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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33화 (134/258)

133화 그리고 폐허로 (2)

말루카에 머무르던 한 달간, 볼로디아는 여러 분야에 걸친 국책과제를 제시했고 토건 계획의 초안을 그렸다. 그러나 모든 시간이 정무에 할애된 것은 아니었다. 신위를 얻자 잠에 들 필요가 사라졌던 것이다.

볼로디아는 신으로서의 힘에 서서히 익숙해졌으며 심장부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도 깨닫게 되었다. 아직은 필멸자였던 시절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지만 모든 것이 점차 나아지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녀는 세 대장군을 섭정으로 세운 뒤 세카두로 향했다. 약속한 시일보다 하루 이른 시점이었다.

*  *  *

로안은 여전한 자학과 자부심 사이에서 휘청거리며 보름을 보냈다. 자신의 재능을 인정하면서도 이것으로는 부족하다며 채찍질을 거듭하는 것이다.

덕분에 염동술은 확연한 성취를 보이고 있었다. 네댓 걸음쯤은 순간이동하듯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사이라크처럼 높이 뛰어올라 허공에 머무르는 건 불가능하지만, 어쨌든. 한순간에 거리를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은 근거리 공격수에게는 엄청난 이점이다.

물론 그걸 잘 활용하느냐는 다른 문제였다. 적군 한복판으로 점멸을 쳤다가는 그대로 죽고 말 테니까. 하지만 치고 빠지는 타이밍을 어떻게 알려줄 수 있단 말인가? 일단 검술 스승역을 맡은 사제에게는 최대한 방어적인 전투를 가르치라고 말해 두었지만…….

"그 기술은 갈고 닦으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군. 허나 아직은 치고 빠져야 할 때를 잘 파악하지 못하는 듯한데, 예컨대, 직전에는 내가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찔러 들어갔지 않나. 그때는 물러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앞으로 파고드는 게 옳았을 걸세."

"아, 예! 사제님들께는 최대한 방어적인 쪽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정면으로 맞서 싸울 실력은 아니니까요. 습격을 당했을 때, 다치지 않는 걸 목표로 하려 해요."

"내가 보기엔 그런 강박이 오히려 발목을 잡는 것 같군. 공세와 수성은 서로 대치되는 게 아니라네. 자, 아까처럼 자세를 취해 보게나."

로안은 볼로디아를 만나자마자 영화배우를 마주친 열성 팬처럼 굴었고, 급기야는 대련을 부탁했다. 합을 나눠 주신다면 영광이라 생각하겠다는 말과 함께.

란드와르는 훈훈한 기운과 당혹감을 동시에 느꼈다. 녀석이 눈을 반짝이며 달라붙을 때에는 곤란하고 귀찮았는데 포커스가 옮겨가니 마음 한구석이 허했다. 타 멤버에게 팬을 빼앗긴 아이돌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충성도에는 변동이 없습니다. 저녁쯤에 따로 독대를 하면 평소와 같은 반응을 볼 수 있으리라고 예상됩니다.>

그건 귀찮고요.

그랬다. 싱숭생숭한 마음은 주관에 불과했지만 귀찮음은 실체였다. 란드와르는 자신의 탁월한 판단력에 감탄했고, 방에 가서 누웠다. 서른네 살의 한국인에게 대련은 즐길 만한 구경거리가 아니었다.

<계약서에 품위 유지 의무를 넣지 않은 게 후회스럽군요.>

말씀 잘 하셨네. 계약서 다시 씁시다. 하는 김에 독소조항도 다 빼고요.

<모든 게 만족스러운 일은 없는 법이죠. 받아들이시는 편을 권합니다.>

하여간 양심이 없는 새끼들이었다. 란드와르는 잠시 투덜거리다가 눈을 감았다. 짜증을 내고 처지를 비관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이제는 뭘 하든 심드렁했다.

일어나서 진지한 대화에 착수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두어 시간쯤이 흐른 뒤였다. 볼로디아는 로안을 폐허에 데려가려는 이유를 물었고, 설명을 들은 후에는 성년식도 치르지 않은 소년에게 신위를 맡기는 일의 위험성을 우려했다.

"당신이 내린 결정이니 반기를 들지는 않겠소만… 소년의 정신이 충분히 강하지 못한 듯해 염려스럽소."

"수정 심장은 능묘에 있던 것과는 경우가 다릅니다. 적성만 충분하다면 누구든 신위를 얻을 수 있어요."

"지금 당장에라도 내 조카에게 왕위를 넘겨줄 수 있소. 하지만 그 애가 왕으로서의 책무를 다하진 못할 거요. 똑같은 일이라 생각하지 않소?"

"하지만 누군가는 왕홀을 잡아야지요. 지금으로서는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이가 거의 없습니다."

"폭군보다는 빈 옥좌가 나은 법이라오. 직분을 감당하기에는 겁이 많아 보이더군."

란드와르는 볼로디아의 심경을 이해했다. 상식인이라면 떠올릴 수밖에 없는 염려였고 그 역시도 여러 차례 던진 화두였다. 티아와 누차 이야기하긴 했으나 여전히, 볼로디아를 안심시킬 만큼의 확신은 없었다.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악은 될 수 있을 겁니다."

할 수 있는 대답은 이것뿐이었다. 볼로디아는 묵상에 잠긴 표정으로 란드와르의 눈을 들여다보았고, 오래도록 침묵했다. 이윽고 수천 마디보다도 무거운 한 문장이 둘 사이에 놓였다.

"당신의 판단을 믿으려 하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자 버거울 정도의 침묵이 방을 가득 메웠다.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나가 보자. 최대한 가볍게…….

다행히도 떠오르는 주제가 하나 있었다.

"그나저나, 펠로시를 궁에 들이기로 했지 않습니까."

"그렇소. 그이도 만족하리라고 생각하오만."

"그게 말입니다, 당사자에게는 아직 이야기를 전하지 않았습니다. 말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란드와르는 선물 투자 사건의 전말을 밝혔고, 말루카의 왕이 껄껄 웃다가 갑자기 표정을 굳히는 순간을 즐겁게 관람했다. 최소한 로안의 정신력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보다는 즐거운 일이었다.

*  *  *

그때 펠로시는 벨레다와 함께 출강 준비에 매진하고 있었다. 로야페타에 따라가진 못하게 되었지만 자필 원고를 활자로 옮기고 예제를 검수하고 잡무를 도맡을 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부담 없이 시작했던 일이 이제는 돌덩이로 변해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매일매일이 과로의 연속이었다. 원고 검토에 들어갈 때마다 덧붙여 쓸 부분이 새로 생겨났고 교재 분량도 그에 비례해 늘어났다.

벨레다는 란드와르가 방에 들어오는 걸 보고는 비몽사몽 속에서 질문을 던졌다.

"펠로시랑 공놀이 하려는 건 아니죠?"

"넌 날 뭐로 생각하길래 얼굴 보자마자 그런 소리를 하냐."

"펠로시랑 공놀이 하는 사람요."

란드와르는 자조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됐고, 펠로시는 어디 갔냐."

"다른 방에서 자요. 내일은 되어야 일어날 걸요. 밤을 사흘을 샜거든요."

벨레다는 심드렁하게 대답한 후 교정지로 시선을 옮겼다. 글자가 눈앞에서 거품처럼 한데 모여 부글대다가 꺼지길 반복했다. 펠로시가 철야에 지쳐 쓰러진 게 두어 시간 전이었으니 자신도 곧 그 꼴이 나지 않을까 싶었다.

"공놀이 같은 거 할 시간이 없어요. 정말로요."

"아니, 넌 진짜 날 뭐로 보고 그러냐. 볼로디아가 자기 후궁 좀 보고 싶다더라. 그래서 찾으러 온 거야."

하지만 이름을 듣는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 벨레다는 조금 높아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대장군이요?"

"대장군은 아니고, 이제 왕이지. 계속 그렇게 부르긴 하는데. 아무튼 거실에 계신다."

그녀는 정확한 직함에는 관심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 볼로디아가 펠로시를 데려가리라는 것. 지금은 아니더라도, 두 해 안에.

그때를 위해 준비해 둔 게 하나 있었다. 잠자는 시간도 아껴 가면서, 반지를 떼어가면서까지 써낸 문서였다(헤이딘이 알았더라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 터였다). 벨레다는 서랍 가장 아랫칸에 보관된 서류철을 꺼냈고, 완숙한 정치가처럼 절도 있는 자세로 일어섰다.

"아무튼요, 잘 됐네요. 왕한테 전해줄 게 있거든요."

란드와르는 미심쩍다는 듯 종이뭉치를 내려다보았다.

"그거 줘 봐. 내가 먼저 검토해 보게."

"국가 기밀이에요!"

그렇게 외친 벨레다는 란드와르의 손을 피하고서는 방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는 꼬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함께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제리를 놓친 톰이라도 된 기분이다.

그래도 뭐, 엄청난 이야기라도 적혀 있으려고…….

"임금님은 펠로시랑 한나절 이야기한 게 끝이지만 저는 계속 같이 있었어요. 펠로시가 어떤 사람인지는 제가 더 잘 안다는 뜻이죠."

"그게 이 문서와 무슨 관련인지 의문이오."

종이더미를 받아든 볼로디아는 이 상황이 갑작스러운 듯 눈을 깜박이고만 있었다. 벨레다는 뽐내듯, 하지만 약간은 걱정이 섞인 어조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사용 설명서 같은 거예요. 펠로시를 데려갈 거면 그 정도는 하셔야 한다구요. 서명하실 게 아니라면 제가 계속 데리고 있으려고요. 비록 저는 신도 아니고 다스릴 나라도 없지만, 늑대인간 하나 먹여 살릴 돈은 충분히 있는걸요……."

한 발 늦게 도착한 란드와르는 두통을 느꼈지만 벨레다의 돌발행동을 막진 않았다. 늦기도 늦었거니와 볼로디아가 기꺼이 문서를 받아들었기 때문이다. 펠로시의 행복권과 자율권을 보장하는 152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진 서약서였다.

볼로디아는 상호 협의 하에 도시 재정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서른일곱 개의 항목을 고쳤고, 말루카의 왕으로서 서명했다.

*  *  *

그렇게 폐허로 떠날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란드와르 일행은 타일라프람으로 향했고, 교단 지부에서 노지용 수레를 빌렸다. 운전대를 잡는 동안 란드와르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임박한 가능성은 불안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밝혀지지 않은 경우의 수만큼이나 위험한 것은 없다. 테네브로즈는 지금껏 두 개의 사령탑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잡아 왔다―지금까지는. 솔로틀은 여전히 이방인들에게 적대적이며 수정 구슬을 활용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게 현실로 닥쳐오는 순간 테네브로즈가 누구의 편에 서게 될지는 명백하다.

파울리스를 비롯한 차원 생쥐들 역시 그 점을 염려하고 있다. 그들은 꿈 조각이 테네브로즈의 손에 들어가는 상황을 최대한 막으려 하지만 변수는 있다. 이강현의 직관과 의심이, 그리고 그들이 감춰온 진실이 복병이 될 것이다. 생쥐들은 최악의 가능성까지 상정하고 있다: 솔로틀과 대면하는 것이다.

저승의 청지기를 제하더라도 위험 요소는 산적해 있다. 열다섯 명의 요정 신관이 별자리에 이끌려 나우파나 폐허로 향한다. 그들 중에는 서리칼날의 모티스 역시 포함되어 있다. 그녀의 칼날은 병약한 반려, 토텐부르그를 위해 춤춘다. 원한 없는 이들의 피를 허공에 흩뿌리면서.

야스와다는 수많은 요정의 환희와 절규로 이루어져 있다. 둘 모두가 일드얀의 몫이다. 그러나 나트람은 은빛매의 주인을 죽일 마음을 품는다. 가문의 명운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종국에는 모두가 죽음을 맞을 것이므로.

일드얀은 그의 저의를 의심하지만 내버려둔다. 유용한 장기말을 내버리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 반대편에서는 몇 명의 요정이 저승에 발을 담그고 있다. 어둠달의 아자라스와 그의 두 딸, 그리고 피송곳니의 딤 나겔이다. 이시 타브가 완전히 깨어나 현계로 나서는 순간 불충 역시 밝혀질 것이다. 남은 시간은 짧다.

그리고 아직, 늑대의 꿈은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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