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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29화 (130/258)

129화 노르덴홀즈 금고 (2)

포도주 맛이 쓰레기였다. 란드와르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유리병을 바라보았다. 마법도 상하나?

<좋아 보이는 물건이 개량도 안 되고 창고에 갇힌 데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죠. 처음부터 그랬어요.>

단념하고 포도주 병을 제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남은 유산 중에서 챙길 것은 많지 않았다. 은폐장 생성기 등, 비전투 상황에서 도움이 될 도구가 몇 개. 이제 영약을 보자.

오른편의 진열대로 걸음을 옮겨 유리병들을 살폈다. 용액이 말라붙은 자국이 병 주둥이에 둥근 테를 남기고는 색색의 엷은 막이 되어 밑으로 늘어졌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에는 가득 차 있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9할 이상이 날아가고 만 것이다.

연금술 물약의 효과는 숙성 기간에 비례했지만 그만큼 양도 적어졌다. 밀봉한 채 한 세기가 지나면 바닥에나 겨우 고일 수준으로 줄고, 그 이후부터는 순수한 마력 결정으로 변하고 만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란 소리다.

달리 말하면, 마력 결정이 되기 직전의 영약에는 엄청난 가치가 있다. 물론 진열대에 놓인 유리병 중에서 그토록 오래된 것은 많지 않았다. 노르덴홀즈의 자금력으로도 최고급 물약을 백 년씩 묵히기에는 어려움이 따랐던 것이다. 재료비도 재료비거니와, 그 돈을 은행에 넣어둔다면…….

<근 100년간의 도시 연합 기준금리 평균은 4.3%였습니다. 개인용 예적금 상품의 이율은 다양하니 이것으로 계산하도록 하죠. 2년마다 재예치한다고 가정할 경우… 100년간의 수익은 약 60배군요.>

머릿속에 도청기 겸 정보처리장치가 설치된 건 다행일까, 불행일까? 이런 삶도 익숙해지니 별 감흥이 없었다. 란드와르는 티아에게 소소한 감사를 전한 뒤 로안에게로 향했다. 영약은 탈리스커에게 배송을 부탁할 생각이었다. 일단 작은 병에 옮겨 담아서 부피를 줄여 두어야 할 테고.

"증폭구는 골랐냐."

"제가 무색만 적성이 높아서 아무거나 써도 됩니다. 그래도 하나씩 껴 보면서 제일 잘 맞는 걸 찾는 중이에요. 안 맞는 걸 쓰면 가끔 흐름이 어긋나서 주문이 실패하거든요."

로안이 고른 것은 반지와 목걸이 하나씩이었다. 반지는 빠른 시전을 돕고 목걸이는 정밀도를 높여 준다고 했다. 위력은 이미 충분히 강하니 부족한 점을 채우고 싶다고. 증폭구 여럿을 동시에 낄 수는 없으니 경우에 따라 교체하게 될 터였다.

란드와르는 티아의 보고를 복기했다. 유지력은 여전히 부족하지만 제어력에서는 엄청난 발전을 보였다고 했다. 수련의 장에서, 환영 괴수를 상대로 실전 연습도 많이 해 보았다고.

하지만 환영 괴수와 실제의 적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나우파나 폐허에서는 요정을 상대할 공산이 크다.

여기에서 남은 보름을 보내기보다는 일단 세카두로 데려가야겠다는 계산이 섰다. (이미 회당 사제를 사사하긴 했지만) 정보사 사제에게 검술 교습을 맡길 수도 있고, 마법을 활용한 전투야 테네브로즈에게서 배우면 그만인 것이다.

게다가 로안의 적성은 무색 마력에 있다. 나우파나 마법을 배우기에 더없이 적합하다는 소리다. 염동술은 근거리에서 큰 효과를 보이니만큼 마검사에게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일단 사이라크가 한 것처럼, 점멸만 배우더라도…….

"그나저나 네가 여섯 달 동안 수련의 장에만 있었지 실제로 싸워 본 적은 없지 않냐."

"아, 예! 아무래도 실전이랑은 차이가 있지요."

란드와르는 테네브로즈를 힐끔 보았다. 신기하다는 듯 증폭구를 끼었다 빼면서 얼음꽃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인간 체험이라도 하는 중인가?

"가르침 받는 셈 치고 저거랑 한 번 싸워 봐라."

"제가 왜요?"

말은 로안에게 했는데 대답은 요정에게서 왔다. 과연 제정신이 아닌 새끼였다.

*  *  *

테네브로즈에게 죽음은 익숙한 것이었다. 그게 타인이 아닌 자신의 몫일지라도.

솔로틀은 현계에 간섭하지 못하는 대신 정원사를 분신으로 내세웠고, 그들에게 저승의 가호를 베풀었다. 정원사는 무한히 되살아났다. 칼이 심장을 꿰뚫더라도, 석재에 머리가 으스러지더라도, 영혼만 온전히 남아 있다면.

사이라크와 두 동생이 습격한 날, 그는 두 차례 죽었다. 첫 번째 죽음은 난데없이 무너진 천장 때문이었다. 사이라크는 섣불리 진입해서 상대를 깨우는 것보다는 건물 자체를 무너뜨리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어려운 결정은 아니었다. 별불꽃에 몸을 의탁한 동안, 테네브로즈는 본가가 아니라 숲지기의 오두막에 머물렀던 것이다.

되살아난 테네브로즈는 일단 밖으로 나왔고, 시체를 찾던 네르갈과 마주쳤다. 그 다음부터는 추격전의 연속이었다. 나무가 땅에서 뽑혀 나왔고 허공에서 사이라크의 주문이 날아들었다. 테네브로즈는 침착하게, 세 요정을 흩어 놓으면서 각개 격파를 시도했다.

네르갈을 기절시킨 것까지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메기도는 쓰러져 누운 동생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고, 마력 폭풍이 시작되었다. 로야페타에서 휘몰아치던 것보다 조금 약한 세기로. 굉음과 함께 부러진 나뭇가지가 상공을 휩쓸었다.

강력한 힘의 소용돌이 앞에서 테네브로즈는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감정에 전율했다. 공포였다. 보이지 않는 손이 온몸을 잡고 비틀어대더니 뼈를 산산이 부수어 놓았다. 곧이어 도착한 사이라크가 폭풍을 잠재웠고, 테네브로즈의 가슴팍에 칼날을 쑤셔 넣었다.

로안의 마법이 준비되는 것을 지켜보며, 테네브로즈는 그 순간의 감각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갑자기 수련의 장으로 끌려가서 대련을 하게 된 것까지는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첫 공격을 기다려주겠다고 말할 필요가 있었을까? 너무 배짱을 부린 게 틀림없었다.

제국의 학자들이, 걸작을 폐기하려 했던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갔다. 저런 재능의 소유자에게 마력 구속구가 먹히지 않는다면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물며 그게 노예라면. 테네브로즈는 먼 조상들의 지혜를 깨달았고 자신의 만용을 후회했다.

하지만 발을 빼기에는 늦었다. 만회할 여지도 아직은 있었다. 잘 생각해보니 첫 공격을 양보하겠다고 했지 막지 않겠다고는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에는 혈마법의 힘을 빌려야 할 것이다. 그는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수백 개의 얼음조각이 허공에 나타나는 동시에 마지막 획까지 완성되었다. 테네브로즈는 마력 결정을 내던지고는 힘을 끌어올렸다. 끓어오르는 혈기 구체가 머리 위에서 형체를 갖추더니 반구 형태가 되어 그를 감쌌다.

후끈한 더위. 피의 장막 너머로 보이는 세계는 온통 붉고 미끄럽다. 천장에 가까이 붙어 휘도는 얼음 파편. 마치 붉은 수정을 엮어낸 샹들리에가 광풍에 휘청이는 모습처럼 보인다. 그 모든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멎더니, 각각의 조각이 빛을 사방으로 튕겨내면서…….

살갗을 지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수증기가 장막 안쪽까지 밀려들었다. 강렬한 열기가 눈앞을 훅 가로막더니 주위가 한층 차가워졌다. 끓어오르는 피가 얼음 조각들을 모두 녹이지 못하고 온도를 잃어버린 것이다.

테네브로즈는 재빨리 장막 너머로 몸을 던졌다. 미지근한 피가 온몸을 적시는 동시에 쓰라린 감각이 등줄기를 스쳤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남은 파편에 허리가 잘릴 뻔했다. 큰 부상은 아니니까 다행이라 생각하기로 하자. 물약만 바르면 금방 아물 것이다.

<성년식도 치르지 못한 꼬마를 상대로 쩔쩔매다니, 참으로 한심스럽구나.>

거기에 생각이 닿는 순간 저 세상의 관람객이 훈수를 놓았다. 아니, 청지기님, 한 시간 가까이 준비한 주문이 약할 리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진심인 모양인데요.

"죄, 죄, 죄송합니다!"

테네브로즈의 몰골을 본 로안은 뻣뻣한 목소리로 외치더니 목검을 들고는 돌진했다. 죽일 뻔해서 죄송하다는 말인가? 정말로 죽였더라면 어쨌을 텐가? 어찌 됐건 끝까지 상대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혼란을 시전하자 로안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인간은 대개 정신 마법에 저항하는 법을 익히지 못했던 것이다. 테네브로즈는 정강이를 걷어차 쓰러트린 뒤 몸을 돌려 란드와르를 보았다. 외곽에 의자를 깔고서는 잘 모를 표정으로 시가를 태우고 있었다.

"아니, 나으리. 이럴 거면 진검도 쓰라고 하시지요. 아예 절 죽이려 했지 않습니까."

*  *  *

"궤도 제어까지는 잘 되는데, 출력 조절이 잘 안 됩니다. 출력을 낮추면 궤도가 모두 망가지거든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만……."

로안은 시무룩한 듯 어깨를 움츠리고서는 말했다. 테네브로즈는 녀석을 빤히 바라보다가 빙글거리며 웃었다. 유쾌한 어조에 신랄한 문장이 담겨 나왔다.

"어떻게 잘 하려 했다는 건가? 요정의 목숨을 잘 끊어놓겠다는 말인 것 같은데……."

"죄, 죄송합니다!"

란드와르는 구태여 말하진 않았지만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라니, 그러면 얼음 송곳을 그렇게나 퍼붓고서도 상대가 멀쩡하리라 기대했단 말인가? 요정 녀석이 평범한 인간이었더라면 이미 머리가 쪼개졌을 게 분명했다.

물론 최종적인 책임은 자신에게 있었다. 중간에 말릴 수도 있었지만, 그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엔 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이유는 하나였다. 요정 놈이 묘하게 여유로워 보여서. 저걸 어떻게 막아 내려나 직접 볼 작정이었다.

확실히 장관이긴 했다. 얼음 조각들이 수증기로 변해 비산하는 장면은 화산의 분출이랄지,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운해 따위를 연상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그걸 제외하면 큰 수확은 없는 대련이었다. 일대 일 상황에서 어떻게 싸우나 보려 했는데, 한 시간 동안 대규모 마법을 준비하다가 혼란을 맞고 쓰러진 게 끝이었다.

란드와르는 빠르게 합리화를 마쳤다. 수확이 없으면 어떤가? 좋은 구경을 했는데. 사람이 물질적인 이득만 따지면 속물이 되는 법이었다. 게다가 놓쳤던 부분도 하나 확인하게 되었으니까.

"지금 당장 세카두로 간다 하면 괜찮겠냐."

"아, 예! 가문 어르신들께서도 반대하지 않으실 겁니다. 세카두 수도원에 오래 있었으니 사제분들을 대하는 예법도 알고요."

가출해서 아즈리온 회당에 일 년쯤 머무르다가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로안은 곧잘 사제들을 찾았다고 했다. 검술에도 어느 정도 체계가 잡혀 있는 건 그 덕분이라고도.

지금까지, 온갖 페널티를 짊어지고서도 그럭저럭 용병 노릇을 해왔으니만큼 근접전 능력도 나쁜 수준은 아니었다. 정보사 사제들에 비하면 검술은 풋내기지만 마법이 섞이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이윽고 란드와르는 생각을 완전히 정리했다. 대형 돌연변이와의 전투에서는, 후열에서 강력한 한 방을 준비시키자. 반면 요정이나 폐허의 망령이 상대라면 마검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요정들을 손쉽게 도륙하리라는 기대는 없다. 경험도 경험이거니와 고작 열일곱 먹은 놈한테 그런 일을 강요하는 건 아무래도 못 할 짓이니까.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테네브로즈의 협조가 필요했다. 란드와르는 요정에게로 시선을 돌리고서는 말했다.

"아무튼, 쟤를 세카두로 데려가서 실전에 가깝게 대련을 시킬 거야. 저런 마법만 쓰기도 어렵고 상대가 기다려 줄 리도 없으니까. 검술은 정보사 사제한테 맡길 건데 마법은 네가 가르쳐라. 특히 나우파나 마법 활용하는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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