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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41화 (142/258)

141화 내가 나를 버리고 (1)

수정 구슬이 작동하면서 세상이 한순간에 멎었다.

뭘 숨기려 했는지는 몰라도 티아가 걱정한 사태는 없었다.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이것 때문에 시말서를 쓸 수도 있겠지만, 뭐, 시말서 좀 써 보라지. 전담 천사님, 들리십니까? 우리 사이에 믿음 좆도 없어진 게 누구 탓인지는 아시죠?

<죄송하다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됐고, 파울리스한테 전해요. 꿈에 튀어나오면 위스키를 부어 버릴 거라고. 당분간은 면상 볼 마음 없습니다.

명색이 초월자인 양반한테 말이 심했다고는 생각했으나 후회는 없었다. 계약서상의 위치와는 무관하게, 진짜 갑은 대체 불가능한 쪽이기 마련이다. 강현은 자신의 쓸모를 확신했다. 이 상황에 다른 지구인을 집어넣어서 뭘 어쩌겠단 말인가?

"설명을 듣긴 했지만… 신기하군."

천계를 향해 욕을 실컷 퍼붓던 그는 뜻밖의 목소리에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랬다. 의식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잘 생각해보니 볼로디아도 신이었다. 홀로그램을 처음 본 어린아이처럼 로안을 살피고 있었다.

란드와르는 손이 소년의 머리를 통과해 나아가는 걸 보고는 가까스로 웃음을 참았다. 대장군님,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체통을 지키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보름쯤 전에 로야페타에서 쓰인 적이 있는데, 처음 겪으십니까?"

"그렇소. 쉴 때에는 줄곧 심장부에 머물러 있었거든. 아직은 익숙하지 않아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기 어렵다오."

"말씀드렸던 것처럼, 요정의 성물입니다. 세상을 잠시 멈추는 효과가 있어요. 심장을 얻은 덕에 영향에서 벗어나신 모양입니다."

"이 상태로 효력이 다하면 어떻게 되는 거요?"

"합쳐지는데요. 저 애는 머리가 꿰뚫려서 죽고 대장군님은 팔에 시체를 달고 다니게 되는 겁니다."

요정의 대꾸에 볼로디아가 서둘러 팔을 뺐다. 테네브로즈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란드와르를 향해 물었다.

"나으리, 이제 뭘 하면 됩니까?"

"기다려야지. 할 거 없어."

마력 갈래를 추적하고 벤트레스의 위치를 알아내는 건 천계의 몫이었다. 이렇게라도 숨 돌릴 시간이 나니 다행이었다. 그대로 일에 착수했더라면 스트레스로 머리가 터졌을지도 모른다.

바닥에 주저앉아 테네브로즈를 빤히 바라보았다. 뭔가 숨기는 게 있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차원 생쥐들에게 시달리다 보니 이제는 요정 놈이 나아 보였다. 최소한 아직까지는 눈에 보이는 사고를 친 적이 없지 않나.

잠깐만. 충격적인 사건이 잇달아 터진 탓에 정신이 해이해진 모양이었다. 강도가 옆에 있다고 해서 소매치기가 면죄부를 얻는 게 아니었다. 언젠가는 이 새끼한테 뒤통수를 된통 얻어맞으리라는 불안감은 여전했다.

"나으리는 절 왜 그렇게 보십니까?"

"내가 널 보면 안 돼?"

"됩니다."

요정 녀석은 녀석대로 별 시답잖은 것으로 시비를 걸고 있었다. 헛소리도 잘만 하는 걸 보면 일이 편한 모양이었다. 란드와르는 테네브로즈를 조금 더 빤히 바라보다가 볼로디아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넷이라면… 인원 배분을 어떻게 할 생각이오? 일단 소년은 쉬도록 두는 게 좋을 것 같소만."

"아무래도 그렇겠죠."

벤트레스 일행은 고작 넷이었다. 요정 전사를 합해도 다섯. 구태여 부상자를 투입시킬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압승을 점치기는 어려웠다.

"일단 벤트레스가 가진 기억은 셀리멘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합니다. 우리가 라덱이랑 싸우는 동안 계속 조각을 모아 나갔을 테니 거기에서 차이가 또 벌어졌을 테고요. 제가 기억 조각을 상대해야 할 겁니다."

"뜻대로 될지가 의문이오. 저쪽에서 어떻게 나올지가… 그 요정이 떠들던 말이 있지 않았소? 모티스가 남아 있었더라면 우리네 요정을 죽여 놓았을 거라고."

란드와르는 벤트레스 일행의 구성을 상기했다. 일단 벤트레스는 테네브로즈와 같은 가문이니까 야스와다 학파일 테고, 혈마법사가 둘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모티스는 나우파나의 마법사일 것이다.

"모티스는 아마 염동술을 쓸 겁니다. 근접 거리에서만 효과가 있는 마법이죠. 요정 녀석이 너무 가까이에서 얼쩡거리지만 않는다면 목이 달아날 일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닌데요. 집안에 힘도 없고 바깥으로 나가는 걸 싫어해서 출세를 못 했다 뿐이지 실력으로만 따지면 야스와다에서 손꼽히는 작자란 말입니다."

요정 녀석이 불쑥 끼어들었다. 실력이야 그렇다 쳐도, 쉬운 일이 아니라고? 정신 조작 주문이야 저항이 뜰 수 있다고 쳐도, 야스와다 학파만큼이나 대인전에 유리한 마법 계열은 없었다. 전사가 상대라면 발을 묶고 주문 공격은 보호장으로 막으면 그만인 것이다.

"걔가 너 노리면 발 묶고 도망치면 되잖아. 아니야?"

"그것도 잠깐 아니겠습니까. 나으리께서도 사이라크를 상대했으니 염동술사들이 어떻게 싸우는지는 알 텐데요. 그것보다 더 귀찮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땅에서야 대장군님께서 막으신다 쳐도 허공으로 솟으면 방법이 없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넷, 아니, 실제로는 다섯이니까 협공이 제 쪽으로 오면 그대로 죽는 셈이지요."

부제사장까지 하다 온 놈이라 그런지 말은 모두 옳은 말이었다. 란드와르 역시 다인전에 이골이 난 하드코어 게이머로서 그 점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었다.

"그건 그런데."

"그런데요."

"난 널 믿는다는 거야."

"평소에는 제가 숨만 쉬어도 의심하셨지 않습니까."

"오늘부터 반성하려고. 동료를 의심하면 안 되잖아."

농담을 던지긴 했지만 마음이 무겁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상대할 인원이야 라덱 일행과 비슷하다 쳐도 전력은 벤트레스 측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란드와르는 카스바 투기장에서의 전법을 상기했다. 2대 2, 혹은 3대 3만 되어도 실시간으로 택틱이 변하는 판에 뭔가를 미리 정해두고 가는 게 쉬울 리가 없다. 선공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 됐다.

*  *  *

숲을 지나 도시 외곽으로 진입한 직후였다. 벤트레스와 다른 둘이 임시 숙소에서 긴장을 푸는 동안 모티스는 밖으로 나와 빛무리 한복판에 섰다. 검무를 연습하는 것은 그녀의 일과였다. 낮도 밤도 없는 세계를 헤매고 있을지라도.

시야가 크게 돌면서 광점에 긴 꼬리가 생겼다. 그 꼬리가 생각의 흐름처럼 이어지다가 이내 거대한 빛의 일부가 되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은 현실을 잊는 데에 도움이 된다… 잊자. 라덱과 그를 따라간 요정들이 모두 실패하리라는 것을. 폐허에서의 성패는 벤트레스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그러나 토텐부르그를 위해서는, 그를 죽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이미 오래전에 잊힌 것들을, 다시.

바꿀 수 없는 사실이 허공에 모였다. 모티스는 거기에 형태가 있다면 인간 사제나 카스바의 검투사가 될 것이라 상상했다. 아니, 싸움에 몰두할 수 있다면 겉모습은 무엇이든 좋다. 반 바퀴 돌아, 서로의 검을 맞대고, 원을 그리듯이 상대를 뿌리친다. 앞발을 내딛고 한 손을 뒤로 뻗는다. 그러고는 짧게 도약하면서…….

"당신은 지치지도 않는군요."

우아한 목소리에 모티스는 현실로 되돌아왔다. 물결치는 은발을 어깨까지 길러 묶은 요정이 열 발짝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벤트레스였다.

"나는 이런 식으로만 쉬어요. 검을 손에 쥐면 정화되는 기분이 듭니다. 어두운 충동이 모두 사라지고 스스로마저 잊어버리죠."

"부러운 일이로군요… 망각은 축복이니까요. 나는 그 은혜를 거의 입지 못했답니다."

벤트레스는 팔을 들어 고리 모양의 귀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넓고 헐렁한 소매가 흘러내리며 그 아래의 상흔을 드러냈다.

"그래요. 팔뚝의 상처는… 폐허 때문입니까? 속삭임에 끌려가는 걸 막기 위해서요?"

"라덱에게 충고했을 때 이야기했던 것과 같아요. 물론 그네들은 내 말을 따르더라도 오래 버티진 못하겠지만요. 나는 진실로, 진실로 긴 세월을 견뎌냈어요. 정신이 온전했던 시간이 아닌 시간보다 짧지요."

그는 소리 내어 웃더니 옛 이야기로 주제를 틀었다.

"성년식을 치르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폐허에 다녀왔어요. 아버지는 못난 아들을 치워 버리길 원했을 겁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어릴 적부터 버릇이 아주 없는 아이였거든요. 어찌나 건방진지 폐허가 무슨 말을 속삭이든 듣지 않고 그대로 돌아왔죠. 그런데 맙소사, 속삭임이 나를 너무 아끼지 뭡니까. 대륙을 반절이나 가로질러서 야스와다까지 쫓아오더군요."

"당신,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한 세기가 넘었던가요?"

"대강 그 언저리예요, 나트람이 지금의 나와 비슷한 나이에 가주 직분을 얻었다고들 하니까. 이렇게 되기 전은 기억이 잘 안 나요. 좋았다는 것만 어렴풋하게 떠오를 뿐입니다. 나는 딤 나겔의 딸과 친했어요. 하지만 내가 미친 후로 그분은 다른 이와 혼례를 올리고서는 황무지에서 죽었고, 아, 그리고……."

벤트레스는 모티스의 목덜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격한 움직임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도록 조여 묶은 목걸이가 거기에 있었다. 검고 매끄러운 나무구슬을 꿰어 만든 것이었다. 요정들은 그게 옛 정인의 증표일 것이라 수군거리곤 했다.

"야스와다는 내가 처음 폐허에 발을 들였던 칠십 년 전과 똑같은 모습이죠. 그걸 이루는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망가졌는데, 그런데도 도시는 여전히 도시라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군요."

"알 텐데요. 당신은 이미 알고 있어요. 솔직해져 봐요."

모티스는 자신을 뒤따르는 낱말들을 떠올렸다. 나우파나 귀족 가문의, 방계 혈족의, 막내딸. 3교구의 말단 신관. 연회장의 곡예사. 모든 호칭은 도시 안에 갇혀 있었다… 그 테두리 안에서 그녀는 행복한 만큼 괴로웠고 괴로운 만큼 행복했다.

하지만 토텐부르그와 함께 정오의 햇살을 받을 때에는 눈부시도록 부드러운 빛 속에서 모두가 사라지고 둘만 남았다. 그래서 가끔은 그가 죽어 버리길 기도했다. 붙잡을 희망이 없다면 불안도 번민도 없을 것이며 자신도 홀가분하게 삶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지점에서 생각이 뚝 멎었다. 망가진 사람의 대오에 스스로가 속해 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딘가 먼 곳에서 목소리가 흐르듯 이어졌다.

"테네브로즈도 어릴 적에는 참 예의바른 아이였어요. 나와는 다르게 가문 어르신들의 예쁨을 받았죠. 내가 괴롭히기라도 하면 엉엉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친구의 애완동물이 죽었다고 한 달 밤낮을 아무것도 먹지 않은 적도 있고요. 그런데 그토록 순하고 얌전하던 아우님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벤트레스는 발작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멈추지 않을 것만 같은 웃음이었다. 모티스는 고문대 앞에 묶인 죄수의 심정으로 거기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아득한 시간이 지나, 다급한 비명이 빛무리를 헤집어 놓았다.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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