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노르덴홀즈 금고 (1)
"이게 어떤 일인지를 항상 기억해야 해. 그분께 누가 되어서는 안 되지. 비록 네가 재능이 넘치고, 여섯 달간 열심히 노력하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게 끝난 건 아니란 말이다."
원로들에게 끌려간 로안은 참담한 환희 속에서 훈계를 듣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사방에서 폭죽이 터지는 듯했는데, 이제는 모두가 떠난 연회장을 홀로 치우는 기분이 되고 말았다. 기쁨은, 몸 안에 남은 열기는 차갑고 무거운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아까 전까지는 웃고만 있더니 이제야 좀 진지해지는구나. 누가 보면 대전쟁이라도 끝내고 돌아온 줄 알았을 게야. 그래, 네가 어릴 적에는 알세스트님의 현신이라는 말을 듣곤 했지. 그만큼 뛰어났으니까. 그때부터 열심히 수련을 했더라면 이렇게 마음을 졸일 일도 없지 않았겠느냐."
로안은 혀끝까지 올라온 문장들을 삼켰다. 당연하죠, 원로님. 제 실력은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걱정도 제가 제일 많이 하고 있고요. 너무 들뜬 것처럼 보였나요? 하지만 그러지 않으면 계속 우울한 생각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위력은 충분했고 정밀성도 어느 정도 해결됐지만 유지력이 발목을 잡았다. 경험 역시 부족했다. 자신보다는 다른 노르덴홀즈 마법사가 더 도움될 게 틀림없었다. 괴수 토벌에 잔뼈가 굵은 사람들도 몇 있으니까…….
"큰할아버님, 너무 부담을 주고 계시잖아요! 어차피 남은 시간도 얼마 없으니까, 우리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을 찾아보자고요. 그렇게 잔소리만 해서야 될 일이 어디 있겠어요?"
이윽고 둘째 이모의 목소리가 로안을 자학의 구덩이로부터 끌어 올렸다. 탈리스커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받았다.
"금고를 엽시다. 줄곧 아껴온 것들을 꺼내도록 해요. 영약과, 마력 증폭구와, 시조님의 유산을요.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가 기회겠습니까?"
* * *
원소학파의 마법은 신을 매개할 수 없으므로 위력이 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에서, 원소학파의 마법은 아주 일상적이면서도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삶을 지탱하는 것은 대개 파괴가 아닌 생산이기 때문이다. 야스와다의 신관도, 나우파나의 염동술사도 작물에 물을 주고 온도를 맞추지는 못했다. 그것은 오로지 원소학파 마법사들의 몫이었다.
다행히도 제국에서 경작지를 관리한 이들은 태반이 인간이었다. 대전쟁이 끝난 이후 타일라프람과 세카두 사이의 대평야는 거대한 농업 지대로 변했고, 농업―마학의 선구자들이 그곳을 일구었다(차원 생쥐들은 이스트리아에 포드주의와 플랜테이션 농업의 미덕을 이식했다).
그들이 기르려 했던 것은 곡식과 채소뿐만이 아니었다. 연금술용 마력초 재배는 모두의 야망이었던 것이다. 적절한 토양을 알아내고 그 성장환경을 모사할 수만 있다면, 인공재배에 성공한다면 산업은 한 차례 도약을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대평야에서 마력초를 기르고 로야페타의 공장이 치유 물약을 찍어내는 시대가 온 것이다. 희석 비율과(마력초 재배에는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고, 단가를 맞추기 위해서는 물을 타야 했다) 숙성 기간 등의 문제로 효능은 낮았지만, 대량생산의 본질은 언제나 수량에 있다. 품질이 아니라.
그렇다고 해서 중소규모 공방의 명맥이 끊긴 것은 아니다. 기성복이 잘 팔린다고 해서 명품 회사들이 폐업할 일은 없으니까. 자연산 원료와 충분한 숙성 기간, 그리고 고객 맞춤형 배합 비율이 그들의 무기가 되었다. 다종다양한 반응식 목록까지도.
이러한 공방에서 만들어내는 농축액은 제대로 보관한다면 세월이 지나더라도 그 효력을 잃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강력해지기도 한다. 고순도 용액은 주위의 마력을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30년 이상의 숙성을 거친 물약 원액은 영약이라 불리며, 미숙성 희석액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격에 팔려나간다. 그게 사치라 믿는 사람도 많지만 거기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 빈티지 와인과 맥주의 값이 같지 않듯이.
* * *
탈리스커는 금고 문을 열기 전에 란드와르의 숙소로 향했다. 함께 둘러보실 의향이 있는지 묻기 위해서였다. 란드와르는 선뜻 따라나섰고(울적한 기분과 아이템 파밍은 별개였다), 이제는 15평 남짓한 공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오른편의 진열대에 늘어선 것은 한 세기 이상 숙성된 영약들. 왼편의 유리장에는 갖가지 형태의 마력 증폭구가 진열되어 있다. 탈리스커가 출입구 바로 옆의 단추를 누르자 맞은편의 특수 금고가 일시에 열렸다.
각인 물품이 보관된 금고의 각 칸은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켰다. 수많은 시대를 재료로 짜낸 모자이크화다. 알세스트와 셀리멘이 쓰던 배낭에서부터 바로 재작년에 만들어진 환영 기록기까지, 수많은 유물과 걸작이 여기에서 쉬고 있는 것이다.
이 장소의 정확한 명칭은 노르덴홀즈 비밀 금고. 노인들 앞에서 어울리지도 않는 신 행세를 하려니 고역이었지만 공연료가 금고 입장권이라면 감지덕지다.
"분부하신 대로, 저는 나가 있겠습니다. 이중에서 당신께서 원하는 게 있기를 간원합니다."
탈리스커는 정중히 인사하고는 자리를 떴다. 마법사 버전의 파르타가 사라지니 마음이 편했다. 란드와르는 다른 둘에게로 주의를 옮겼다. 요정 녀석이나 로안이나 들뜬 게 눈에 보였다.
"저도 이런 곳이 있다고 이야기만 들었는데, 직접 들어오는 건 처음입니다! 여기에 있는 물건들을 쓰려면 허락을 받아야 하거든요. 성년식도 안 치른 어린애에게 넘겨줄 것들은 아니니까요. 아즈리온 님, 아니지, 삼촌 덕분에 좋은 경험을 하게 됐어요."
"좋은 경험이라니, 네가 쓸 건데. 마력 증폭구부터 보고 있어라."
요정과 달리 인간이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증폭구를 착용해야만 했다. 영혼이 마력과 반응할 수 있도록 교두보를 놓는, 특별한 종류의 각인 물품이었다.
대부분의 마법사는 기성품을 썼지만 여기에도 명품의 논리가 적용됐다. 영혼이 마력에 반응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듯이, 증폭구의 효과도 천지차이였던 것이다. 특정 갈래만을 증폭시켜 파괴력을 높이는 것이 있는가 하면 제어력을 증강시키는 것도 있다.
유리장에 보관된 것은 모두가 그런 주문제작품이었다. 성능이 너무 좋은 탓에 버려졌다고도 할 수 있겠다. 망가뜨리면 안 된다는 강박이 너무 큰 탓에, 원로들조차도 어지간하면 꺼내질 않았던 것이다. 부적도, 목걸이도, 반지도… 건물을 철거하고 대평야에 비를 뿌릴 때에나 겨우 햇빛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란드와르는 그토록 귀한 물건을 로안한테 끼우고 나우파나 폐허로 갈 예정이었다. 만약 박살이 나면? 그것도 운명이려니 할 일이었다. 뭐가 어쨌건 세상이 무너지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최대한 종류 다양하게 챙겨. 직접 껴 보면서 맞는지 안 맞는지 확인도 해 보고."
"예!"
로안은 우렁차게 외치고는 테네브로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사도님도 마법을 다룬다고 하셨죠? 함께 살펴보셔도 좋을 겁니다. 지금 쓰시는 것보다 좋을 거라고 장담하진 못하겠지만, 내놓기에 부끄러울 물건들은 아니거든요."
해맑은 목소리를 듣자니 미묘한 두통이 엄습했다. 요정에게는 마력 증폭구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혈액 자체가 강력한 증폭구 역할을 하니까. 하지만 로안은 이 새끼를 열네 살짜리 인간으로만 알고 있었다.
지금이 바로 진실을 밝힐 때였다.
"로안아."
"예, 예!"
"저거 인간 아니다. 요정이야."
"예?"
로안이 멍청한 표정으로 테네브로즈를 바라보았다. 놈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예상했다는 듯 환술을 풀었다. 쥐를 닮은 갈색 머리 소년이 한순간에 사라지고는 은발의 요정이 남았다.
"나으리께서는 그걸 벌써 밝히십니까."
"나이는 먹을 대로 먹은 놈이 그게 대체 무슨 짓이냐. 정신 좀 차리고 살아라."
"재미있지 않습니까. 울쿠스의 반응도 꽤 볼만했다고 생각하는데요."
눈웃음을 치고 있는 꼬라지가 역겹고 가증스러웠다. 란드와르는 흡연욕구를 억누르며 대신 소개에 나섰다. 요정에게 자기소개를 맡겨 봤자 헛소리만 늘어놓을 게 뻔했다.
"저 요정 말이다, 야스와다에서 부제사장까지 한 놈이거든. 지금은 배신하고 나와서 우리 일 돕는 중이고. 그런데 머리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
"초면에 첫인상 나빠질 말은 삼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넌 나빠질 첫인상이 있다고 생각하냐?"
으르렁거린 란드와르는 설명을 이어갔다. 테네브로즈가 병신이라는 것.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마법 실력도 있고 요정에 대해 아는 것도 많으니만큼 데리고 다닐 수밖에 없다는 것. 요정에 대한 거부감이 있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성격이 문제가 되겠지만… 아무튼 적응해야 한다는 것.
로안은 둘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더듬거리며 운을 뗐다.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되나 싶지만… 요정은 다 사악한 족속인 줄 알았습니다!"
"사악해."
"전 착한데요."
상반되는 진술이 동시에 던져졌다. 둘 다 어느 정도는 옳고 어느 정도는 틀린 말이었다. 충격 속에 굳어 있던 로안은 겨우 입을 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사도님의 성격이 독특하다는 건 알겠어요. 삼촌께서 선택하셨으니 믿어도 되는 분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한참은 많으실 텐데, 말씀 편하게 해 주십시오."
"그래, 먼저 말해 주니 고맙군. 내가 일찍 혼례를 올렸더라면 그대 나이의 손자가 있을지도 모르거든. 성년식을 치르자마자 반려를 맞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하여간 이 새끼가 남한테 멀쩡한 척 반말을 하는 걸 들으면 귀가 썩었다. 란드와르는 마법사끼리 잘 어울려 보라고 말한 뒤 귀를 닫았고, 특수 금고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반드시 챙길 물건이 하나 있었다.
<알세스트의 배낭 말씀이시군요.>
헤이딘이 저택의 오른쪽 가장자리 방을 거처로 삼은 것처럼, 배낭에도 똑같은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배낭의 안쪽을 슈문의 영토에 연결하는 각인이. 영토를 빌려준 요정이 죽으면서 이공간 보관함은 가죽 뭉치가 되고 말았지만 다시 쓸 방법은 있었다.
<다만 헤이딘이 배낭에 영토를 연결한다면 세카두 저택에는 있지 못하게 될 겁니다. 벨레다와 이야기를 나눌 방법이 없어진다는 이야기지요. 통로는 두 개만 만들 수 있으니까요. 하나는 반지에 고정되어 있고…….>
어차피 벨레다랑 연락을 하고 지낼 일은 없지 않습니까. 강의야 그 애가 더 잘할 테고.
<가구를 미리 빼 두셔야 할 겁니다. 그게 요점이에요.>
잘 생각해보니 그랬다. 물약을 찾으려 손을 넣었다가 생뚱맞게 의자를 쥐게 되면 귀찮을 테니까. 란드와르는 융단과 안락의자와 서가가 있는 아늑한 방을 떠올렸고, 거기에 들어갔을 정성을 가늠해 보았고, 마음속으로 애도를 표했다.
이런 일로 인테리어를 갈아엎게 되어서 미안합니다. 부디 일 년만 참아 주십시오.
묵상은 짧았고 행동은 빨랐다. 란드와르는 일단 배낭을 챙기고서는 다른 칸도 훑기 시작했다. 보물 목록도, 효과도 모두 알고 있다. 꺼내기만 하면 된다.
이윽고 열두 시간마다 재충전되는 마법의 포도주 병이 시야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