를 수없이 물었으나 후회한 적은 없다. 후회할 수 없었다.
사람은 스스로를 기만하는 착각과 태연하게 합일할 수 있다고들 한다. 그것은 마음의 본질일 것이다. 믿음을 배반하는 것을 시야에서 치워 없애고, 잊고, 외면하면서, 한 사람의 세계를 점차 견고하게 닦아 나가는 것이.
그러나 고통은 여전히 고통이었다.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알게 된 후에도. 자신을 옥죄는 세상이 한순간에 깨져 나가는 순간을 얼마나 꿈꾸었던가? 동족의 명운도, 반려에 대한 것도, 자신마저도 모두 온기도 냉기도 없는 암흑 속으로 되돌아가서…….
"그래요?"
벤트레스는 날카로운 웃음을 터뜨리더니 한 발짝 물러났다. 여전히 우아한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그러면 하나만 말해 줘요. 나는 궁금한 건 참지 못하거든요. 당신은 도시의 역사를 위해 죽는 겁니까,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죽는 겁니까, 자기 자신을 위해 죽는 겁니까?"
망각 속에 파묻은 것들을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입술을 잘근거리던 그녀의 귀에 거슬리는 울림이 들려왔다. 인간들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는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고, 말했다.
"가세요! 나는 당신을 잊었습니다. 당신은 여기에 없었던 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벤트레스는 엄숙한 자세로 무릎을 꿇고서는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모티스는 그가 등을 돌려 걸어 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심장이 네댓 번 뛸 시간이 지나 벤트레스가 창밖에 나타났다. 남자의 뒷모습은 사방을 점거한 빛의 제전 속에서 점점 작고 초라해졌지만 끝끝내 사라지지는 않고 검은 점이 되었다.
마침내 소리가 벽 너머까지 닥쳐왔다. 그녀는 검을 단단히 쥐고서는 지워진 신화의 한 조각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나나우아친은 짐승이 본능을 따르듯 전투 태세를 취하고 있었지만 눈에는 빛이 없었다.
* * *
벤트레스는 도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수정막이 잿빛 포석의 골을 메우며 매끈하고 올곧은 길을 만들고 있었다. 굳어 버린 주민들은 도시가 살아 있던 시절에는 단 한 번도 없었을 생동감과 아름다움을 간직했다. 천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악덕과 추한 것들이 모두 휘발된 듯했다.
어느덧 멀리서부터 날카로운 울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빛에 반사되면서 폐허 전체가 뾰족한 가시로 뒤덮인 듯한 착시를 일으켰다. 그는 조금 더 걷다가 주택가의 초입에서 멈췄다. 허리께까지 올라오는 울타리 너머 과수의 유연한 가지가 열매를 매달고 아래로 기울어 있었다.
그것은 황동과 사파이어로 만든 거대한 브로치처럼 보였고 폐허는 무정한 거인의 보석함 같았다. 벤트레스는 새파란 과실을 만지작거리다가 나뭇잎을 떼어 으적으적 씹었다. 수정막이 산산이 부서지며 입천장과 혀에 박혔다.
핏물을 바닥에 뱉고서는 그게 바닥의 일부가 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숲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상태를 되찾았다. 그는 웃었고, 점점 더 크게 광소하다가, 허공을 향해 외쳤다.
"아자라스, 난 당신이 뭘 봤는지 압니다! 내 가엾고 어리석은 아우님이 왜 저렇게 되었는지도요! 그런데도 당신은 내게 가주 자리를 떠넘기려 했지요! 참으로 다행이로군요, 내가 먼저 도망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리고 벤트레스는 소리가 있던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