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엄청난 비밀도 진실도 없다 (3)
십 분쯤이 지나자마자 달갑지 않은 얼굴이 기념관을 가득 메웠다. 최연장자일 법한 어르신이 가장 앞으로 나와 고개를 조아렸다. 한국인 특유의 노인공경 정신이 가슴팍에서 꿈틀거렸다. 아니, 그냥 짜증인가?
"감히 존귀하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란드와르는 얼굴이 일그러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생각이 그대로 표정에 드러났다가는 모여든 노인 중 절반은 심부전으로 쓰러질 듯했기 때문이다. 이런 씨발, 끝까지 알아보지 못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요.
정보사에게 의전을 생략하라고, 지나가는 평사제 보듯 대하라고 명령을 내렸던 기억이 났다. 돌이켜보면 애걸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제발 특별대우를 하지 말라고 빌었던 것이다. 기껏해야 판교에서 IOT 스타트업을 하다가 망한 게 다인데 대접은 무슨 재벌가 회장처럼 받고 있었다.
아무튼 정보사 사제들은 말을 잘 들었고, 란드와르가 술병을 낀 채 돌아다녀도 그러려니 하는 마음가짐을 배양했다. 세카두가 그리웠다. 전원주택은 넓은 마당을 꼈고, 공놀이를 할 사모예드도 있는데다가, 시내에 나가면 술친구까지 만날 수 있다.
고향의 미덕이란 그런 것이다. 거기에는 초라하지만 변함없는 평안이 있다. 시간을 굳혀 만든 듯한 붉은 벽돌길과 꾸밈없는 건물들이. 영혼이 몸을 살짝 빠져나가더니 세카두로 가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세카두를 정신적 고향으로 삼는 것도 좋지만, 뭐라도 대답을 해 주셔야겠는데요. 추천 드리는 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티아의 속삭임에 란드와르는 정신을 차렸다. 셀리멘과 알세스트의 먼 후손들이 그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려움과 경배가 절반씩 섞인 표정으로. 마법사가 비록 마흐트를 섬길지라도… 아즈리온은 인류의 구세주였다.
* * *
티아의 서포트 덕분에 귀찮은 짓은 예상보다 수월하게 끝났다. 눈을 반짝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상대로 옛이야기를 해 주고 가문 칭찬을 해 주려니 고역이었지만, 경로당에 봉사를 왔을 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마음가짐은 많은 것을 돕는다.
어쨌거나 노르덴홀즈 원로들을 함구시켰고 앞으로의 계획도 대강이나마 설명했다. 로안을 이끌고 나우파나 폐허로 향할 거라고. 그곳의 광기를 정화하는 데에 소년의 재능이 도움이 될 거라고…….
그러자 원로들은 저들끼리 논의할 시간을 청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는 몰라도 일단 자리를 파할 수 있다니 고마운 일이었다. 탈리스커만 자리에 남아 안내역을 맡았다. 아까 전까지는 돌아가 달라던 사람을 길잡이로 세우자니 기분이 묘했다.
탈리스커는 란드와르를 귀빈 숙소로 안내했다. 소피아를 대기시켜 둘 테니 불편한 점이 있으면 뭐든 말하라는 당부와 함께. 그제야 요정 녀석에게 괜스레 짜증을 냈던 게 다시 떠올랐다. 녀석이 뭔가 물으려 했다는 것까지도.
"야, 사제야. 너 뭐 물어볼 거 있다지 않았냐."
"개소리 하면 죽이신다지 않았습니까. 입이나 다물고 있을 생각입니다."
이건 또 새로운 패턴이었다. 팔다리가 잘려도 멀쩡하던 놈이 왜 갑자기 상처받은 척을 하나 의문이었지만 일단은 맞춰 주기로 했다.
"내가 미안해."
"됐습니다."
단단히 심사가 뒤틀린 투였다. 대책을 궁구하던 란드와르는 바깥으로 나가 소피아를 찾았고, 사탕을 부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피아가 유리단지로 가득 찬 손수레를 밀고 들어왔다. 꺼내는 것만도 한나절일 듯했다.
각각의 단지에는 혀 위에 올려놓자마자 눈처럼 녹는 것에서부터 이도 안 들어갈 만큼 단단해서 굴려 먹어야 하는 것까지 가지각색의 간식이 들어 있었다. 옮기는 걸 도우려 하자 소피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왕이 직접 잔디를 깎는 모습을 본 정원사를 연상시킨다.
"제가 할게요! 교단에서도 엄청 높은 분이시라고 들었는데……."
"별거 아닙니다. 비켜 봐요."
어쨌거나 소피아가 돌아가자마자 란드와르는 요정 놈에게 화해의 제스쳐를 취했다. 막말을 한 건 미안하니 사탕이나 먹고 풀라고. 테네브로즈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단지들을 살피다가 말랑말랑한 막대사탕을 꺼내 입에 물었다. 시건방진 문장 몇 줄이 뒤를 이었다.
"나으리께서는 제가 열네 살도 아니고 네 살로 보이시나 봅니다만, 이런 주전부리로 제 기분이 풀릴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십니다."
분명히 자신은 신이고 이 새끼는 따까리인데 어쩐지 입장이 뒤바뀐 것 같았다. 사탕을 안겨준 게 역효과였나? 정말로 그럴지도 몰랐다. 사람은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다고들 하니까. 그렇다고 해서 괜히 짜증을 낸 게 잘 한 짓이란 이야기는 아니고.
"그러면 원하는 게 뭐야."
"수정 구슬을 제가 맡고 싶은데요. 우리 아가씨에게서 얻어낸 물건 말입니다."
이번에는 칼같이 대답이 나왔다. 삐진 척 한 건 연기고 이게 본론이었던 모양이다.
"왜."
"목숨을 매개로 하는 성물이니 제 주문과 궁합이 맞지요. 활용할 방안이 있을 겁니다."
장비 욕심을 부리는 것이라 쳐도 꽤나 솔깃한 제안이었다. 어차피 수정 구슬의 용도는 잠입이니까 평소에는 딱히 쓸모가 없다. 그렇다면 요정 녀석한테 줘도…….
<이론적으로는 옳은 이야기입니다만, 성물은 마력 흐름에 변수를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 원리를 활용할 속셈이겠지요. 별자리가 더 꼬이는 걸 원하신다면 넘겨주셔도 괜찮겠습니다만.>
낙관적인 전망이 산산이 부서지는 동시에 피가 얼어붙었다. 란드와르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 돼."
"이유가 뭡니까."
"니가 그거 쓰고 다니면 별자리가 뒤틀린다는데."
테네브로즈는 란드와르를 빤히 바라보다가 낙담한 투로 중얼거렸다. 김샜다는 표정이 얼굴에 완연했다.
"나으리께서는 아는 게 없으시면서 왜 이럴 때에만 박식하십니까?"
"이 새끼가 말을 진짜 막 하네."
란드와르는 혀를 쯧 차고서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수평으로 기운 시야에 요정 놈이 단지를 여닫으며 하나씩 시식해보는 모습이 보였다. 저걸 옆에 두고 있는 자신이 보살이었다. 란드와르는 차가운 분노를 이성으로 전환했다.
"아무튼, 물어볼 게 뭐냐."
"제가 뭘 물어봤습니까?"
"질문 있다고 그랬잖아. 그 노친네들 들이닥치기 전에."
"아, 예. 다음 행선지가 폐허라는 건 알겠는데, 나으리께서 설명을 너무 대강 하셨다 싶어서 그럽니다. 기억 조각이라는 게 어떤 식으로 모이는지가 궁금한데요."
짧은 침묵이 있더니 뭔가 우물거리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란드와르는 요정의 유아적 취향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테네브로즈는 충분히 병신이었다.
"같은 조각들끼리 붙여 놓으면 하나가 다른 하나를 흡수하거든. 데리고 다니면서 계속 먹이면 되는 거야."
기억 조각들은 임시 동료 판정을 받았다. 직접적인 명령은 제한되어 있고 제대로 된 대화도 불가능하지만 한 번 기억을 택하면 그 조각은 계속 플레이어 일행을 따라왔다. 전투를 돕는 건 덤이다.
"그러면 셋 중에서 누굴 데리고 다닙니까?"
"제일 처음 만나는 거."
플레이어에게는 선택권이 많지 않았다. 기억 조각과 동행해야만 폐허의 광기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으로 만난 기억이 마음에 안 든다면 다른 걸 찾아 나설 수도 있지만, 그랬다가는 광기 디버프가 쌓여서 전멸할 공산이 컸다.
"셀리멘과 동행할 수도 있다는 소리처럼 들리는데요."
"처럼 들리는 게 아니라 그게 맞아."
"로안이 진실을 알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알세스트가 자기 할 일 떠넘긴 거 말이냐."
"예, 그것도 있고… 셀리멘이 수정 심장에 흡수됐다는 것부터가 인간들에게는 기밀이 아닙니까. 애당초 기억 조각을 마주치자마자 놀랄 겁니다. 그걸 처치해야 한다면 더더욱요."
"원로들 앞에선 대충 넘어가긴 했는데… 사실대로 말해야지."
"예?"
"그냥 사실대로 말한 다음 조상님 편히 눈 감게 해드리자고 할 거야."
숨기거나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솔직히 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셀리멘도 심장을 감당하지 못했는데 자신이 해낼 수 있을까 의심을 품겠지만, 뭐, 그거야 잘 설득해서 먹이면 되는 일이고.
"너는 근데 왜 갑자기 애가 세심해졌냐. 말루카에서는 흰둥이들 그냥 죽이면 안 되냐고 묻던 놈이."
"경우가 다르지 않습니까. 저항군을 죽이는 것이야 일을 빠르게 끝마칠 방법이었으니 그렇게 말씀드린 것이고, 지금은 꼬마애의 마음이 중요하니까 그 점을 계산에 넣자는 겁니다."
옳은 말이었다. 옳은 말인데, 아까 전까지 미친 짓을 하던 놈이 해서 그런지 낯설게 들렸다. 테네브로즈는 짧은 침묵을 두고 화두 하나를 더했다.
"…그리고 유령 늙은이도 있으니까요."
"왜, 메기도 때문에?"
"그렇지요. 심장에 남은 기억 파편이 어떤 내용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만, 어쩌면 제 삼촌을 알아볼지도 모르니까요."
"가능성은 있지. 그런데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잖아."
메기도는 학대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고 헤이딘은 감금당한 트라우마 때문에 기억이 깡그리 날아가 있었다. 둘 다 비극이라고는 생각했으나 남이 도울 만한 문제는 아니었다. 이제 와서, 기억 몇 조각을 되찾고 과거를 발견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것까지도 비극이었다.
"만약 헤이딘이 기억을 찾는다고 쳐도… 그거는 사실 당연한 일인 거지. 자기가 왜 그렇게 됐는지는 알고 있어야 할 테니까."
"알아야 합니까?"
"그러면 평생 모른 채로 살아도 된다는 거냐."
"모를 수만 있다면 고통은 모른 채로 남겨두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겪기로는 그랬습니다."
"그러냐."
란드와르는 테네브로즈를 빤히 바라보다가 가까스로 한 문장을 떨어트렸다. 스스로 듣기에는 절박한 느낌마저 있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시무룩한 수긍이, 다시 한 번.
"그건 그렇지."
녀석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강현도 알았다. 정신을 지탱하려면 교통사고를, 그 이후의 몇 달을 잊어야 했다.
강현은 완결된 고통을 생각했다. 책임을 따질 상대도, 과오를 번복할 방법도 없이 상처로만 남은 일들에 대해서. 한순간의 악몽으로도 사람은 처참하게 망가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헤이딘의 수십 해는 어떤 의미였을까. 벨레다를 거두기 전까지의 시간들은…….
헤이딘과 벨레다가 보조 시나리오의 우두머리일 뿐이었다는 사실이 기묘하게만 느껴졌다. 그게 역설극인지 비극인지조차 분류할 수 없을 만큼. 머릿속의 잡음을 떨쳐내려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고, 강현은 한동안 멈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