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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27화 (128/258)

127화 엄청난 비밀도 진실도 없다 (4)

저승으로 떠난 다섯 신은 늑대의 선물과 함께 세계로 돌아왔다.

그러나 땅과 강을 잠재운 뒤에는 그 주인이 문제가 되었다. 가장 드높은 신을 정하기 위해, 각 지파의 요정은 서로에게 칼을 겨누었고 주문을 읊었다.

전쟁은 실로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신들은 차츰 자신의 힘에 익숙해졌으며 수많은 주문과 각인이 개발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윰 시밀은 역병을 다스리고 퍼뜨리는 방법을 완전히 깨닫게 되었다.

이시 첼의 괴수들은 썩어 문드러졌다. 역병에는 이시 타브가 먹어 치울 영혼이 없었으며 아 드지즈의 힘조차 그것을 멈추지 못했다. 그리하여 윰 시밀은 신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는 다른 셋의 충성을 보기 위해 각 지파에서 가장 귀중한 것을 요구했다. 이시 첼과 이시 타브는 왕홀을 장식할 꿈 조각을 바쳤으나 아 드지즈는 반발했다.

윰 시밀은 격분하여 그의 심장을 뜯어내 저승에 내던졌다. 소란스러운 울림에 늑대의 아홉 머리 중 둘이 꿈에서 깨어났고, 세계가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  *  *

란드와르가 묵상에 잠겨 있거나 말거나, 테네브로즈는 소피아가 가져온 사탕이 마음에 들었다. 수정 구슬은 얻지 못했지만 부수입이 꽤나 쏠쏠했다.

마법은 몰라도 제과에 있어서만큼은 인간들이 요정을 압도하는 듯했다. 야스와다에는 왜 맛있는 간식이 없는지가 의문이었다. 대전쟁 때 제과 기능사들이 모두 제물로 바쳐진 탓일까, 아니면 원래부터 관심이 없었던 걸까?

<참으로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구나.>

솔로틀의 일갈이 의식의 흐름을 끊고 들어왔다. 성물을 눈앞에 두고서도 손에 쥐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는 투였다. 아쉽다? 그것보다는 훨씬 깊은 감정이겠다. 야스와다에 있을 때부터 탐내 오던 물건이었으니까. 사이라크 남매의 습격이 너무 급작스러웠던 탓에, 미처 챙기지 못하고 도망쳤을 뿐이다.

아무튼 자신의 잘못은 아니었다. 테네브로즈가 판단하기로는 그랬다.

청지기님의 불만은 이해합니다만 저한테 짜증을 내실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다른 생각을 한다고 해서 바뀔 것도 없고요. 우리 나으리께서 저를 아무리 믿으신다 쳐도 이래서야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이방인들이 뭔가 말을 얹은 모양인데요.

<들키지 않게 훔쳐낼 궁리를 해야지!>

들키지 않다뇨,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아즈리온의 성흔까지 받은 사도인데요. 요컨대 제가 보고 듣는 건 모두 이방인들에게로 흘러간단 말입니다. 오른손이 훔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할 수는 있지만 머리가 모르게 할 수는 없지요.

<됐다.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어린애 간식이나 먹으면서 즐거워 하거라.>

테네브로즈는 의식의 연결이 끊기는 걸 느꼈고, 만족스러운 기분 속에서 생각했다. 훌륭한 판단이십니다, 청지기님. 항상 저와는 무슨 이야기가 안 된다고 투덜거리시면서 번번이 대화를 시도하는 것만큼 비이성적인 일은 없지요. 말상대가 필요하시다면 제 나머지 절반과 떠들어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 녀석은 항상 울고만 있을 테니 그것도 어려우려나요?

그나저나 지금쯤이면 그 늙은이도 가보가 사라진 걸 눈치 챘을 텐데요, 제가 야스와다에 없는 게 아쉬울 뿐입니다. 옆에 있었더라면 신경을 잔뜩 긁어 드렸을 텐데…….

*  *  *

은빛매의 지지 또한 있었지만, 나트람이 의회의 일원으로 발돋움하게 된 데에는 수정 구슬의 역할이 컸다. 어디에든 잠입할 수 있는 것은 큰 이점이었던 것이다. 비록 그 대가가 사용자의 영혼일지라도.

목숨 둘은 구슬을 깨우는 매개일 뿐이다. 실제로 값을 치르는 것은 사용자였다. 구슬에 담긴 힘을 불러낼 때마다 영혼은 저승에 가까워졌다. 너무 자주, 많이 썼다가는 현계와 저승의 틈새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나트람의 영혼은 오래전에 한계에 이르렀다. 한 번 더, 구슬 속의 존재를 불러냈다가는 그대로 삶을 빼앗길 만큼. 따라서 수정구슬은 오래도록 서재의 작은 금고에 갇혀 있었다.

구슬은 때때로, 금고 밖으로 나와 목숨을 취했지만 곧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기실 나트람의 세 자식 중 수정 구슬의 사용법을 아는 이는 메기도뿐이었다. 그런 물건을 맡기기에 사이라크와 네르갈은 너무 야심만만했기 때문이다…….

"사이라크에게 서재 열쇠를 넘겨주었단 말이지."

나트람은 천천히 운을 뗐다. 생각에 잠긴 듯 가늘게 뜬 눈을 제외하면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고, 무릎에 오른 칼린카는 노인의 손길 아래 기분 좋은 울음소리마저 내고 있었다. 그러나 집사장과 그 옆에 선 하인은 긴장 속에서 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들은 주인의 성미를 잘 알았고, 자신이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도 깨닫고 있었다.

"아가씨께서 떠나시기 전날 밤의 일입니다. 서재에 급히 볼 일이 있다고 하셔서 열쇠를 잠시 넘겨드렸습니다. 이유를 여쭈니 의회의 일 때문이라 제가 감히 의문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발설하여서도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 하였습니다."

집사장의 목소리는 억양이 없고 침착했지만 겁먹은 기색을 모두 감추진 못했다. 나트람은 여전히 칼린카를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네 주인이 누구더냐?"

"저는 별불꽃의 집사장입니다."

가주의 시선이 그제야 집사장에게로 향했다. 두 요정의 표정이 더한 공포로 물들었다.

"다시 말하거라!"

"저는… 저는 당신을 섬깁니다."

"내가 네게 그런 판단을 허락했느냐?"

"아닙니다. 감히 영혼으로도 갚지 못할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집사장의 옆에 서 있던 하인은 노호 사이에 섞여 들리는 울림을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굵은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듯한 울림이었다. 칼린카가 눈을 까뒤집는 동시에 나트람의 손에서 보랏빛 마력 갈래가 뻗어 나오더니 집사장을 움켜쥐었다.

"은빛매의 주인에게 볼 일이 있다. 치우거라!"

단말마조차 없는 죽음이었다. 나트람은 칼린카의 시체를 죽은 요정 옆에 내던지고서는 일어섰다. 하인은 그가 떠난 뒤로도 한참이나 멈춰 있다가, 가까스로 주검을 등에 업었다.

*  *  *

한때 피로 물들었던 3교구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희생 의식을 주관했던 신관들은 모두 학살당했지만 교구에 소속된 신관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요정들은 언제나처럼 회당을 오갔으며 갖가지 용도의 희생 의식과 마법이 계속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중앙 전당의 차원 균열이었다.

대전쟁 당시, 이시 타브는 치명상을 입고 이면 세계에 갇히게 되었다. 와그다스의 신관들은 오랜 준비 끝에 소생 계획에 착수했다. 계획의 목적은 이시 타브를 깨우고 그녀가 현계로 나올 수 있게끔 하는 것. 타마기스의 성물과 수백의 영혼을 제물로 삼아, 이면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를 연 것이다.

테네브로즈 일당이 제물을 바치던 신관들을 모두 죽이기야 했으나 의식을 막지는 못했다. 열리는 속도가 늦어졌을 뿐이지, 차원 균열을 다시 닫을 방법은 없었던 것이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멈추기에는 균열 자체의 힘이 너무나도 컸다.

"…감탄스럽군요."

나트람은 마냥 기껍지만은 않은 표정으로 균열을 바라보았다. 흐르는 듯한 보랏빛 마력이 타원형의 테가 되어 암흑을 감싸고 있었다. 일드얀은 균열 안으로 손끝을 밀어 넣고는 어둠이 살덩어리를 삼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의회에서도 보고가 올라왔듯이, 모든 게 순조로이 진행되고 있다네. 자네도 균열에 손을 담가 보게나. 그분께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올 테니."

나트람은 그대로 했고, 선득한 속삭임이 뇌리를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명확히 들리진 않았지만 무슨 뜻을 전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늙은 요정의 목소리가 그 위에 겹쳐 들렸다.

"아직은 온전한 상태가 아니야. 하지만 여섯 달, 늦어도 한 해면 스스로 바깥으로 나오실 수 있지. 인간들이 무엇을 꾸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전까지 시간을 벌어 두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자네도 알 걸세. 무엇보다도 그 배신자와 제일 오래 지내지 않았는가?"

"그놈에 대해서는 아는 게 많지 않습니다."

"어둠달의 주인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더군. 제 자식인데도 말이야… 내가 자네를 오해하는 게 아니길 바라네."

나트람은 균열에서 손을 빼냈다. 테네브로즈의 이름이 화두에 오를 때마다 그는 일드얀의 목을 꺾어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어쩌면 진작 그랬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죽음이 머지않았으리라 믿은 지 오래였으나 세월은 그의 기대를 번번이 배반했다.

은빛매의 번견이 된 후로 수십 해가 지났다. 그동안 쉭겐은 수석 별점술사의 지위에 올랐고, 나트람 또한 노년기에 접어들었지만, 일드얀은 아직 죽을 기미가 없었다. 외견 역시 정치적 동맹을 제안한 날로부터 변한 게 없어서, 누군가 보았더라면 둘을 오누이로 착각할 정도였다. 실제로는 거의 한 세대 이상의 나이차이가 났는데도.

"내가 어둠달의 첩자라고 의심하는군요."

"모든 요정에게는 영혼의 주인이 있지… 아주 냉혹하고, 대범하고, 잔인한 이조차도. 말해 보게나. 자네는 누구를 따르지? 자네의 진짜 주인은 누구인가? 혈족인가, 다른 가문에 숨겨둔 연인인가, 아니면 인간들의 신인가?"

"별불꽃과 은빛매는 깊은 동맹입니다."

"자네가 내게 바치는 충성이 그다지 깊지 않다는 건 스스로도 알고 있어. 그러나 이번만은 솔직히 이야기하자는 것이지. 오래도록 길러온 칼린카가 다른 이의 것이었다면 애석하지 않겠나."

일드얀과 눈이 마주치는 동시에 불쾌한 감각이 두개골 안쪽을 헤집었다. 나트람은 의식을 한 점으로 모아 주문에 저항했다. 마법진도, 제물도 없이 시전되었으므로 여기에서 대답을 들으려는 작정은 아닐 것이다.

"많은 일을 하면서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다른 길을 택한다면 은빛매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나트람은 적개심 어린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일드얀의 주름진 얼굴이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을 갖췄다.

"협박인가, 배반인가?"

"질문에 대한 답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언제든 그럴 수 있지만 아직은 그러지 않았다는 게 내 입장이죠."

시선이 꿰뚫을 듯 번뜩였다. 이윽고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위태로운 정적을 깨고 나왔다.

"나는 자네가 마음에 들어. 내 젊을 적을 보는 것 같거든. 이제는 서로 늙어버렸지만."

그 지점에서 대화의 주제는 다시, 이시 타브에 대한 것으로 변했다. 그러나 나트람의 의식은 여전히 일드얀이 던져놓은 물음표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그건 스스로도 수없이 던져온 질문이기도 했다. 소년 시절에, 그토록 바랐던 게 무엇이었던가? 동생을 별채에 가뒀을 때에는? 그래서 무엇을 얻었지?

자신이 염원하는 것이 영예와 권력이라고 믿던 시절도 있었다. 완전히 거짓인 문장은 아닐 것이다. 그는 의회의 한 자리를, 가주 직분을, 그 직함 아래 얻게 된 모든 것을 사랑했다.

그러나 목적지에 도달할 때마다 갈망은 다른 곳으로 뻗어 나갔다. 욕망이라고 착각했던 것들은 권태로 변한 지 오래였고 다른 곳이 될 여백은 아주 적었다.

이제는 깨어난 신이건 도시의 명운이건 딱히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삶 그 자체마저도. 처음부터 그랬는지도 모른다… 살아 있기를 절실히 원했던 적은 없다. 기나긴 생의 이유는 오로지 하나. 승리에는 죽음이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삶에서 일말의 찬란함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아주 오래된 열광일 터였다. 그래, 헤이딘의 영혼을 완전히 부수고, 쉭겐과 일드얀의 피를 보고, 몇 명의 목숨을 더 거둘 수만 있다면…….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

"아닙니다."

일드얀은 보통의 요정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살았다. 그 끝이 어디일지는 아는 이가 없다. 그러니 나트람은 자신이 그녀의 종착지가 되어도 좋으리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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