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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37화 (138/258)

137화 상처 속에서 상처로서 보라, 상처를 (1)

"인간들이 저 건너편을 지나갔습니다. 너댓 정도로 보였고… 그리고, 붉은 머리 남자가 무리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시선이 마주쳤으므로 저쪽에서도 우리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무기는 확인했겠지."

"예, 묵색의 망치였습니다."

폐허에 나타난 다섯 명 남짓의 인간. 무리를 이끄는 붉은 머리의 남자. 무기는 묵색 망치. 추측은 어렵지 않았다.

라덱은 2교구 분석실에서 올라온 보고를 상기했다.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아즈리온의 별은, 칠살성은 뜨지 않았다. 파울리스의 별인 천부성만이 미미하게 움직일 뿐이었다. 폐허를 헤매는 동안 화신이 내려온 것일까?

"인간뿐이었나?"

"얼핏 본 것이기 때문에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그 동행중에는 은발에 키가 작은 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자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늑대인간처럼 보이는 여자도 하나 있었습니다."

세카두 용병 사무소에 갑자기 나타난 아즈리온의 사제. 카스바의 노예 검투사와 특별전을 벌인 남자. 로야페타에서, 수정 거수를 제압한 고위직 사제. 그 셋이 동일인물이리라는 점은 명백했다. 뿐만 아니라 놈이 항상 소년을 대동하고 다녔다는 점에서도.

그렇다면 테네브로즈는 최소한 여섯 달 전부터 화신과 함께했다는 말이 된다. 3교구 사태를 일으키고 도망친 그 시점에. 칠살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고요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데도. 밤하늘이 거짓을 고하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라덱은 끓어오르는 짜증을 억누르며 휘하의 요정을 훑어보았다. 거수와의 첫 대면에서 한 명이 죽었고, 벤트레스와 함께 셋이 떠났고, 다시 하나가 수정으로 변했으므로 곁에 남은 이는 여덟뿐이었다. 절반에 가까운 대원이 이탈한 셈이었다.

심지어 벤트레스는 모티스마저 데려갔다. 이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인재가 사라진 것이다. 라덱은 부대장 자리에 차라리 갓난아기를 데려다 놓는 게 나았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랬더라면 여기에 있는 요정은 아홉이 아니라 열두 명이었으리라.

"저쪽에서도 행동에 나설 것이다. 셋이 정찰에 나서고, 본대는 자리를 옮겨 매복하도록 한다. 정확한 위치는……."

염동술사와 혈마법사, 그리고 명문가 요정 하나씩을 골라 보낸 라덱은 벤트레스가 처참하게 죽기를 기도했다. 만약 야스와다에서 재회하게 된다면 반드시 목숨을 거두어 주리라는 다짐과 함께.

*  *  *

"저쪽에서 셋이 오고 있습니다. 요정 녀석과 제가 가서 본대를 치고, 대장군님께서는 로안과 함께 이곳에 남아 정찰조를 맡으시면 됩니다. 셀리멘의 조각은 저희와 함께할 테고요."

볼로디아가 왕위에 오르기야 했지만 란드와르는 대장군이라는 호칭을 유지했다. 누님은 너무 격식이 없고, 당신은 입에 붙질 않고, 폐하는… 그건 신하가 왕에게 예를 갖출 때에나 쓰는 말이었다. 그런 식으로 소거법을 적용하자 남는 낱말이 대장군밖에는 없었다.

"여기로 셋이 온다면 본대는 여섯이라는 이야기로군. 기억 조각이 있다 쳐도 아직은 약하니… 둘이 여섯을 상대하게 되는 셈인데, 괜찮으시겠소?"

"로안을 적진 한복판에 데려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혼자 둘 수도 없어요. 대장군님께서 호위역을 맡으시는 게 낫습니다. 저 녀석은 최대한 뒤에 있어야 해요."

요정과 마주칠 상황을 대비해 훈련시키기야 했지만, 로안을 전투에 투입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큰 일이었다. 아무리 오래 숙성된 치유 물약일지라도 잘린 목을 붙이거나 망가진 영혼을 고치진 못한다. 재정렬도 걸려 있지 않다.

"따로 떨어져 있는 동안에는 신탁으로 교신하게 될 겁니다. 기본적으로는 일방 소통이지만, 대장군님 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두 볼 수 있어요."

신탁은 신도의 머릿속에 직접 심상을 밀어 넣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평소에는 그 효능에 비해 활용도가 낮은 탓에 쓸 일이 적지만, 지금처럼 조가 갈라지는 상황에서는 더없이 유용했다. 게다가 말루카와 로야페타에서 신앙심을 넉넉하게 벌어 두었으므로 자원 걱정도 없었다.

"나 또한 신위를 얻었으니 누군가의 신도가 될 수는 없을 텐데, 그게 가능한 일인지 궁금하오."

"거기에 대해서도 고려를 마쳤습니다. 심장과의 동화율이 낮은 덕분에 아직은 문제가 없다더군요. 우리네 명부에서 벗어나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렇군… 일단은 알겠소."

볼로디아는 침착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란드와르는 로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공포와 의기가 조금씩 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최, 최선을 다해 싸우겠습니다!"

그는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 아래에 무엇이 숨어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고 싶을 것이다. 유용한 전투원임을 인정받고자 할 것이다.

지금껏 로안을 괴롭혀 온 게 그런 종류의 불안임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란드와르에게 필요한 것은 치기 어린 투지가 아니었다. 로안의 역할은 멀쩡히 살아남아서 수정 심장을 얻는 데에 있다.

"최대한 나서지 말고, 만약 다칠 것 같으면 도망쳐. 이길 수 있을 것 같아도 몸을 멀쩡하게 간수하는 게 우선이야."

"실력은 많이 늘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도와주시지 않아도, 스스로, 무색 마력을 이용해서 공격을 막아내는 법도 익혔어요. 한 사람 몫은 할 수 있을 겁니다!"

"이건 실력을 의심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저 요정 열 명의 목숨보다도 네 팔 한 짝이 더 중요해서 그런 거야. 알겠지."

란드와르는 거기까지 말하고서는 로안의 반응을 살폈다.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석연찮은 점이 남은 듯했다.

"그러니까 나한테 네 쓸모를 증명하려 하지 마. 그건 널 데려와서 옆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이미 끝난 일이라고. 내가 이미 계산을 마쳤는데 네가 그럴 필요가 없는 거야."

하지만 스스로에게도 질문은 남았다. 소년을 죽음 앞으로 떠미는 것은 좋지 못하다. 아니, 소년이 아니라 그 누구일지라도. 하지만 그렇다면… 심장을 눈앞에 두기 전까지는 함구하고 있다가, 신위를 냉큼 던져주는 일은 떳떳할 수 있단 말인가?

미리 말할 궁리는 여러 차례 했으나 로안이 도망칠 가능성이 마음에 걸렸다. 한 번 벌어진 일이라면 두 번도 가능한 법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적임자를 구하기도 여의치 않았다. 별다른 대안이 없는 것이다. 수정 심장을 찾아낸 그 자리에서, 곧바로 신위를 얻도록 한다. 독이 담긴 성배라는 비유가 이보다 더 정확할 수 있을까?

티아는 만약 로안이 타락하더라도 천계 선에서 수습할 수 있으리라고 했다. 죽인 다음 다른 이에게 심장을 넘기겠다는 뜻이었다… 그럴 가능성은 낮겠지만, 끔찍했다. 끔찍한 일이었다.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은 될 수 있으리라고 되뇌어도 별 소용이 없었다. 효율이나 성과와는 완전히 다른 궤를 맴도는 문제기 때문일 것이다.

"서둘러 이동합시다. 저쪽에서는 이미 움직이고 있습니다."

란드와르는 억지로 생각을 매듭짓고서는 볼로디아에게 말했다.

*  *  *

로안을 주택의 2층에 숨긴 뒤, 볼로디아는 정원의 생울타리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기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신탁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요정 셋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하나가 따로 떨어져 이동하고 있으니 2인조를 우선 처치하는 편을 권합니다. 셋을 한꺼번에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로안에게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폐허에 들어선 후로 볼로디아는 영토와의 연결이 약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신위를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 드지즈의 영향력이 커진 탓에, 암적색 마력 갈래를 온전히 지배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이 상황에서 마법사 셋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반면 로안과 헤이딘이라면 요정 하나쯤은 충분히 버텨낼 수 있을 터였다. 압승을 거둘 필요까지는 없다. 자신이 둘을 해치우고 합류할 때까지만 살아남으면 되는 것이다.

요정 둘의 모습이 시야에 나타나는 동시에 볼로디아는 괴수 형상으로 변했다. 뼈와 살이 뒤틀리며 크기를 키웠고 영혼의 힘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변신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생울타리를 뛰어넘어 도약했다. 요정들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지만 그뿐이었다.

"제기랄, 늑대인간이군!"

그들은 무색 마력을 폭발시켜 거리를 벌린 뒤 양옆으로 찢어졌고, 시야가 충분히 확보되면서도 볼로디아가 쉽게 오가진 못할 위치에 자리 잡았다. 동시에 주문을 시전하면서, 둘 중 하나라도 성공시키기 위함이었다. 곧바로 수정 바닥 위에 약식 마법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입술이 달싹이며 노래를 닮은 울림을 흘려보냈다.

강화된 시야가 형체를 갖추기 시작하는 마력 갈래를 포착했다. 볼로디아는 주저하지 않고 오른편의 혈마법사를 향해 돌진했다. 그녀는 요정을 쓰러트려 마법진 바깥으로 나가떨어지게끔 한 뒤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발밑에서 요정의 몸이 경련하다가 축 늘어졌다.

입안에 번지는 피의 맛을 느끼며, 볼로디아는 서둘러 돌아섰다. 보랏빛 마력 갈래가 그녀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  *  *

<일단 둘은 발견했다. 복식을 보아서는 명문가 소속이 하나 있고 바단 놈이 하나야. 이대로라면 볼로디아와 마주치게 될 게다. 나머지 하나를 찾아야겠는데…….>

볼로디아는 건물 밖에서 경계를 보는 중이었고 로안은 주택의 2층에 몸을 숨긴 상태였다. 소리를 냈다가는 기척이 들킬 가능성이 있으므로 대답은 하지 않았다. 로안은 문간 바로 옆에 무릎 꿇고 앉은 채 요정 소년의 환영이 벽을 뚫고 나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고는 방에 로안만이 남았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긴장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쉽지는 않았다. 불안이 다른 생각을 모두 갉아먹고는 자신마저 삼키기 시작하는 듯했다.

이윽고 갖가지 울림이 뒤섞여 들려오기 시작했다. 비명과, 고함과, 노랫가락과, 부드러운 속삭임 중에서 무엇이 폐허가 빚어내는 환청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언제든, 이 문 너머로 요정이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되새겼다. 정신을 다잡아야만 한다. 정신을 다잡아야만…….

로안은 날카로운 파열음에 흠칫 놀랐다. 이건 진짜 소리였다. 칼자루를 붙잡고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산산이 조각난 창문은 일그러지는 태양 같았고 요정은 사교(邪敎)의 구도자처럼 휘광을 에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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