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31화 (132/258)

131화 다시, 세카두 (2)

벨레다는 뜻밖의 호칭에 눈을 깜박였다. 어른 대우를 받고 싶다며 떠들고 다녀도 누님 소리는 낯선 모양이었다. 하기야 겉모습이 아니라 나이로 따져도 스물이 조금 넘었을 뿐이니까.

"누님이라고?"

"스물셋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전 아직 열일곱이니 예의를 지켜야죠."

"너, 좋은 애구나."

벨레다는 도도한 척 말했지만 뿌듯한 기색이 흘러넘치는 것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진짜 어른이란 민증을 보여 달라는 말에 함박웃음을 짓는 존재임을 언제쯤 이해할까? 아직은 요원한 일인 듯했다.

어쨌건 로안도 애였고 벨레다도 애였다. 요즘은 마흔도 젊은 나이라지만, 서른줄도 거의 절반이 지난 판에 애들끼리의 일에 간섭할 생각은 없었다. 란드와르는 짧게 웃고는 본론을 꺼냈다.

"방에 어르신 계시지?"

"그럼요, 달리 갈 데도 없는걸요."

"그러면 둘이 통성명이나 하고 있어라. 나는 얘 스승님이나 좀 보고 오련다."

*  *  *

저택 오른쪽 가장자리 방에 발을 들인 란드와르는 사방을 뒤덮은 종이더미에 기겁했다. 며칠 전까지는 꽤 정돈된 모습이었는데 그새 엉망진창이 된 것이다. 청람색 머리의 요정 소년이 서류철을 쥐고는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헤이딘이었다.

"어르신,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하나씩 있습니다."

"보름 만에 교재 한 권을 써내는 것보다 나쁜 일은 많지 않을 것 같소."

헤이딘은 피곤에 쩌든 목소리로 대꾸했다. 란드와르는 피식 웃으며 알세스트의 배낭을 꺼내들었다. 헤이딘이 이 방에 슈문의 영토를 연결한 것처럼, 배낭 역시 영토에 연결될 수 있다. 이공간 배낭인 셈이다.

"일단 이런 게 있어요. 와그다스 각인이 새겨진 물건입니다. 정확한 원리는 모르겠습니다만 잘 살펴보신다면 영토와 쉽게 연결할 수 있을 겁니다."

"흠."

헤이딘은 게슴츠레 눈을 뜨고는 너덜너덜한 가죽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체념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쁜 소식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오. 저택에서 방을 빼야 한다는 이야기겠지. 영토를 세 곳에 이을 수는 없으니까……."

"맞습니다."

"가구들을 다 내보내야 하는 건 아니길 빌겠소."

"눈치가 빠르신데요. 물약을 꺼내야 하는데 의자 다리가 손에 잡히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긴 한숨이 허공을 가로지르더니 요정 소년의 입가가 조용히 달싹였다. 모양으로 보아서는 두 해, 두 해 하고 되뇌는 듯했다. 잠깐만, 이게 한국어로 두 해 하는 입모양은 아닌데. 란드와르는 잠시 천계표 번역기와 지구인의 인지기능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

<다분히 인식론적인 질문을 던지시는군요.>

티아의 속삭임을 듣자마자 갑자기 궁금증이 식었다. 사방에 골칫덩이가 산적한 판에 철학에 할애할 정신머리는 없었다. 대답 고마워요, 티아.

그는 대신 현실적인 문제로 주의를 옮겼다. 헤이딘에게 메기도의 존재를 납득시킬 필요가 있었다. 당사자는 아무 기억도 감흥도 없는 모양이지만, 막상 만나고 보면 마음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또 하나 말씀드릴 게 있는데, 조카분에 대한 겁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별 생각이 없소. 옛 일은 도통 떠오르지를 않아."

"폐허에 가면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기억 조각이 나돌아 다닌다고 해도 내 기억은 아니잖소."

"어르신에 대한 기억도 섞여 있을지 모릅니다."

폐허의 기억 조각에는 상호작용 이스터에그가 있었다. 동료 중에 노르덴홀즈 구성원이 있으면 셀리멘의 대사가 몇 줄 추가되는 식으로. 메기도나 요정 검사에게서는 그런 추가 대사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혹시 몰랐다. 애당초 헤이딘이나 메기도나 게임에서는 제대로 구현되지 않은 존재였으니까.

란드와르는 테네브로즈가 읊은 과거를 천천히 풀어 나갔다. 메기도가 헤이딘에게서 마법을 배웠다는 것. 그러다가 와그다스 각인이 새겨진 조형물을 발견했다는 것. 나트람과 다투다가 자신이 본 것을 입에 담았다는 것. 그리고 쉭겐이 그 대화를 엿듣고는 일드얀에게 전했다는 것.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헤이딘은 오래도록 침묵했다.

"그 애가 죽으면서 내게 미안하다고 했던 게 이런 이유였다는 말이오?"

"아마도요. 조카분에게는 악의가 없었을 겁니다. 오히려 미안한 마음을 항상 품고 있었을 테고요… 그렇다고 해서 어르신이 겪은 일을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겠습니다만."

"아."

헤이딘은 짧게 신음했고, 란드와르와 시선을 마주쳤다. 두 눈을 메운 것은 후회도 격앙도 아닌 허무감이었다.

"내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좋겠소?"

그러게,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좋을까? 당사자 중 하나는 죽어서 흔적만 남았고 다른 하나는 아무 감상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머리가 망가졌다. 별채에 갇힌 세월은 이제 돌이키지 못할 과거가 되고 말았으며 보상을 받을 방법도 없다.

고통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알고 넘어서야만 하는 것과, 모르는 대로 남겨두는 게 좋은 것과, 알아도 알 수가 없는 것이. 마지막은 원래의 상처가 무엇이었든 간에 그 자체로 고통이 된다. 거기에 생각이 닿는 순간 갑작스레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쩌면 이걸 납득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부터가 오판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윽고 헤이딘의 입이 달싹였다.

"죄는 형님에게 있는 것이지 그 애의 몫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그렇습니까."

"폐허에 있는 건 흔적일 뿐이니 어렵겠지만, 만약 조카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거요… 나는 이제 괜찮으니 너도 괜찮아지길 바란다고. 나는 이제 괜찮으니까……."

헤이딘은 주문이라도 외우듯 그 어절을 되풀이했다. 긴 침묵이 있더니 낱말들이 그레고리오 성가의 한 소절처럼 느릿느릿 이어졌다.

"고향에서의 일들은… 그래, 우리는 참 애석한 삶을 살았지. 하지만 모두 지나간 일일 뿐이오. 적어도 내게는 지나간 일이 되었어. 별불꽃의 부가주였던 헤이딘은 오래전에 죽었소."

란드와르는 우리, 라는 낱말로 묶인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건 헤이딘과 벨레다일 수도 있었고 헤이딘과 메기도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셋 모두의, 그 이상의 고통이 함께 얽매여 있는지도 모른다. 딤 나겔과, 울쿠스와, 자신은 모르는 요정들이.

"그러니 내가 만약 무언가여야 한다면, 내게 가족이라는 게 있어야 한다면, 나는 그저 벨레다의 할아버지이고만 싶다오……."

싶다, 는 형용은 부정을 내포하고 있다. 이미 그렇게 되었다면 소망을 품을 필요도 없을 것이므로. 나트람은 아직 살아 있었으며 헤이딘은 그의 동생이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문장은 유독 우울하게 들렸다.

*  *  *

세카두에 온 지도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로안은 요정에게서 나우파나 마법을 배웠고 정보사 사제들과 합을 겨뤘다. 아직은 둘 다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빠르게 나아지고는 있었다.

로안은 마당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걸터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암적색 별은 원래의 크기를 거의 되찾았지만 여전히 다른 것들보다는 컸다.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묘하기만 했다. 감격이나 자부심과는 완전히 다른 감각이었다. 그 느낌에 구태여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회의가 될 터였다. 정말로 원한 게 이것이었던가, 하고.

애당초 아즈리온 신화에 빠져든 게 순수한 열정 때문이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친척들의 기대로부터 도망쳐온 곳이 세카두 서부 회당이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검을 배우고 전서를 외웠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뿐이었다. 촉망받는 인재보다는 평범한 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누군가에게는 배부른 투정이겠지만 로안은 정말로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이제는 이전 어느 때보다도 과중한 짐이 어깨에 얹혀 있었다. 화신이 자신을 선택한 것이다. 지금 당장의 쓸모로만 따지면 더욱 뛰어난 사람이 한참이나 많을 텐데도, 오로지 미래의 가능성만을 보고. 책임은 영예를 짓누를 만큼 무거웠다.

"고민이 많아 보이는군. 옆에 앉아도 괜찮겠지?"

테네브로즈의 목소리가 고민을 끊었다. 로안은 기꺼이 자리를 내 주었다. 처음 만났을 때에는 믿어도 되나 싶었는데 친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성인군자보다는 어딘가 허술한 사람이 정을 붙이기는 더 좋은 법이니까. 사실은 저택에 있는 모두가 그랬다.

(그들 각각이 겪은 일과는 별개로) 헤이딘이나 벨레다나 테네브로즈나 신화에 나올 법한 영웅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더 나아가 란드와르도 상상하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로안은 그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만약 근엄하고 진지한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중압감에 짓눌려 죽었을지도 몰랐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로안은 스스럼없는 분위기 속에서 천천히 고민을 풀어나갔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테네브로즈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대가 생각하는 것처럼 강인한 사람은 많지 않아. 유령 노인에게는 과거를 직면할 여력이 없고 꼬마는 친구라는 낱말을 몰라서 벌벌 떨지. 그대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지만, 늑대인간 대장군은 소명과 책임으로부터 평생을 도망친 사람이야."

"하지만 그분들에게는 그만큼의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아무것도 겪지 못했는데요!"

"낯설지 않은 시련은 어디에도 없어. 고행이 익숙해지는 시점은 모든 게 끝난 다음이지. 모두가 매 순간, 겪지 않은 문제에 부딪히고 있는 거야."

조언을 바라기야 했지만 이렇게까지 진중한 대답을 들으리라 예상하지는 못했다. 당혹에 잠겨 눈을 깜박이던 로안은 이 요정이 노르덴홀즈의 원로들만큼이나 오랜 세월을 살아왔으리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성격이 어쨌든 간에, 그동안 겪고 느낀 것 역시 많을 것이다.

"비슷한 과거로부터 배운 점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죠."

"그러면 이게 바로 그대의 과거가 되겠군. 배울 게 아주 많을 거야."

테네브로즈는 떨듯이 웃고는 주제를 돌렸다.

"내가 보기엔 그대에게는 다른 조언이 필요할 것 같군. 세상 일은 어떻게든 풀려 나간다는 거야. 완전히 망친 것 같아도 나중에 보면 그럭저럭 봐줄만한 결과물이 나오기도 하지."

"초급학교에서 시험을 친다거나, 정보사 사제님들과 대련을 한다거나 하는 일이라면 그 말이 사실이겠죠. 하지만 폐허에 대해서라면… 너무 낙관적인 말씀이십니다!"

"아니, 폐허만큼이나 큰 증거는 없지. 그대가 아는 역사를 되짚어 보자고. 그게 왜 이 꼴이 되었는지는 알고 있나?"

"아 드지즈가 죽으면서 수정 심장이 폭주했다고 합니다… 셀리멘 님의 희생으로 나머지가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요.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그래?"

테네브로즈는 나우파나 폐허의 뒷사정을 읊어 주었다: 전쟁에서 승기를 잡으려면 누군가가 신위를 이어받아야 했다는 것. 하지만 수정 심장은 지극히 불안정했고, 자아를 잃을 위험마저 있었다는 것. 원래는 알세스트가 그 역할을 맡았지만 셀리멘에게 떠넘겼다는 것. 하지만 셀리멘도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

"저는… 저는 처음 듣는 내용입니다! 완전히 처음 들어요. 아무도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아즈리온 전서에도 적혀 있지 않았고요."

"아니, 그러면 알세스트가 자기가 얼마나 겁쟁이였는지를 방방곡곡 고해하고 다녔어야 했다는 말인가? 인류의 구원자 중 하나가 사실은 누이에게 책임을 떠넘긴 비겁자라고 말해야겠어?"

"물론 그러면 모습이 좋지는 않겠습니다만, 그래도……."

"나는 노르덴홀즈의 시조를 탓하려는 게 아니야. 그대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놓으려는 것뿐이지. 겉보기로는 철인 같을지라도 속이 곪아 있고, 계획은 번번이 어긋나지만… 그러면서도 다들 결함을 감춰 가면서 영웅 노릇을 해내. 제 인생의 주인공이든, 세상의 구원자든 간에."

"그래도……."

로안은 그 어절을 되풀이했다.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완벽한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까, 민폐를 끼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혹은 대업을 망치더라도 윤색할 방법은 있으니 일단 저질러 보라고?

둘 다 어떤 면에서는 위안이 됐지만 선뜻 받아들이기엔 어려운 주장이었다. 그런 걸 당연하게 여겼다가는 너무 염치없는 사람이 될 것만 같았다. 그게 세상사의 본질일지라도.

테네브로즈는 로안의 표정을 살피고는 무슨 생각인지 알겠다는 듯 덧붙였다.

"이봐, 젊은 친구. 깊이 따질 필요는 없어. 나으리께서 그대를 골랐으니 책임도 나으리에게 있다는 것만 알면 돼. 그리고 나으리께서는 사고를 수습할 능력이 되지. 그러니까 남의 부담을 애써 짊어지고 다니지 말라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