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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40화 (141/258)

140화 불신의 굴레

라덱이 깨어난 것은 로안이 마음 정리를 끝마친 뒤였다. 놈은 테네브로즈가 인간들 곁에 선 것을 확인하고는 눈을 부릅떴다. 손수건으로 막힌 입에서 읍읍 소리가 터져 나왔다.

테네브로즈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신의 감옥을 시전했다. 준비야 녀석이 눈을 뜨기도 전부터 끝나 있었으므로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재갈을 풀자마자 걸쭉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조용히 시켜 봐라."

테네브로즈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라덱의 얼굴이 고통으로 물들었지만 한순간이었다. 놈은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떠들어댔다. 죽음을 앞두면 겁이 없어진다는 게 이런 뜻인가?

"이런 썅, 고통 따위로 내 입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네놈에게 붙잡히다니 통탄스럽군. 나한테 일거리를 떠넘기고 낮잠을 잘 때 죽일 기회가 몇 번은 있었는데. 교구 행정을 위해 참은 내가 병신에 머저리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인간 여러분, 특히 붉은 머리 남자분, 댁이 아즈리온의 화신인지 뭐 하는 개자식인지는 모르겠으나 서둘러 저놈을 쳐 죽이길 권합니다. 지금은 멀쩡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착각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일할 때만 겨우 사람 같고 평소에는 물에 빠진 칼린카만큼 지랄 맞거든요. 하여간 제정신이 아닌 건 집안 내력이군. 어둠달 놈 하나는 사사건건 미친 소리만 하더니 도망가서 인간이랑 붙어먹는 중이고, 다른 놈은 여기까지 와서 개짓거리를 하고 있으니 말이야. 발정 난 칼린카보다도 더한 놈."

란드와르는 테네브로즈를 향한 폄하와 비방이 모두 진실이라고 판단했다. 그 자신도 대체로 동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놈의 존재는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다른 놈이라는 게 누구냐."

"우리네 말도 알아들어 주시는군! 인간들 말로 떠들기엔 귀찮으니까 계속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필멸자의 무례를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겠지요. 어차피 지금 죽느냐 한 시간쯤 뒤에 죽느냐 정도의 차이밖에는 없지 않겠습니까."

"대답이나 해."

"누군지 알면 따라가서 죽여주실 겁니까? 물론 그러시겠죠, 아즈리온은 요정을 죽이는 신이라고들 하니 말입니다. 내가 그 장면을 직접 못 보는 게 아쉬울 따름이군요."

순간 라덱의 어조가 돌변하더니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푸념이 터져 나왔다.

"하여간 세상에 되는 일이 없어. 열심히 살았는데도 미친 것들과 얽히면 순식간에 평생이 나락으로 가니 말이야.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좋겠군. 많은 건 바라지도 않아. 당장 일 년 전으로 가서 두 놈만 때려죽이고 나도 목을 매달 거야. 특히 자기가 역사학자라고 떠들고 다니는 놈. 사촌 형제끼리 아주 쌍으로……."

테네브로즈의 절규가 말허리를 끊었다.

"벤트레스!"

평소 태도를 생각하자면 당혹스러운 반응이었다. 테네브로즈가 가끔, 그리운 듯 누님 이야기를 하던 게 떠올랐다. 이번에는 사촌 형제니까… 가족 사이의 정이라는 게 있는 건가? 아니, 그렇다기에는 너무…….

"라덱, 나를 그 정신병자와 똑같이 취급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비록 귀찮은 일을 그대에게 미루고 가끔 헛소리를 하긴 했지만 대놓고 미친 짓을 하고 다니진 않았어!"

역시나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젠장, 나트람 어르신만 아니었으면 진작 칼린카 먹이가 되었을 놈이! 네놈은 그분께 감사해야 해. 3교구 사건 때문에 참 고생하셨지. 나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런데 네놈이 사라지니 네 사촌 형님이 날 괴롭히더군!"

라덱이 격분한 듯 반박을 쏟아냈다. 둘 다 제정신이 아니긴 마찬가지이며 테네브로즈의 반응은 동족혐오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수정 도시 한복판에서, 수정 덩어리로 변해가는 시체에 둘러싸인 채 이런 꼬락서니를 관람하자니… 느낌이 색달랐다.

다른 둘도 비슷한 심경인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요정어라 모두 알아듣진 못하겠지만 단어 몇몇은 들리는 모양이었다(세 종족의 언어는 모두 고대 요정어에서 분화된 것이었다). 로안은 헤이딘에게서 통역을 받을 수 있을 테고.

"어렴풋이 알아들은 게 맞다면, 저 요정이 우리네 요정을 헐뜯고 있는 것 같소만… 내가 제대로 듣고 있는지 묻고 싶소."

"맞습니다. 저 녀석은 자기가 사촌 형님에 비하면 흠잡을 데 없는 인격자라고 주장하는 중이고요."

"흠잡을 데가 없다니. 도덕적인 면을 말하는 거요, 아니면 심성을 말하는 거요?"

"잘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둘 다 낙제점 아닙니까."

볼로디아는 사뭇 진지한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로안이 마음 한 귀퉁이가 부서진 눈빛과 함께 란드와르의 어깨를 두드렸다. 손바닥에 반지를 얹어 건네고 있었다.

"요정 할아버지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대요."

란드와르는 각인이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반지를 갈아 꼈다. 시야에 요정 소년이 나타나면서 머릿속이 목소리로 물들었다.

<저번에, 어둠달에서도 저놈한테는 원한이 있다고 이야기했잖소. 자세한 사연을 말씀드리겠소. 일단 가계도부터 읊자면, 벤트레스는 스티그미르의 아들인데…….>

뜻밖의 폭로가 뇌리를 휩쓸었다. 수십 해 전, 스티그미르와 나트람이 3교구의 제사장 직분을 놓고 다투었다는 것. 그때 테네브로즈가 스티그미르를 죽이고 제 주인을 제사장 자리에 올려놓았다는 것.

생각을 갈무리하기도 전에 입이 먼저 움직였다.

"그러니까, 저 새끼가 자기 삼촌을 죽였다는 거 아닙니까. 벤트레스는 죽은 양반 아들이고."

"제가 한 거 아닌데요. 늙은이한테 중상모략은 관두라고 전해 주십시오."

라덱과 실컷 싸우면서도 귀는 열어두고 있었는지 대답이 칼 같았다. 란드와르는 혼미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고 따지기 시작했다.

"아니, 나트람한테 직접 들었다잖아. 니가 안 하면 누가 그걸 하냐고."

"저희 아버지가 한 건데요. 그때 어둠달에서도 가주 자리 문제로 시끄러웠단 말입니다. 어쨌든 그분 입장에서도 대놓고 떠들 일도 아니고, 시기적절하게 돌아가셨기에 그냥 제가 했다고 쳤지요. 그 전까지 아버지는 딱히 권력엔 욕심이 없었으니까 의심할 사람이 없었거든요."

란드와르는 대답을 요구하는 투로 헤이딘을 마주보았다. 그 역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반론이 옳을지도 모르오. 내가 아는 건 형님이 해준 말뿐이니까… 형님도 지금껏 착각을 하고 있었다고 치면…….>

이제는 또 다른 의미로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는 테네브로즈를 향해 으르렁댔다.

"집안이 왜 이렇게 개판이야?"

"남의 집안 사정에 과도하게 관심을 기울이는 건 무례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지금 관심을 안 기울이게 생겼어? 너랑 내가 남이야?"

"그러면 나으리께서 제 핏줄입니까?"

"댁들이 저 개자식 때문에 쩔쩔매는 걸 보니 기분이 좋군."

라덱이 이죽거리며 끼어들었다. 동료들은 다 죽고 자기도 포로가 된 주제에, 정신의 감옥까지 걸린 판국에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아즈리온의 화신께 간청하건대, 아직까지 살려둔 이유가 의문이지만, 어쨌든, 저 자식을 하루빨리 쳐 죽이는 게 모두를 위한 일입니다. 모두란 건 인간과 늑대인간과 요정을 합쳐서 하는 말이고요. 세상에 도움이 안 되거든요. 벤트레스는 알아서 객사했을 테니 테네브로즈만 없애면 됩니다."

"벤트레스가 객사했다고?"

테네브로즈는 앞선 문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지막 말에만 주의를 기울였다. 과연 욕받이의 귀감이었다. 라덱은 투덜거리면서 설명을 늘어놓았다.

"처음 보는 요정을 따라가더군. 양손에 검을 들고 있던 놈이었는데, 그게 조난자인지 신기루인지는 내 알 바가 아니지. 돌연변이 잔해에서 튀어나왔으니까 아마 후자일 거야. 젠장, 속삭임을 들으면 안 된다고 읊어대던 놈이 신기루는 잘만 따라갔단 말이야. 세 놈이 그 자식한테 붙었고."

"셋이라."

"혈마법을 쓰는 자식 둘이랑… 그래, 서리칼날의 모티스까지. 하여간 그 정신머리로 주문은 어떻게 배우고 썼는지. 이것 보십시오, 화신님, 흔히들 착각하는 사실입니다만 마법 실력이랑 지능은 아무 관련이 없다니까요. 명징한 이성이 마법과 연관이 있었더라면 그 넷은 완전히 무능력자가 돼서 길거리에서 구걸이나 하고 있었을 겁니다. 지금 내 앞에서 귀찮게 말을 걸어대는 놈까지 해서. 어쨌든 그건 그렇다 치고 모티스가 우리 쪽에 남았더라면 이 자식은 죽일 수 있었을 텐데."

란드와르는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꼬락서니가 좋진 않았지만 심문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할 수 있었다. 이로서 알게 된 사실은 세 가지.

첫째, 폐허에는 아직 요정이 남아 있다. 벤트레스와 그를 따르는 셋이. 그중에서 서리칼날의 모티스는 상당한 실력자다.

둘째, 벤트레스는 최소한 테네브로즈만큼 병신이다.

셋째, 놈은 거수를 쓰러트린 후 요정 전사의 기억 조각을 얻었다.

앞선 두 항목은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쫓아가서 죽이면 되는 일이니까. 죽은 놈은 말이 없으니까. 하지만 셋째는, 곤란했다. 요정 전사는 제일 강력한 조각이다. 자라게 내버려 두었다가는 공략 난도가 대폭 올라갔다.

"벤트레스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냐."

"갈라진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 내가 아는 곳에 있진 않겠죠. 그래도 꼭 붙잡으시길 빌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 자식도 꼭 죽여주시고요."

란드와르는 일단 로안에게 반지를 돌려주었고, 두 요정이 마저 싸우도록 내버려둔 뒤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루빨리 벤트레스를 찾아 없애야 한다. 어떻게? 나우파나 폐허의 특성상 천계의 힘을 빌리더라도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놈을 추적하는 건 불가능하다. 물론 각각의 기억 조각은 결국 한 점에서 만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을 것이다.

이윽고 사이라크에게서 얻어낸 전리품에 생각이 가 닿았다. 이스트리아는 끝없이 변화하는 마력 갈래로 이루어진 세계다. 각각의 갈래는 상응하는 별의 영향을 받으며, 차원 생쥐들은 요정 신의 갈래를 제어할 수 없다. 하지만 수정 구슬로 세상을 잠시 멈춘다면…….

<이론상으로는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고정된 상태라면 각각을 살피기가 훨씬 쉬워지거든요. 탐색 범위도 어느 정도 정해져 있고요.>

란드와르는 안주머니에서 구슬을 꺼냈다. 저번에, 사용법을 들은 후로는 배낭에 넣는 대신 항상 옆에 두고 있었다. 근처에서 두 명을 죽이는 게 발동 조건이라고 했으니까. 요구사항까지 충족되었으니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시동어를 읊기 전에 다른 둘을 돌아보았다. 둘 앞에서 미친 짓도 많이 했고 체통은 우체통보다도 못한 수준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한다면 이상하게 보일 터였다.

"일단 저놈이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 점은 대신 사과 말씀 드리겠습니다. 로안아, 내가 미안해."

"아닙니다. 조금… 독특한 분이라는 건 알고 있었어요."

"이해해 줘서 고맙다. 어쨌든 듣기로는 폐허에 다른 요정이 또 있다는군요. 전사의 기억 조각과 함께 다닌다고 합니다……."

설명을 마친 란드와르는 정해진 어구를 입에 담았다. 꿈꾸는 분이시여, 제게 눈길을 두십시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몇 차례 더 시도해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씨발, 왜지.

"나으리,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그건 영혼이 있는 존재만이 쓸 수 있는 물건입니다."

티아가 재빨리 첨언했다.

<아, 요정의 말이 맞습니다. 이스트리아의 원주민이 아니니 불가능할 겁니다. 볼로디아에게 넘겨주시지요.>

란드와르는 수긍하고서는 볼로디아에게 구슬을 건넸다. 사용법을 설명하려는 찰나 요정의 지적이 이어졌다.

"나으리께서 제게 구슬을 맡기길 꺼린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은 다시 생각해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일단 제가 그걸 매개로 다른 뭔가를 하지 않는 이상 별자리가 여기서 더 뒤틀릴 위험은 없습니다."

"그래서."

"다 같은 필멸자이니 나으리께서는 별 생각이 없는 모양이지만, 늑대인간과 인간의 영혼은 우리 요정에 비하면 격이 낮습니다. 한 번만 쓰더라도 급사할 위험이 크다는 겁니다. 구슬을 쓸 때마다 영혼이 저승에 가까워지거든요. 나트람 영감이 그걸 금고에만 모셔둔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거 진짜예요?

<…일단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요정에게 수정 구슬을 넘겨주는 건 재고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혹은 아예, 성물의 힘을 빌리지 않는 방법도 있겠죠.>

직감이 번뜩였다. 천계 놈들은 이번에도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 강현에게 떳떳하진 못할 무언가를. 그게 아니라면 테네브로즈에게 구슬을 주면 안 되는 이유를 명확하게 밝혔을 테니까. 이런 식으로 말을 빙빙 돌리는 게 아니라.

이런 씨발, 이러니까 우리 사이에 신뢰가 안 쌓이는 거 아닙니까…….

"말 잘 했다. 네가 해."

저쪽이 자신을 믿지 않는다면 자신도 저쪽을 믿어줄 이유가 없었다. 티아는 체념한 듯 더 말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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