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내가 나를 버리고 (2)
란드와르는 호구조사를 하다가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까지 듣게 되었다. 모티스는 3교구의 전투 교관으로서 인간 세상에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고. 병약한 남편이 있는데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른다고. 부부끼리 사이가 아주 좋다고.
"넌 지금 그걸 나한테 말해서 어쩌자는 거냐? 생각이 있어, 없어?"
"아니, 모티스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래서 말씀드린 건데요."
죽일 놈의 사정은 알 바가 아닌데 어쩌다 보니 알게 되었다. 란드와르는 요정 녀석에게 눈치를 기대한 자신을 탓했고,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되새겼다. 비열하고 추잡한 악당도 누군가에게는 사랑스러운 배우자일 것이다.
마음속의 목소리가 아드벡이나 테빈은 예외일 거라고 속삭였지만(일이 꼬였다고 칼부터 뽑아드는 놈이라면 보통은 집에서도 망나니짓을 하고 다니기 마련이다) 란드와르는 그냥 무시했고, 병상에 앉아 반려가 돌아오길 기도하는 요정에 대해서도 잊어버렸다.
그러자 네 명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만이 남았다.
"아무튼 지금… 벤트레스랑 모티스가 따로 나와 있다고 하거든. 기억 조각이랑 같이. 내가 들어가서 두 놈을 먼저 처리하고 나올 테니까 네가 대장군님이랑 가서 셋을 맡아라. 바로 합류할 테니까 버티기만 하면 돼. 로안이랑 셀리멘은 근처에서 기다리게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물의 효과가 끝났다. 로안과 헤이딘에게 논의를 전달한 란드와르는 수정 조각이 빠르게 라덱을 집어삼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정신의 감옥이 폐허의 이상 현상을 촉진시키는 듯했다.
자리를 뜨기도 전에 요정은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수정 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피를 흘리지 않았으므로 서로에게 좋은 일이었다. 란드와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하지만 이제는 피를 보아야만 했다.
***
문을 밀고 들어가자 앉아 있던 요정들 중 하나가 부스스 일어났다. 동료 중 하나라고 생각한 듯 긴장한 기색은 없었다. 그러나 란드와르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놈이 소리 내어 침입을 알리는 동시에 란드와르의 몸이 앞으로 쏘아지듯 나아갔다. 요정은 몇 번의 검격을 튕겨냈지만 이내 주의를 잃고 실수를 저질렀다. 염동술에 쓰이는 무색 마력은 지극히 섬세하기 때문에 집중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진다면 완전히 다른 움직임을 빚어내고 말았다.
뒤로 비틀거리며 쓰러진 요정은 예리한 죽음이 날아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칼이 목을 찢고 들어가면서 피가 사방으로 터져 나왔다. 살아남은 쪽에게는 기회가 되는 셈이었다. 혈마법사에게 뜨거운 피만큼이나 훌륭한 제물은 없었다.
피웅덩이가 채찍처럼 날뛰며 란드와르의 복부를 노렸다. 란드와르는 그제야 남은 하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멀찍이 자리를 피하고서는 혈기 피조물을 조종하고 있었다. 또 다른 주문을 읊는 듯 입술이 미미하게 달싹였다.
***
"―인간이다!"
다급한 외침이 폐허를 뒤흔들었다. 동시에 늑대 괴수가 모티스와 벤트레스를 가로막았다.
모티스는 검을 뽑아들어 맞섰고 벤트레스는 재빨리 물러났다. 그를 향해 보라색 마력 줄기가 올가미를 던지듯 쇄도했다. 주문이 보호장에 가로막혀 힘을 잃자마자 수풀에 몸을 숨기고 있던 요정이 고개를 내밀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우님, 오랜만이야! 일단 마법은 좀 거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나는 혈족과 싸우고 싶지가 않아."
"벤트레스, 댁의 피를 볼 때가 왔습니다!"
"아니, 아우님은 예나 지금이나 버릇이 없군. 형님이라 부르라고 수천 번은 말했을 텐데. 그래도 나는 너그러우니까 소원을 들어 주도록 하지. 친애하는 아우님이 원한다면 피쯤이야 얼마든지 흘릴 수 있다는 거야."
요정의 피는 훌륭한 제물이었다. 벤트레스는 보호장을 유지한 상태로, 품에서 단검을 꺼내 자신의 팔뚝을 찢었다. 선혈이 왈칵 터져 나오며 옷소매를 붉게 물들였다. 그는 보호장을 거두며 약한 주문을 잇달아 시전하는 것으로 개전을 알렸다.
"미리 일러두겠는데, 나는 아우님을 좋아해. 우리가 이렇게 싸울 필요가 없다는 거지."
"죽어!"
테네브로즈는 짧은 울부짖음으로 응수했다. 이 사촌 형제는 그에게 짜증과 분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존재 중 하나였으며 그는 이 기회를 놓칠 마음이 없었다. 솔로틀이 영혼을 도려내기 전부터 테네브로즈는 벤트레스의 죽음을 원했다.
그러나 벤트레스의 여유에는 근거가 있었다. 나나우아친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던 것이다. 요정의 칼날이 배를 꿰뚫기 직전에 헤이딘이 차원 분리를 시전했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심각한 부상을 입었을 터였다. 그걸 본 벤트레스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이런 맙소사, 일단은 멀쩡해서 다행이군. 오해는 하지 않길 빌겠어. 나는 정말로 아우님의 목숨을 거둘 마음이 없거든……."
***
로안은 요정들에게 표적이 되지 않도록 셀리멘과 함께 숨었다. 갖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결국엔 짐덩어리가 되고 말았다는 좌절감과 천 년 전의 일에 대한 충격이 마구잡이로 뒤섞이고 있었다.
한순간의 비겁함 때문에 모든 공로가 사라지지는 않는 것처럼, 수많은 공을 쌓았다고 해서 비겁함이 지워지는 것 또한 아니었다. 알세스트에 대한 입장은 그랬다.
하지만 셀리멘에 대한 것은 쉽게 정리하기가 어려웠다. 로안은 그녀의 흔적이 무슨 마음으로 자신에게 과거를 보여주었을까 가늠해 보았다. 천 년간, 심장에 갇혀 지낸 탓에 원망에 잡아먹히고 만 걸까? 하지만 폐허는 자신이 요정에게 죽는 것을 막아 주었다.
그는 셀리멘을 힐끔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서 보던 것과 놀랍도록 닮은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자신이 어릴 적에는 알세스트의 현신이라 불리곤 했다는 사실이 이어 떠올랐다. 어쩌면 이 기억은 후손과 시조를 혼동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셀리멘님."
로안은 어조를 낮추어,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저는 그분의 먼 후손일 뿐이고, 아는 건 셀리멘님 덕분에 우리 모두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뿐이에요. 사고를 막아내신 것이든, 아니면 처음부터 죽음을 감수하고 심장을 터뜨린 것이든 간에… 어쨌든 셀리멘님이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살렸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까요. 알세스트님이 거짓말을 하셨긴 하지만 셀리멘님을 깎아 내린 적은 없어요. 모두가 셀리멘님을 존경해요."
물빛 눈이 깜박임도 없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조금 휘어진 눈매는 웃는 것 같기도 했고 흐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로안은 잠시 그 어느 시간도 아닌 곳에 멈춰 있었다. 셀리멘의 입술이 열리며 짧은 어절을 불어 내쉬었다.
"나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조금 더 기다려 보았지만 침묵만이 깊어질 뿐이었다. 이윽고 낯선 생각들이 벼락처럼 뇌리를 쳤다. 헤이딘의 반지를 꼈을 때와 비슷한 듯 다른 느낌이 있었다. 신탁이었다.
<모티스가 도망치고 있습니다. 따라 이동하십시오.>
***
모티스는 몇 합을 겨루자마자 상대가 평범한 늑대인간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괴수는 거대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놀랍도록 날렵했으며 그만큼 신중했다. 모티스의 변칙적인 움직임에도 아무런 동요를 보이지 않을 정도로. 뿐만 아니라 피할 수 없는 검격을 받아낼 때에는 녹색 마력을 다루기까지 했다. 마법의 일종인 듯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그럴듯한 적수를 만난 게 언제였는지를 돌이켰다. 명문가의 여흥을 위해, 연회장의 광대가 되어 괴수와 맞서 싸운 적은 수없이 많았으나 이지가 있는 존재를 상대한 일은 오래전의 기억에만 남아 있었다.
"검을 겨뤘더라면 좋은 승부가 되었을 텐데, 아쉽구나!"
한 발짝 물러난 모티스는 인간의 말로 외쳤고, 일격을 내리꽂기 위해 높이 뛰어올랐다. 그 순간 피투성이 남자가 멀리서부터 가까워지는 장면이 시야 한 귀퉁이를 스쳤다. 오두막에 있던 둘을 처치하고 나온 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란드와르의 붉은 머리를 알아보았다. 그가 화신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동작에 흔들림을 더했다. 칼끝은 가죽을 조금 베고는 바닥의 수정을 꿰뚫고 들어갔다. 완벽한 실패였다. 볼로디아가 빈틈을 놓치지 않고 모티스를 몰아붙였다. 일단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계산이 섰다. 여기에서 화신이 가세한다면 승산은 낮았다.
테네브로즈가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한 모티스는 그쪽으로 빠르게 몸을 날렸고, 목을 칠 요량으로 검을 크게 휘둘렀다. 나나우아친 역시 놈의 허벅다리를 노리며 달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두 칼날은 허공을 가르듯이 놈을 통과했다. 테네브로즈가 다시, 한순간에 멀어지더니 벤트레스의 목소리가 당혹을 뚫고 들려왔다.
"아, 나나우아친과 함께했는데도 아우님을 죽이지 못한 이유가 있어요. 칼을 찔러 넣으려 하면 저렇게 되지 뭡니까. 금지된 마법의 일종인 것 같아요. 계속 근처를 맴돌며 도망만 다니더군요."
정말일까? 기묘한 즐거움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모티스는 벤트레스가 놈을 일부러 살려 두었을 가능성을 외면했고,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나나우아친과의 대화는 아직 불가능했지만 짧은 신호는 충분히 전할 수 있었다.
"나나우아친! 갑시다!"
그렇게 외친 모티스는 칼을 허리춤에 맸다. 붉은 머리 남자는 아직 전장에 모습을 내밀지 않았지만 늑대인간은 빠르게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그녀는 벤트레스의 무릎 아래로 팔을 밀어 넣었고, 몸 전체를 안듯이 들어올렸다.
"늑대인간, 다시 만날 때에는 검을 겨룰 수 있길 빌지. 그때는 도망치지 않으마!"
발밑에서 무색 마력을 폭발시키는 동시에 선명한 고통이 등줄기를 강타했다. 마력 갈래가 순간적으로 통제를 벗어나며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녀는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고서는 허공을 달려 나아갔다. 나나우아친이 근접한 거리에서 그 뒤를 따랐다.
"이거 원, 누가 보면 혼례라도 치르는 줄 알겠군요. 신부, 신랑을 안고 입장! 혹시 그 반대인가요? 어쨌건 괜찮아요, 나는 그게 더 익숙하니까요. 그나저나 왜 갑자기 도망가려는 거예요? 오랜만에 아우님을 만나서 즐거웠단 말입니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벤트레스의 광기는 여전했다. 모티스는 헛소리에 일절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필요한 사실만을 전했다.
"붉은 머리 인간을 봤어요! 화신일지도 모릅니다. 늑대인간도 평범한 상대가 아니고요.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기이한 힘을 다루더군요. 이 상황에서 한 명과 더 맞서야 한다면 곤란해요. 전략을 정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