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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39화 (140/258)

139화 상처 속에서 상처로서 보라, 상처를 (3)

"효과 좋구만."

란드와르는 정신을 되찾자마자 허리를 확인했다. 말라붙은 피가 수정 가루로 변한 것 외에는 다친 흔적이 전혀 없었다. 갖다 팔면 로야페타에 건물도 올릴 물건이라 그런지 효과가 기막혔다.

감상은 그것뿐이었다. 다섯을 죽였다는 데에서 오는 죄책감은 딱히 없었다. 정확히는, 느끼려고 해 보았지만 그게 강박의 소산인지 도덕의 산물인지 알 수 없어서 그만두었다. 그냥 눈을 떠 보니 다 죽어 있었던 것이다.

<다 죽지는 않았습니다. 한 명이 도망쳤어요.>

아, 그래요? 쫓아가야 하는 거 아닌가?

<심하게 부상을 입은 상태입니다. 기억 조각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란드와르는 수긍하고서는 라덱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어깨를 반쯤 잘라낸 다음 칼자루로 머리를 후려친 것까지는 가까스로 기억이 났다.

수정으로 변하지도 않았고, 팔도 멀쩡하게 다시 붙은 걸 보면 죽진 않은 모양이지만… 설마 너무 강하게 쳤나? 머리를 세게 얻어맞을 경우 생길 수 있는 손상의 목록. 경추 골절. 뇌진탕. 중추신경 압박.

불현듯 뇌에 이상이 왔을 가능성이 걱정스러워졌다. 란드와르는 쓰러진 라덱의 멱살을 잡아 올리고는 탈탈 흔들어 보았다. 테네브로즈가 그를 야만인 보듯 올려다보았다.

"넌 눈을 왜 그렇게 뜨냐?"

"눈을 세로로 뜰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세상에 안 되는 게 어디 있냐. 세로로 뜰 수 있게 노력해 봐."

란드와르는 라덱을 바닥에 놓은 뒤 배낭을 열었다. 깜깜한 구멍에 대고 필요한 물건을 외치자 헤이딘의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마력 구속구를 건네받고 배낭을 닫으려던 찰나 어둠이 목소리를 실어 날랐다.

"인간 소년 말이오, 상태가 좋지 않소. 볼로디아와 함께 그쪽으로 가는 중이오."

"심하게 다쳤습니까?"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없소. 다만 한쪽 팔 전체가 수정에 뒤덮여서……."

"빨리 와요. 기억 조각 옆에만 있으면 원래대로 되돌아옵니다."

셀리멘을 따로 데리고 나온 게 화근이 된 모양이었다. 그래도 목숨을 잃지는 않았으니 아직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란드와르는 테네브로즈가 라덱에게 구속구를 채우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주위로 시선을 옮겼다.

싸울 때와는 달리 아름다우면서도 기괴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요정들의 주검은 용광로에 들어간 유리 덩어리마냥 녹아내렸고, 이제는 숫제 신화 속의 괴물을 묘사한 조각상처럼 변해 있었다. 피 웅덩이는 바닥을 뒤덮은 수정막의 일부가 되어 곳곳에 진홍빛을 뿌렸다. 붉은색 소용돌이가 섞인 막대사탕 반죽 같았다.

"이것들 말이다, 제물로 쓸 수 있는 상태냐."

"영혼이 흩어지는 속도가 조금 빠릅니다만… 큰 문제는 없습니다."

로안과 볼로디아가 도착한 것은 마법진이 한창 그려지던 도중이었다. 소년은 늑대인간의 어깨에 팔을 걸친 채 거의 업히듯 실려 오고 있었다. 그래도 스스로 고개를 들어 올리는 걸 보면 기력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란드와르는 가까이 다가가 소년을 부축했다. 물빛 눈이 겁에 질린 듯 깜박거리더니 생각에도 없던 질문이 날아들었다.

"그건… 정말로… 사고였나요?"

저번에도 똑같은 질문을 들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셀리멘의 조각과 실컷 떠들다가 갑자기 와서 그렇게 물었더랬지. 그때는 별 고민 없이, 티아가 시키는 대로 답해 주었지만… 두 번째로 이러는 걸 보니 뭔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무슨 소리냐."

"저는 잠시 알세스트였어요. 우리는 지성소에 있었어요. 셀리멘이 수정 심장에 손을 얹었고, 그리고, 갑자기 수정이 모든 걸 집어삼키면서… 요정들이 죽고 도시가 무너졌어요. 하지만 우리 중에서는 도망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그렇게 될 줄 알았다는 것처럼……."

로안은 거기까지 말하고서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볼로디아가 설명을 요구하듯 란드와르를 빤히 바라보았다. 똑같이 마주보고 있자니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헛웃음이 실실 새어나왔다. 도대체 내가 뭘 알겠습니까, 시뮬레이터는 어설프고 차원 생쥐들은 망해가는 판교 스타트업보다도 엉망이란 말입니다…….

앗, 이러면 안 된다. 그는 잠시 뒤에 이야기하기로 한 뒤 로안을 셀리멘 옆에 뉘였다. 소년의 팔을 뒤덮은 수정 조각이 증발하듯 사라지는 걸 확인한 란드와르는 바깥에 나와 시가를 물었다. 무언가 뜨겁고 울컥거리는 게 가슴팍에 치밀었다. 분노와, 짜증과… 이런 씨발, 숨긴 게 또 있다 이거죠?

티아가 빠르게 응답했다. 달가운 내용은 아니었다.

<좋아요,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나우파나 사태는 사고가 아니었어요. 아주 정확하게 계산된 공습이었죠. 수정 심장은 대전쟁 이전부터 지극히 불안정한 상태였고, 우린 그걸 이용했습니다. 윰 시밀의 저주가 땅을 늪지대로 만들고 요정들을 그곳에 가둔 것처럼, 수정 심장으로도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셀리멘을 우리네 만신전에 등록시킨 다음 수정 심장을 얻게 했어요. 제어권이 우리에게 넘어오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너무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쏟아진 나머지 완전히 이해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아, 그러니까, 자폭 공격을 했다 이거죠? 신위를 얻은 다음 일부러 터뜨렸다? 알세스트는 부담감 때문이 아니라 죽기 싫어서 셀리멘한테 그 일을 떠넘긴 거고? 왜 나는 이걸 몰랐지?

<역사에는 조금 다르게 남아 있죠. 알세스트가 그러길 간청했어요. 죄책감과 수치심 때문이었겠죠. 그리고 우리도, 예, 우리로서도… 이 폐허를 만들어낸 게 만신전의 신들임을 밝히는 것은 현명하지 않은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나한테는 제대로 말해 줬어야지!

<그 점에 대해서는 죄송하게 느끼고 있습니다만… 우리도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천 년 전에 있었던 일은 지나간 과거일 뿐이니까요. 이제 와서 진실이 밝혀지는 건 누구에게도 좋은 일이 아닙니다.>

댁들이 이럴 때마다 화가 납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어요? 이런 씨발, 아무리 계약서를 좆으로 썼어도 동업자끼리는 신뢰 관계라는 게 있어야 할 게 아니야. 난 댁들이 사실은 신도 뭣도 아니고 그냥 구청 직원이라는 것도 입 다물고 있다고요.

<죄송합니다.>

이쯤 되니까 마흐트 회당에서 왜 수정 거인이 튀어나왔는지도 짐작이 가는데. 아 드지즈가, 셀리멘이 마흐트죠? 폭발 때문에 맛이 가서 파울리스가 일을 대신 처리하고 있는 거고?

<신위를 얻은 직후에는 셀리멘에게 주도권이 있었지만, 폭발과 동시에 심장이 불안정해지면서 지분율에 변동이 생겼습니다. 나나우아친의 영혼 또한 말소되지 않은 상태였고요. 현재로서는 수정 심장의 지분이 다수의 혼에게 분할된 상태고, 만신전에 등록된 것은 셀리멘 뿐이기 때문에 제어가 불가능―>

여기서부터는 내가 설명해 보겠습니다. 기억 조각들한테 골고루 지분이 있는 거죠. 그런데 과반인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셋 다 신은 못 된 거고요. 우리는 셋 중 하나를 과반으로 만들려고 이 짓을 하고 있는 거고. 그래야 로안이 신위를 승계할 수 있을 테니까. 맞아요?

<대강은 그렇습니다.>

사장님으로 살 때에는 몰랐는데 이제 보니 사설탐정 노릇에 소질이 있는 것 같았다. 중년 부부의 불륜 행각은 파헤치지 못하더라도 세계의 비밀은 수월하게 캐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래서 뭐, 누가 인센티브라도 준단 말인가?

추리 소설의 쾌감은 진실을 탐색하는 일과 문제의 해결이 맞닿아 있다는 데에서 온다. 하지만 그 반대는 어떨까. 추리에 성공할 때마다 새로운 문제가 발견된다면. 여러분은 그걸 읽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아마 그 소설의 장르는 추리가 아닐 겁니다…….

강현은 가혹한 트루먼쇼의 등장인물이 된 기분을 느끼며 가상의 소비자를 규탄하다가 그만두었다. 당장 코앞에 닥친 일만 떠올려도 숨이 막혔다. 로안이 깨어난다면 사실을 읊어줘야 할 것이다. 충격을 좀 받겠지. 심하게 받겠지.

가뜩이나 마음 약한 놈을 달래느라 진땀을 뺄 모습이 벌써부터 눈앞에 생생했다. 물론 로안의 탓을 할 마음은 없었다. 잘못은 모두 이 생쥐 새끼들에게 있는 것이다. 그런데 씨발, 내 마음은 누가 달래줍니까? 사실대로 다 말하고 세상 망하는 꼬라지나 한 번 지켜볼까요?

"…섣부른 추측일지도 모르겠소만, 저 위에 계시는 분들이 감춰 온 게 따로 있는 모양이오. 실례가 아니라면 자세한 연유를 물어도 괜찮겠소?"

헛, 다행히도 동지의식을 느낄 상대가 하나 있었다. 볼로디아는 아즈리온이 금치산자라는 것도, 자신이 인간이란 것도 알고 있으니 말이다. 강현은 설명에 앞서 그녀를 이끌고 멀리로 자리를 옮겼다. 헤이딘이 악당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듣는 귀를 최대한 줄일 필요가 있었다.

*  *  *

늑대는 세 요정 중 하나가 저승에 남기를 원했다. 논의 끝에 요정들은 솔로틀에게 그 역할을 맡겼다. 세 아카틀은 무리를 이끄는 자였으나 솔로틀은 두 발이 뒤틀린 불구였으므로 그리 되었다.

모두가 떠난 후, 솔로틀은 홀로 남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울음은 두 눈이 흘러 빠지고 늑대의 발끝이 눈물로 흠뻑 젖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이에 늑대가 작은 요정의 슬픔을 알고 번뜩이는 녹색 별과 새로운 몸을 선물했다.

그리하여 솔로틀은 청지기가 되었고, 저승의 일을 배우게 되었다. 해는 미련이 남아 세상을 떠도는 혼을 불태웠으며 달은 땅과 저승을 오가며 망자를 실어 날랐다. 기억을 씻고 찢긴 부분을 기워서 죽은 이가 새로운 삶을 얻게끔 하는 것이 그의 몫이었다.

솔로틀은 간혹 땅을 그리워했으나 자신의 소임에 충실했다. 늑대의 머리 중 하나가 그것을 기꺼워하여 꿈 조각을 선물했다. 그는 그날 죽은 이들 중에 가장 현명하고 조심스러운 사람 둘을 골랐고, 조각을 반으로 나누어 두 영혼에 담았다. 그러자 그들은 땅으로 돌아가 첫 번째 정원사가 되었다.

정원사들은 땅을 누비며 새로운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이로서 솔로틀은 저승의 삶에 만족했으며 늑대를 경애하게 되었다. 해도 아직 떠오르지 않고 달은 가라앉지 않은 새벽녘에, 잠든 늑대의 곁에 앉아 함께 눈을 붙이는 것은 그의 일과였다.

*  *  *

로안이 라덱보다 먼저 깨어났다. 수정으로 변했던 손은 거의 멀쩡해졌지만 그것만으로 끝날 문제는 아니었다. 란드와르는 폐허의 진실을 알려 주었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덧붙였다… 그 말은 로안을 달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차원 생쥐들이 괘씸하기야 했지만 강현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었다. 정공법으로 싸웠더라면 더 많은 사람이 죽었을 것이며 성패마저 장담하기 어려웠을 것이므로. 입맛이 쓴 것과는 별개로, 한 명의 목숨이 더 많은 사람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다면…….

설명이 끝나자 긴 침묵이 있었다. 로안은 고개를 돌려, 가만히 서 있는 기억 조각을 바라보았다.

"셀리멘은 알세스트를 원망했나요?"

"끝까지 원망했는지, 용서했는지는 내가 알 수 있는 부분이 아니야."

"목소리가… 목소리가 들렸어요. 제게 만족하냐고 물었어요. 그 목소리가 따지듯 물었어요. 착각일 뿐일지도 모르겠지만……."

"네가 느낀 게 맞을 거야. 하지만 너는 알세스트가 아니라 그 후손이고, 여기에 있는 건 기억의 한 조각일 뿐이야. 그냥 어느 정도는 안타깝고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면 돼."

물빛 눈이 텅 비듯 했다. 란드와르는 굳어가는 공기 속에서 자문했다. 셀리멘의 희생은 아름답고 숭고한 것이었다고 말했더라면, 그 자신도 이런 미래를 기꺼이 받아들였으리라고 말했더라면 무언가 다른 반응이 나왔을까?

열일곱 살은 어리긴 해도 사리분간은 되는 나이다. 그런 수사법에 속아 넘어가지는 않을 터였다. 면피를 위해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떠밀린 이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였다. 알세스트가 그랬던 것처럼 셀리멘도 원치 않았을 것이다. 원치 않았으므로 후손에게 그 광경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에 포장지를 덧씌우는 것 또한 기만이 될 것이다.

"잘못된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그걸 지금까지 숨긴 건……."

로안의 입술이 달싹였다. 딱히 반박하거나 설득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게 생각해. 본가로 돌아가면 원로들한테 사실을 읊어줄 수도 있겠지. 그건 괜찮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냥… 네 몫이 아닌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라는 거야. 기억하는 것과 힘들어하는 건 다른 일이야."

망각에는 궤가 있다. 헤이딘이 메기도를 잊은 일과 폐허의 진상이 영영 파묻힌 일이 결코 같지 않은 것처럼. 극복의 방편이라면 과거쯤은 얼마든지 내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기억은 살아남은 자의 책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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