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다시, 세카두 (1)
"적성이야 맞는다니 빠르게 배우겠군요. 강도가 문제입니다만. 이 상태로 아가씨처럼 했다가는 허공으로 뛰어오르기 전에 제 몸부터 산산이 찢어질 겁니다."
나우파나의 염동술은 간섭 위치가 멀수록 그 힘이 약해졌다. 달리 말하면, 몸 바로 근처에서 마력 폭발을 일으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었다. 세기 조절에 실패하면 상대를 떨쳐내는 게 아니라 함께 자폭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거야 일단 시도를 해 보고, 안 되면 넘어가. 단시간에 제어력을 올리긴 어려울 테니까. 그냥 대련만 하면서 제대로 된 싸움을 경험시키기만 해도 돼. 수정 거수만 상대하면 상관이 없는데, 추적대가 따라올 확률이 높단 말이야."
"높은 게 아니라 확정인데요."
자신 또한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단언하는 태도가 어쩐지 아니꼬웠다. 란드와르는 미간을 좁히고는 힐문했다.
"너 그거 무슨 근거가 있어서 하는 소리냐?"
"나으리께서는 사이라크를 심문할 때 옆에 계셨으면서 그러십니까. 2교구가 뭘 하는지도 아시면서요."
"아니, 9할 9푼이랑 10할은 다른 거잖아. 구분을 해야지. 아닐 가능성이 있으면 확정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고."
"1푼의 가능성이 남아 있으니 확정이 아니라고 믿는 건 자기위안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여기까지 떠들어놓고 보니 로안 앞에서 이런 대화를 하는 게 현명한 일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미 말은 튀어나왔고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는데 어쩔 텐가, 될 대로 되라지. 어차피 앞으로는 더한 것도 보게 될 텐데…….
"아무튼, 확정이라 치고. 확정이라 치면 문제가 하나 더 생기는 거지."
"무슨 문제 말씀이십니까."
"쟤가 아까처럼 혼란 얻어맞고 멀뚱히 서 있으면 안 된다고."
"죄송합니다!"
로안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란드와르는 심드렁한 투로 대꾸했다.
"그건 네 잘못은 아니야. 그냥 당연한 거야."
정신 간섭 주문의 성공률만 따진다면 인간과 요정 사이에는 유의미한 차이가 있었다. 개개인의 정신력 이전의 문제였다. 명문가 요정은 대개 의지에 저항하는 방법을 익혔지만 인간은 아니었던 것이다.
"혼란이랑 공포 저항하는 방법부터 가르쳐. 그게 제일 중요해."
* * *
세카두로 돌아간다는 말에 노르덴홀즈 원로들은 난색을 표했다. 하루만, 혹은 몇 시간이라도 더 머무르면서 ‘좋은 말씀’ 을 해 주시면 안 되겠느냐는 간청이 이어졌다. 팬미팅을 또 해야 한단 말인가?
티아 씨, 예전에도 이랬어요? 화신이 내려온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전에도 그랬습니다. 시뮬레이터에서도 이미 여러 차례 겪어 보셨을 텐데요.>
잘 생각해보니 티아의 말이 옳았다. 란드와르의 정체를 알게 된 인간들은 가끔 이런 이벤트를 띄웠던 것이다. 이벤트의 내용은 뭐든 간에 좋은 말씀을 해 주는 것. 보상은 소량의 신앙심. 이런 씨발, 게임에서는 그냥 수락 버튼만 누르면 캐릭터가 알아서 말을 했단 말입니다.
<대사는 저희가 모두 들고 있습니다. 따라 읽으시면 됩니다.>
어쨌거나 란드와르는 원로들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대화를 나눴고, 그 과정에서 궁금하지 않았던 사실도 하나 알게 되었다. 마력 폭풍 사태에 노르덴홀즈와 연계된 마공학 기기 판매점도 휘말렸다는 것이다. 벨레다가 관광을 갔던 곳이 틀림없었다.
투자의 책임은 투자자 개인에게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된 게 벨레다는 돈을 벌고 애먼 사람들이 독박을 쓰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꼬마를 탓할 수 있느냐면 그건 아니고, 교단에 명령해서 손실 보전을 해줄 마음은…….
란드와르는 귀를 닫고 생각을 멈췄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었고 자신은 신이었다.
* * *
란드와르는 차원문에 세카두 외곽 수도원 좌표를 입력했다. 저택에 들여보내기 전에 일단 파르타에게 소개를 시켜야 했던 것이다. 이야기야 몇 차례 해 두긴 했지만 얼굴을 익히는 건 또 다른 일이니까.
파르타 역시도 천재 소년에게 관심이 많은 모양새였다. 예전부터 소식을 전해들었다고 했다. 집안도 집안이거니와 자신도 한때 서부 수도원에 적을 두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그래서 본가로 돌아간 후에도 계속 행적을 지켜보았다고.
잠깐만, 이거 민간인 사찰 아닙니까?
"서부 회당 사제들에게 네 이야기를 들었단다. 착하고 신앙심이 깊은 소년이라고 했는데, 그이들이 사람을 잘 본 모양이야. 네 이름에 큰 명예가 있겠구나……."
로안은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 쳤다.
"아, 아닙니다! 줄곧 신세만 진걸요. 경험도 많지 않고요."
"나도 젊을 적에는 서부 회당에 적을 올리고 있었단다. 명예로운 전사들만이 그곳에 발을 들일 자격이 있지."
파르타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란드와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동의를 구하는 투였다. 란드와르는 정보기관의 역할과 민간인 사찰에 대한 윤리적 논의를 마음 한구석에 치워 놓았고,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었다. 거기에서부터 다시 대화가 시작되었다.
"예, 기억이 납니다! 서부 회당에서 지내는 동안, 선배님의 존함을 곧잘 들었어요. 저와 비슷한 나이일 때부터 무재로 이름을 떨치셨다고요. 검과 약속한 것이 있다면서 청혼도 거절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때는 어렸지… 옛날 생각이 나는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는 그것뿐이니?"
"맞아요! 예전부터 직접 만나 뵌다면 여쭙고 싶었던 게 있었습니다. 젊으실 적에, 실력이 엄청난 검사와 며칠간 함께 다니셨던 것으로 압니다. 헤어지는 날 대련을 하셨다고요. 그러고서는 깨달음을 얻어서 검술이 갑작스레 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검사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고요. 사연이 항상 궁금했습니다."
"떠돌이와 풋내기가 합을 겨뤘을 뿐이야. 이제는 서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지. 그쪽은 나를 잊어버렸을 테고……."
파르타는 자신의 목가를 만지작거렸다. 보이지 않는 목걸이를 손에 쥐려는 듯했다. 입가에 미소가 어리며 그리움 어린 문장 하나를 불어 내쉬었다.
"사람은 늙고 변하는데 말들은 그대로구나."
순간 란드와르의 귀가 미세한 울림을 감지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사제들의 숨죽인 목소리가 흘러들고 있었다. 대강 정리하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세상에, 나 저 인간이 저러는 거 처음 봐. 일하는 기계인 줄 알았는데…….
란드와르 역시 그 말에 동의했다.
* * *
그렇게 파르타까지 만나 놓고 보니 잊고 있었던 문제가 하나 떠올랐다. 다른 녀석들을 아직 하나도 소개하지 않았던 것이다. 란드와르는 테네브로즈를 저택에 보내둔 뒤 비어 있는 회의실을 빌려 로안을 데리고 들어갔다.
"저택 가기 전에 말해둘 게 하나 있는데, 일단 폐허에 많은 수가 가지는 않을 거야. 요정 놈은 아까 봤을 테고 두 명이 더 있어."
"삼촌과, 요정님과, 저, 이렇게 셋. 여기에서 두 명이 더 있다면… 다섯입니까?"
란드와르의 말에 로안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너무 적은 머릿수에 의아함을 느끼는 모양새였다.
"일단 폐허가 어떤 곳인지는 알지. 신화에 쓰인 것 말고, 거기 간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 보고 들은 게 있지 않냐."
"예, 다들 정신이 나가는 것으로 압니다. 폐허가 자기를 부른다고 중얼거리다가 돌아가서 죽는다고요……."
나우파나 폐허는 마경으로 악명 높은 곳이다. 기억 조각들이 정신 이상을 막아 준다지만 동시에 영향이 닿는 범위는 대여섯이 고작. 여럿이 몰려갈 필요가 없었다.
"여럿이서 가면 여럿이서 미치는 거야. 제정신을 유지할 방법이 있긴 한데, 다섯 명이 넘어가면 어려워."
로안은 무언가 생각하더니 질문을 이었다. 괜찮은 지적이었다.
"그러면… 아까 전에, 요정들이 따라올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나는데, 요정들은 해당사항이 없는 겁니까?"
"마찬가지야. 다섯쯤만 남기고 모두 미치겠지. 이제 그 다섯이 문젠데."
물론 기억 조각을 찾기 전에 모두 정신이 나갈 수도 있겠지만, 그런 가능성은 희박했다. 조각들은 살아 있는 사람을 따라오려는 습관이 있으니까. 결국 요정 다섯은 남을 것이다.
조각은 파티와 동행하며 전투를 돕는다. 중요한 건 각 조각의 성능이다. 요정 전사가 제일 강하고 셀리멘이 그 다음이다. 메기도는 야스와다 마법을 쓰긴 하지만 아주 기초적인 수준일 뿐이다.
결국 중요한 건 조각 운이었다. 첫 번째로 마주치는 기억 조각이 누구의 것이냐, 하는 것 말이다. 예컨대 요정이 전사를 얻고 이쪽은 메기도를 얻는다면 난도는 급격히 올라갔다. 뿐만 아니라 정신이 나간 것들도 완전히 죽기 전까지는 적으로 간주해야만 한다.
어쨌거나 미리 방비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지금 이야기를 꺼내 봐야 부담감만 늘어날 테고. 셀리멘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요정들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으니까 일단 넘어가자. 지금 그게 논점이 아니야. 우리가 원래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냐."
"아, 예! 두 분이 더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오냐. 한 명은 지금 말루카에 있는데, 다른 하나는 저택에 있거든. 직접 만나기 전에 누군지 듣고 가는 게 낫지 않겠냐."
"말루카라면… 늑대인간이군요! 혹시 이번에 돌아왔다던 첫째 왕녀님입니까?"
로안은 디즈니 만화동산을 기다리는 유치원생처럼 눈을 반짝였다. 저택의, 누구인지도 모를 동료보다는 볼로디아에 더 관심이 가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선왕을 죽이고 실종된 후계자만큼이나 흥미로운 인물은 많지 않을 것이다. 돌아와서 신위까지 얻었다면, 더더욱.
란드와르로서도 볼로디아부터 설명하는 쪽이 편했다. 노예 기술자와 요정 유령 콤비는 아무래도 평범한 이스트리아 사람에게는 납득시키기 어려운 존재였던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볼로디아의 삶은, 그리고 스카르파와 울쿠스는 고전적인 비극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로안은 뒷사정에 푹 빠져들었다. 울쿠스의 유언을 듣고서는 감동의 눈물까지 흘릴 만큼. 볼로디아에 대한 호감까지도 충분히 쌓인 듯했다.
"엄청난 분이신데요! 저라면, 그런 일이 있었다면 일 년쯤은 푹 쉬겠습니다.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고향엔 안 갔을지도 몰라요… 앗,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죠. 죄송합니다."
갑자기 뻣뻣하게 굳는 걸 보니 흡연욕구가 올라왔다. 란드와르는 중지와 검지로, 시가를 쥐는 듯한 손동작을 취했다. 실내에서 불을 붙일 생각은 없었지만 질문 하나가 손끝에서 뭉글거렸다. 열일곱이면 고등학생인데, 애가 아니지 않나? 그러면 로안 앞에서는 피워도 되는 게 아닌가?
아무튼.
"그냥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해도 돼. 요정 놈도 나한테 온갖 소리 다 하고 살잖아."
"이렇게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요정님과는 오래 다니셨지만 저는 아니지 않습니까. 사실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원로님들께서 보시면 화들짝 놀라실걸요."
"격식 차린다고 그러지 마. 귀찮아."
"하지만……."
마음이야 이해했지만 골치가 아팠다. 남들이 굽신거리는 걸 본다고 기분좋을 것도 없었거니와 그걸 받아주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소한 강현의 성격에는 맞지 않았다. 예의 좀 덜 지킨다고 해서 신앙심이 깎이는 것도 아닌데. 누가 뭐래건 나는 신인데…….
그냥 본론으로 돌아가야겠다는 계산이 섰다.
"아무튼, 다른 하나는… 실제로는 둘이거든. 한 쪽이 유령이야."
"죽었단 말씀이십니까?"
"완전히 죽은 건 아니고, 반지에 요정 영혼이 묶여 있어. 반지 주인은 그 요정 제자고."
"그러면… 제자도 요정인 겁니까?"
"인간이야. 여자애고."
란드와르는 헤이딘과 벨레다의 배경을 대강 설명했다. 금지된 마법을 쓴 죄로 별채에 감금당했다는 것. 인간 아이에게 각인을 가르쳐서 반지를 만든 다음, 함께 인간 세상으로 도망쳐 왔다는 것. 그랬다가 볼로디아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연이 닿게 되었다는 것.
"다들 엄청나십니다. 저는 지금까지 한 게 가출밖에 없는데요! 저 빼고 다들 경험 많은 어른들이셔서, 발목만 붙잡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경험 많은 어른? 성인인 것도 사실이고 경험도 많겠지만 벨레다에게 그 수식언을 붙이려니 위화감이 심했다. 란드와르는 사견이 객관을 가로막기 전에 멈췄고, 적당한 덕담을 입에 담았다.
"벌써부터 걱정해서 뭐가 바뀌냐. 긴장하면 되는 일도 안 된다더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른 분들께 너무 짐덩어리로만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오냐."
삽질을 혼자서도 잘 하는구나, 싶었지만 덕분에 유용한 조언이 떠올랐다. 전사 란드와르가 아닌 서른네 살 이강현이 가르칠 수 있는 건 처세술밖에는 없는 것이다.
"저택에 가면 키 작은 어린애가 있을 거야. 걔가 벨레다거든. 보면 누님이라고 불러."
"누님…요?"
"누님이든 뭐든 간에 깍듯이 모셔. 겉모습은 신경 쓰지 말고 서른쯤 먹었다고 생각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