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32화 (133/258)

132화 그리고 폐허로 (1)

테네브로즈가 로안을 상대로 심리 상담을 해 주는 동안 란드와르도 내용을 전해 듣고 있었다. 애당초 기회를 봐서 이야기를 꺼내게끔 시킨 장본인이 그였던 것이다. 같은 내용일지라도 필멸자의 말과 신의 말은 다른 무게를 지닐 수밖에 없으니까. 어린애를 안심시키고 달랠 목적이라면 요정 놈이 대화역을 맡는 게 더 나으리라는 계산이었다.

"잘 해 주었다."

란드와르는 거실에 둘만 남았을 때를 기다려 이야기를 꺼냈다. 빈말이 아니었다. 놈은 기대했던 것보다도 훨씬 능숙한 태도로 로안을 달랬던 것이다. 요정이 천연덕스레 말을 받았다.

"나으리께서 시키신 일인데 잘 해내야지요."

"언제부터 그렇게 충성스러웠냐?"

"처음부터 그랬는데요. 시킨 건 뭐든 했지 않습니까."

방금 전까지는 칭찬만 해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으나 대답을 듣자니 뭔가 아니꼬웠다. 원소학을 배우지 않겠다고 뻗댄 게 계속 마음에 남아서인 듯했다. 이제는 로안이 정수기 역할을 대신할 수 있겠지만, 아무튼. 란드와르는 괜스레 시비를 걸었다.

"그러면 정상인이 돼 봐라."

"예?"

"명령이야. 정상인이 되라고."

테네브로즈는 눈을 깜박이다가 잘못된 지시문이 입력된 로봇처럼 굳었다. 그냥 해본 소리였는데 의외로 효과가 괜찮았다. 란드와르는 블루스크린이 뜬 컴퓨터에서 손을 뗀 뒤 묵상에 잠겼다.

이것으로 로안은 나우파나 폐허에서의 진상을 알게 되었다. 헤이딘에게도 메기도의 존재를 납득시켰다. 이제는 볼로디아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수정 요새로 떠나면 된다.

하지만 과거를 되짚어가는 작업이 여기에서 끝나진 않으리라는 예감은 여전했다. 로안과 헤이딘은 아직 아무것도 겪지 않았다. 혹은 자신을 기다리는 게 무엇인지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고작 이야기만을 들었을 뿐이다. 그 사실은 어떻게든 문제가 될 것이다.

어떻게?

일어나지 않은 일을 논하기는 어려웠다. 일단은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  *  *

흑발의 여자는 아름다웠다. 곧은 콧대나 갸름한 뺨, 그리고 자개처럼 여러 색으로 번뜩이는 눈동자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검은 비단 블라우스와 흰 바지는 장식 없는 장검과 놀랍도록 잘 어울렸고, 가끔은 그 모든 것이 원래부터 하나였던 듯한 착시마저 일으키곤 했다.

여자의 이름은 서리칼날의 모티스였지만 환영검이라는 이칭으로 더욱 유명했다. 그녀의 검술은 모두에게 똑같은 환상을 심어줄 만큼 정밀했다. 가늘고 예리한 칼끝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관중은 보이지 않는 적을 상상했으며 그것이 어떻게 쓰러졌는지를 알게 되었다.

체술을 멸시하는 요정들에게도 그러한 재주는 경이로운 것이었다. 사람들은 모티스를 나우파나의 귀족 중 하나가 아니라 날렵한 맹금류로, 걸어 움직이는 예술품으로 여겼다. 그러한 시선에는 언제나 경외감과 멸시가 뒤섞여 있었지만 모티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환영검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모티스는 원래의 삶을 잊을 수 있었다. 자신이 서리칼날 방계의, 보잘것없는 부부의 막내딸이라는 것. 3교구에서는 말단에 불과하며 앞으로도 출세할 일은 영영 없으리라는 것. 그리고…….

"아름다운 검무였어요. 커다란 칼린카가 보이던걸요… 부인은 뒷뜰에 온 세상을 가져다 놓는군요."

힘없이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녀는 동작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선이 가느다란 남자가 창틀에 상체를 얹고 있었다. 모티스의 반려, 은빛매의 토텐부르그였다.

반려를 마주할 때마다 모티스는 빛바랜 추억 속을 거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파리한 안색이나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발은 시간에 씻겨나가 탈색된 기억들을 연상시켰다.

어쩌면 그것은 단순한 느낌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토텐부르그가 병상에 누운 후로 모티스는 자신의 모든 노력이 연기를 손안에 붙잡아두려는 시도와 얼마나 다른지를 묻곤 했다. 희미한 온기가 죽음으로 바뀔 날이 머지않았다. 그게 언제일까? 몇 해 뒤? 당장 내일일 수도 있었다.

병의 징조가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혼례를 올리고서는 겨우 한 해가 지난 시점이었다. 처음에는 기침에 핏기운이 섞여 나올 뿐이었지만 반년이 지나서는 각혈이 되었다.

치유사는 마력 부종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평소에는 멍울 형태로 잠복해 있다가, 급격한 마력의 흐름이 감지되면 일시에 터져서 체내를 뒤집어놓는 것이다. 다른 종족은 주문을 자제하는 것만으로도 천수를 다할 수 있었지만 요정은 경우가 달랐다.

그들의 피에 흐르는 짙은 마력은 축복이라기보다는 저주였다. 마력 부종은 들숨과 날숨에 반응하면서 요정의 몸을 빠른 속도로 망쳐 놓았다. 억제제가 있기야 했으나 그마저도 원래는 독으로 쓰이던 것이었다. 마력 부종을 잠재우려면 독배를 들이켜고 피를 쏟아야만 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차이란 말인가?

그러나 모티스는 짙은 회의 속에서도 오늘을 놓치지 않았다.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반려를 위해 검술 연습 장소를 뒷뜰로 옮겼고 억제제를 구하기 위해 갖은 일을 했다. 그 일은 명문가의 연회에서 검무를 보이는 것에서부터 떳떳이 말할 수 없는 것까지로 다양했다.

"당신이 만족했다니 다행입니다. 뒷뜰에 온 세상을 데려다놓는 게 아니라, 언젠가는 함께 온 세상을 다니도록 해 드리지요."

모티스는 착잡한 심경을 억누르며 말했다. 매 순간이 목을 조이는 듯한데도 겉으로는 태연자약할 수 있다는 것이 스스로도 놀랍게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이 나우파나로 향하는 인원으로 선발되었음을 숨기고 있었다. 떠나기 전날에는 진실을 밝혀야겠지만, 병약한 남편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오후가 되어서는 달갑지 않은 손님이 들이닥쳤다. 그녀는 틀에 박힌 안부 인사를 나눈 후 무감각한 어조로 본론을 꺼냈다. 어차피 상대도 그 이야기를 하러 왔을 것이므로.

"폐허에서는 시간이 뒤틀린다고 들었습니다. 해도, 달도 없거니와 온통 빛뿐이라고요. 그곳에서 한 해를 보내도 바깥에 나오면 하루 나절일 수 있고 그 반대일 때도 있다고요."

"제수씨는 걱정이 많군요."

그렇게 말하는 남자는 토텐부르그의 이복형님이었다. 기다란 은발이나 선이 가는 이목구비는 동생을 닮았지만 인상은 확연히 달랐다. 새벽의 안개와 모닥불이 뿜어내는 탄연(炭煙)이 같지 않은 것처럼. 정중한 말씨에서는 음흉함이 엿보였다.

그러한 차이는 토텐부르그의 지위를 대언했다.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고 마력 적성 역시 시원찮았다. 유약한 심성 탓에 사교계에서 주역을 맡지도 못했다. 그는 하인과 별다를 바 없는 대우 속에서 자랐고, 성인식을 치른 후에는 본가에서 정원을 돌보며 지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모티스와 토텐부르그의 삶은 하나가 되었다. 나우파나의 피를 물려받은 검사와 명문가의 무능력자는 서로에게서 기묘한 일치성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녀는 맞은편의 남자가 자신들의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은빛매에게 토텐부르그는 오래전에 내버린 잡동사니일 뿐이다. 그가 모티스를 찾는 이유는 단 하나. 억제제와 그녀의 재주를 맞바꾸기 위해서. 그러나 이제, 모티스는 자신의 쓸모가 다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나는 폐허로 갑니다만, 살아남으리라고는 장담하지 못합니다. 돌아올지라도 그게 언제인지는 모를 일이지요."

"환영검의 명성에는 어울리지 않는 태도로군요. 자신감을 가져 보십시오."

"마음에도 없는 말은 들어도 기껍지 않아요. 무색 마력 갈래의 힘을 빌릴지라도, 검술은 어디까지나 살덩어리의 잔재주일 뿐입니다. 신의 힘에는 결코 미칠 수 없지요."

급파된 조사단 중에서 살아 돌아온 것은 둘뿐이었다. 그들은 수정 심장이 상당히 안정화되었다는 보고를 올렸다. 그러나 광기가 누그러졌을지라도 폐허는 여전히 위험한 곳이었다. 거기에서 누구를 만나게 될지도,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죽음을 전제로 두어야 할 것이다.

"내가 떠나는 즉시 토텐부르그를 은빛매로 돌려보내라고 말해 두었어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부드럽게 휘어졌다. 거짓 미소에는 눈웃음이 없다고 누가 말했던가?

"세상에는 두 가지 병이 있습니다. 하나는 걸렸는데 죽지 않는 병이고 둘째는 죽을 수밖에 없는 병이지요. 만일 애석한 소식이 들리더라도, 반려로서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십시오."

"방금 말씀은 조금 거슬리는군요. 말에 진심이 없어서……."

모티스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멈췄다. 토텐부르그를 돌봐줄 마음이 없는 게 사실일지라도, 그 속내를 감추지조차 않을 만큼 자신을 얕잡아보고 있을지라도… 은빛매의 일원을 자극해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녀는 한 문장으로 울컥거리는 심경을 갈음했다.

"아직 살아 있지 않습니까."

"그래요, 아직은 살아 있지요. 나로서도 이복동생이 피를 쏟으며 죽어가도록 내버려둘 마음은 없어요. 제수씨가 우리를 도와주기만 한다면 서로가 행복할 겁니다."

예상할 수 있는 것들은 언제나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추측이 옳았건 틀렸건 간에. 그녀는 혐오감 가득한 눈으로 남자를 쏘아보았다.

"은빛매의 대모께서는 지금조차도 누군가를 치워 없앨 궁리를 하고 계시는군요. 우리의 적이 인간인지 동족인지 묻고 싶을 정도입니다."

"제수씨께서 일부러 피를 볼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거대한 묘지에 한 명의 영혼이 더해지기만 하면 됩니다. 어떤 이유로든지요."

나우파나 폐허에 가기로 정해진 신관은 총 열다섯이었다… 그들 중 하나를 죽여야 할 것이다. 동족의 명운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이유로. 오로지 일드얀의 탐욕을 위해. 모티스는 구역질을 억누르며 남자의 눈을 마주보았다.

"실패와 성공을 따지진 않겠습니다. 만일 상대가 살아남고 제수씨께서는 폐허에 뼈를 묻게 되더라도 우리는 토텐부르그를 가문의 일원으로서 거두려 합니다. 하지만 둘 모두가 야스와다에 다시 발을 들인다면……."

"쉭겐."

모티스는 으르렁거리듯 남자의 이름을 불렀지만 쉭겐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역겹도록 상냥한 어조였다.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시지요. 제수님께서도 이미 여러 차례 해온 일이지 않습니까. 다를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상대의 가슴팍에 칼을 찔러 넣고, 그럴 수 없다면 스스로의 심장을 겨누십시오."

침묵 속에서 숨소리만이 거칠어졌다. 이윽고 끓어 넘칠 듯한 울림이 목구멍을 치고 올라왔다.

"서약을 해요!"

"어떤 서약 말입니까?"

"내가 없는 동안 토텐부르그에게 해를 끼치 않겠다고요! 만약 내가 돌아오지 못하게 되더라도요!"

"아, 그럼요. 제수씨께서 원하신다면야.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쉭겐은 우아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는 옷소매에서 작은 단검을 꺼냈고, 엄지에 작은 상처를 낸 뒤 콧등을 따라 아래로 그었다. 맹세를 뜻하는 요정의 전통이었다.

그것으로 협상이 끝났다. 쉭겐이 돌아간 후, 모티스는 다시 뒤뜰에 섰다. 이번에는 토텐부르그가 쓰러져 잠들었으므로 관객이 없었다. 하인들도 모두 물린 채였다. 그녀는 칼을 쥔 손을 곧게 뻗어, 검신과 지평선이 수직으로 직교하게끔 했다. 그것을 지지대 삼아 질문 한 쌍이 덩굴마냥 기어올랐다.

살아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병약한 반려를 다시 품에 안을 수 있을 것인가?

가끔은 그냥 비명을 질러 버리고 싶었다. 그러면 자신을 지탱하면서 옥죄는 모든 것이 산산이 조각나서 허공으로 흩어질 것만 같았다. 각각의 파편에 적힌 것은 덧없는 가정문. 토텐부르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의 삶이 자신의 삶이 되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고통도 환희도 없었으리라.

이윽고 생각이 멎으면서 머릿속이 표백되었다. 여기에 있는 것은 환영검. 서리칼날의 모티스도, 토텐부르그의 반려도, 쉭겐의 제수도 아닌, 칼날 그 자체.

모티스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몰아치는 검무 속에서 세상이 한층 멀어졌다. 들려오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없는 무아경이었다.

아찔한 진공을 향해 칼을 찔러 넣었다. 가느다란 검신이 창백한 겨울 햇살을 파고들어 한 줄기 섬광으로 변했다. 빛이 가른 것은 쉭겐의 잿빛 눈이거나 일드얀의 목. 동료 신관의 가슴팍. 혹은 자신의 심장이…….

일순 앞선 질문이 형태를 바꾸어 명멸했다.

살아 돌아와야만 하는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