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35화 (136/258)

135화 Jetztzeit (2)

란드와르 일행은 노지용 수레를 바깥에 세워두고는 폐허에 발을 들였다. 수정으로 뒤덮인 세계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하는 듯했다. 광채가 스스로를 되풀이하면서 어디에도 없는 빛깔을 빚어냈다.

"기묘하군……."

나지막이 중얼거린 볼로디아는 나무에 손바닥을 얹었다. 투명한 수정막을 사이에 두고는 그림자가 나무껍질 위에 덧발렸다. 그 옆에서는 로안의 고개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주 무서운 곳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보석함 속에 들어온 것만 같습니다!"

"그게 무서운 거야."

로안의 말대로, 나뭇잎은 보석 브로치의 장식 같았고 깃털이 붉은 새들은 영롱한 루비가 되어 있었다. 란드와르는 타마기스 늪지대와 이곳을 견주어 보았다. 옛 신의 영향력 아래 놓인 것도, 대전쟁 이후로 사람이 못 사는 땅이 된 것도 똑같다.

차이점이 있다면, 나우파나가 훨씬 아름답다는 것.

그리고 훨씬 위험하다는 것.

"멋지다고 해서 한눈팔면 안 된다. 잘 모르는 목소리가 말을 걸면 무시해. 이상한 게 보여도 따라가지 말고."

말은 그렇게 했으나 란드와르는 그 충고가 자신에게는 쓸모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폐허는 유유한 악몽처럼 보였다.

*  *  *

나우파나의 정경은 판교에서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파란색 판교역로 팻말이 드리운 사거리. 거대한 유리 덩어리에 격자를 쳐둔 듯한 커튼월 빌딩들. 해가 정오에 이르면 달궈진 창이 빛을 쏟아낸다. 판교 상장사의 시가총액만큼이나 눈부신 휘광이 보도블록의 골마다 고이고 하늘을 뒤덮는다.

바로 두 해 전 여름, 강현은 성공이 찬란하게 번쩍이는 그곳을 온종일 돌아다녔다. 입에서 내장을 쏟아낼 것만 같은 심정으로. 화려한 빛무리 한복판의 암흑이 되어서.

그럴듯한 대학의 전자전기공학부를 졸업했다. 복전이 컴공이었거니와 4학년 말에 전기기사를 따 놓았으므로 취직은 어렵잖게 했다. 한전 송배전직이었다. 그러니 가만히 있었더라면, 되도 않는 스타트업 사장님만 되지 않았더라면 특별한 건 없어도 무탈하게 좋은 삶을 살았으리라.

중소벤처기업부가 발표한 창업기업의 5년 생존률은 29%. 그 3할에 들어보겠다는 꿈은 이율 21.90%의 A저축은행 대출서류와 함께 완전히 끝났다.

사업을 끌고 나가 봐야 나빠질 일밖에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그 돈으로 지인들에게서 생긴 빚을 돌려막았다. 빚잔치를 벌일지라도 사람은 남겨야겠다는 믿음 속에서. 은행에게 몇천은 사소한 돈이지만 한 명의 삶은 그보다 적은 액수로도 뒤바뀔 수 있으므로.

하지만 가끔은 그걸 고스란히 빼돌렸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그럴 수 있었다.

정말로 그랬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  *  *

폐허에는 밤이 없다. 얼음처럼 서늘한 빛이 사방에서 온종일 번뜩일 뿐이다.

시간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하늘뿐만이 아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허기를 느끼지도 않고 잠을 잘 필요도 없다. 피로를 느끼지도 않는다. 수정 막에 갇힌 주검은 잠든 사람처럼 혈색이 생생하다. 천 년 전의 요정과 몇 달 전의 모험가들이 이곳저곳에 뒤섞여 있다.

결국엔 둘 중 하나다. 영원의 일부가 되는 것. 혹은 이전과 지금이, 지금과 이후가 다름을 증명하는 것. 따라서 시간을 만들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언가를 부수는 것이다. 피까지 쏟아지면 더욱 효과적이다.

그렇다면 동료가 부상당하는 건 좋은 일인가? 잘 모르겠다. 최소한 혼미해지던 정신에 활기를 불어넣는 효과는 있었다. 당사자는 의견이 조금 다른 모양이지만.

"나으리, 번번이 이 짓을 해야 하는 겁니까?"

"반쯤은. 수정 거수 안에 들어 있는 것도 있고 그냥 돌아다니는 것도 있어."

바닥에 주저앉은 테네브로즈는 헝겊에 회복 물약을 붓고서는 환부를 문질렀다. 수정 거수를 상대하던 도중, 후열로 날아드는 수정 파편에 팔뚝이 베였던 것이다.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허리께에서 맴돌았다.

"끔찍하군요."

"그러니까 잘 해. 혼자 다쳐서 이러지 말고."

"전 최선을 다했는데요. 저 꼬마애도 영감이 보조해주지 않았으면 진작 짓눌려서 죽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헤이딘을 붙여준 거잖아. 넌 피할 수 있는데 쟤는 못 피하니까."

란드와르는 힐끔 고개를 돌렸다. 열 걸음쯤 옆에서, 똑같이 닮은 남녀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밝은 금발에 물빛 눈. 양순하면서도 쾌활해 보이는 이목구비까지. 천 년의 세월을 뚫고 고스란히 전해진 유전자를 보니 존경심마저 느껴졌다.

"시조님, 이렇게 만나 뵈어서 영광입니다. 알세스트님의 먼 후손으로서 인사드려요."

란드와르 일행이 잔해에서 발견한 기억 조각은 셀리멘의 것이었다. 요정 전사가 아닌 건 불행이지만 메기도가 아닌 건 다행이다. 메기도의 기억은 전투 능력이 사실상 없으니까, 꽝은 피해 갔다고 할 수 있겠다.

"기념관에서 본 환영이랑은 역시 조금 다르게 생기셨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야 만들어진 환영이니까 그렇겠죠. 각인을 보수하는 동안 바뀐 것도 있을 테고요. 돌아가면 제대로 고쳐 놓도록 하겠습니다."

셀리멘은 아무 답도 없이, 멀뚱하니 허공을 바라보았지만 로안은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방금 전에는 수정 거수한테 짓이겨질 뻔한 놈이 이렇게 해맑을 수 있는 것도 재주였다.

"말 걸어도 소용없다고 하지 않았냐."

"그래도 진짜 시조님이잖습니까! 못 들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이렇게라도 만나뵐 수 있다면 엄청난 일이니까요."

"나중에 해. 그때는 반쯤은 대답이 나올 테니까."

기억 조각이 할 수 있는 말은 수집도에 비례해 늘어났다. 벌써부터 대화를 시도하는 건 헛수고라는 뜻이었다. 의미도 없고 말이다. 셀리멘은 로안의 수다를 듣고만 있다가 몸을 돌려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 있어."

셀리멘은 저기가 어디인지, 뭐가 있다는 것인지는 말하지 않은 채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더 캐물을 필요는 없었다.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기면 무언가를 만나게 됐다. 메기도든, 요정 전사든 간에. 그러다 보면 야스와다 요정들과도 대면하겠지.

게임 공략대로 말하자면, <수정 요새> 시나리오의 핵심은 오브젝트 수집이었다. 우리편의 조각을 모으고 상대편의 조각은 파괴하는 것. 거기에 수정 거수를 상대하던 와중 습격을 당한다거나, 혹은 그 반대로 먼저 추적에 나선다거나 하는 전략 요소가 더해진다.

"동북쪽이군. 바로 이동할 생각이오?"

볼로디아가 질문을 던졌다. 란드와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도 심하게 다친 건 아니니까요. 요정들도 와 있을 텐데, 조각이 상대편에 넘어가면 일이 귀찮습니다."

*  *  *

란드와르 일행은 셀리멘의 조각을 다섯 개 모으고 다른 둘을 제거했다.

그 둘은 모두 메기도의 것이었는데 칼날이 가슴팍을 관통하는 순간에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이 역할은 모두 테네브로즈가 맡았다). 그러고는 빠르게, 유리가 녹아내리듯 흘러서 숲의 일부가 되었다. 흔적이라고는 칼날에 수정 가루가 서리처럼 얹힌 게 다였다. 헤이딘은 착잡한 표정만을 보일 뿐이었지 별 말을 얹지 않았다.

로안은 그런 일들에 빠르게 적응했다. 출발하기 전에 품었던 불안감 역시 거의 사라져 있었다. 아직은 요정을 마주치지 않았으니 할 수 있는 생각인지도 모르겠지만, 헤이딘의 도움 역시 컸지만… 앞으로도 이것처럼만 할 수 있다면 짐덩이가 되지는 않을 듯했다.

게다가 로안은 이 일에 즐거움마저 느끼고 있었다. 조각을 모을 때마다 셀리멘이 할 수 있는 말이 부쩍 늘어났던 것이다. 제대로 된 대화를 이어가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거기에는 분명 말라비틀어진 고목에 새순이 돋는 것과 같은 기쁨이 있었다.

"시조님께서 바깥에 못 나가시는 게 아쉬워요. 인간 도시들이 어떤 모양인지 꼭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무얼 상상하시더라도 그것보다 훨씬 멋질 거예요."

정비를 위해 쉬어갈 때마다 로안은 셀리멘에게 말을 걸곤 했다. 뜻이 전해지진 않을 것이란 말을 듣긴 했으나 크게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컸다. 커다란 물빛 눈은 언제나, 경청하듯 로안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아, 그리고 대평야를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타일라프람과 세카두 사이의 넓은 땅인데, 대규모 경작지로 쓰입니다. 우리 가문도 그곳에 농지가 있고요. 온종일 걸어도 끝나지 않는 밀밭이죠. 개간 사업을 시작할 때 알세스트님이 큰 역할을 하셨거든요. 참, 제가 어릴 땐 그분이 되살아난 것 같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는데 잘못 자라서 이렇게 됐네요. 아무튼……."

로안은 경작지에 대해, 노르덴홀즈 장원에 대해, 알세스트가 이룬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가 폐허에서 죽은 누이를 얼마나 아꼈는지도. 순간 셀리멘이 그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더니 눈앞에 머나먼 기억이 겹쳤다.

…금발의 남자. 물빛 눈. 아마도 알세스트일 것이다. 공포를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가 잃어버린 시간 너머에서 윙윙거린다.

― 셀리멘, 네가 그 일을 맡아.

침묵이 오래도록 흐른다. 거기에는 질식할 듯한 절박함이 있다. 팔이 등을 감싸고, 상대의 머리가 자신의 어깨에 얹힌다. 알세스트가 울먹이듯이, 다시 말한다.

― 나는 너보다 아는 게 많아. 전쟁이 끝나고 인간이 자신의 도시를 짓기 시작하면, 요정과 싸울 필요가 없어지면, 그렇게 되면, 내가 더 쓸모 있을 거야. 그러니까 네가 심장을 얻어. 대신 너를 위해 큰 마을을 세우고 기념관을 만들게. 모든 사람이 네게 감사한 마음을 품을 수 있도록…….

―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 나를 기억하기만 하면 돼. 오빠가 나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 그때 오빠는 어떤 기분이었는지, 그래서 어떻게 됐는지, 모두 알고 기억해야 돼. 내가 물어보면 언제든 대답할 수 있도록.

심상은 거기에서 끝났다. 몸을 떼어낸 셀리멘은 여전한 시선으로 로안을 바라보다가, 살짝 미소 지었다. 평소였더라면 반응을 보였다면서 기뻐했겠지만 당혹이 더욱 컸다. 이건 대체 뭘까?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건 테네브로즈에게 대강 들어서 알고 있었다. 원래는 알세스트가 수정 심장을 얻어야 했다고. 하지만 두려움과 부담감이 너무 컸던 탓에 그 일을 동생에게 미루고 말았다고. 그리고 무언가가 잘못되어서, 나우파나 전체가 수정에 뒤덮이게 되었다고.

하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셀리멘이 불어넣은 기억을 한참이나 곱씹던 로안은 가까스로 위화감의 정체를 파악했다. 알세스트는 큰 힘에 따르는 책임이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추론이 의심을 딛고 낯선 곳으로 도약했다. 혹시 폐허가 이렇게 된 건 계획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수정 심장을 처리하면서 무언가가 잘못된 게 아니라, 예상치 못한 사고가 일어난 게 아니라… 이게 바로 의도된 결과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안은 란드와르에게로 향했다. 동료들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시가를 태우고 있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여쭤볼 게 있습니다."

"말해 봐."

"셀리멘의 일은… 사고였던 겁니까?"

란드와르의 시선이 순간 어딘가 먼 곳을 향했다. 대답은 그 뒤에 왔다.

"사고였지."

로안은 더 캐어묻는 대신 알세스트의 목소리만을 기억 한구석에 남겨두었다. 감히 불경한 마음을 품고 싶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