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엄청난 비밀도 진실도 없다 (2)
탈리스커가 충격으로부터 빠져나오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는 다른 가문 성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할 테니 일단은 쉬고 계시라는 말과 함께 응접실을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문 원로라는 인간들이 몰려와서 로안을 어딘가로 데려갔다. 바야흐로 자유였다.
란드와르는 하인의 안내를 받아 관광을 위해 대전쟁 기념관으로 향했다.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부터가 마음에 들었다. 단체로, 관람 신청이 들어오는 게 아니라면 평소에는 일반인에게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어쨌든 간에. 그새 테네브로즈는 소피아와 죽이 잘 맞았는지 누나 동생 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란드와르는 기겁하면서 둘을 떼어놓았고, 하인들을 내보냈다.
"너 약간… 어린애들한테 애교 부리는 취미가 있냐?"
"없는데요."
"아니야. 있는 거 같아. 솔직히 인정하자."
"저는 그냥 아이들을 좋아하는 것뿐인데요."
"즐기는 거 맞잖아."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변태적인 취향이라도 있는 것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없어?"
의학적인 용어로 뭐라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있는 게 확실했다. 백 살쯤을 살아놓고서 애들 앞에서 아양을 떠는 건 제정신으로 할 짓은 아니다. 요정과 인간은 정신적인 나이가 다르다고 쳐도, 서른 초반. 아무튼 역겨웠다.
"순수한 사랑이지요."
"순수한 사랑 한 번만 더 하면 내가 널 죽일지도 몰라."
"정말입니까?"
"설마 진짜겠냐. 구역질 나오니까 하지 말라고."
란드와르는 진심으로 으르렁거린 뒤 기념관을 한 바퀴 훑었다. 알세스트가 썼던 지팡이에서부터 대전쟁의 한 장면까지, 볼거리가 많았다. 사실 한국에서 갔던 웬만한 전시회보다도 좋아 보였다. 란드와르는 박진감 넘치는 환영 앞에 멈췄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멋지냐."
"뱀도 상대하고 수정 거수도 처치하신 분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건 고작 환영일 뿐인데요."
"환영이라서, 내가 안 해서 멋진 거야. 직접 하면 좆같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돌리자 시야 정중앙에 노르덴홀즈 쌍둥이의 환영이 들어왔다. 아즈리온의 동료이자 직접 해 보고 좆같음을 느낀 사람들이었다.
"쟤네들도 직접 해 보고 이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고. 근데 그걸 남들한테는 못 말했던 거지. 이야기하면 까오가, 아니지, 체면이 떨어지니까. 까오는 비속어니까 쓰면 안 되지. 아무튼 그래서 후손들이 이렇게 기념관도 세워 주고 그런 거지."
"그러니 나으리께서도 말씀하지 않으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너는 내 밑바닥을 알잖아. 남들은 모르고."
짧게 투덜거린 란드와르는 알세스트와 셀리멘의 밑바닥을 생각했다. 대외적으로 셀리멘은 나우파나 전투 도중에 모두를 위해 희생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거기에는 복잡한 사정이 숨어 있다.
일단 아즈리온 일행은 아 드지즈를 처치하고 수정 심장을 얻었다. 신위는 마법사 동료에게로 넘어갈 예정이었다. 그게 바로 알세스트다. 하지만 녀석은 막대한 책임감을 떠맡기에는 마음이 약했고, 셀리멘에게 그 역할을 떠넘겼다.
진짜 불행은 셀리멘의 의지 역시 강인하지는 못했다는 데에서 왔다. 정말로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었더라면 징징거림에 넘어가지는 않았을 테니까. 아무튼, 덕분에, 수정 심장은 폭주했고… 나우파나 폐허는 천 년간 저 꼴로 남게 되었다.
이건 요정은 물론이고 인간의 역사에도 남아 있지 않은 진실이었다. 알세스트와 천계와 동료들이 합심해서 진상을 감췄던 것이다. 아무래도 자기 할 일을 남한테 미뤄서 개판을 만드는 건 영웅이 할 짓은 아니니까. 알세스트 입장에서도 최대한 숨기고 싶은 과거였으리라.
"저 환영 말이다, 많이 봐 둬라. 폐허 가면 저런 거 찾아 다녀야 하니까."
하지만 아홉 교단조차도 핵심적인 증거까지는 없애지 못했다. 피투성이 심장에 뱀의 의식이 남아 있었던 것처럼, 수정 심장에는 주인이 될 뻔했던 이들의 기억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게임이 시작되고 여섯 달이 지난 후에, 수정 심장은 <기억 조각>이라 불리는 NPC들을 방출하게 된다. 아 드지즈와, 셀리멘과, 메기도의 기억이다. 시나리오의 클리어 조건은 한 종류의 기억 조각을 모두 수집하는 것. 그리고 나머지를 파괴하는 것. 그럼으로써 심장을 안정화시키는 것.
안정화를 끝마친다면 심성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냥 감응력만 뛰어나면 된다. 로안이 셀리멘 꼴이 날 걱정은 없다는 소리다. 강해졌다고 자아도취에 빠질 스타일도 아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상황이 곤란해졌군요. 미리 애도를 표해 드리죠.>
테네브로즈가 운을 떼는 동시에 티아가 속삭였다. 란드와르는 둘 중 어디에 먼저 반응해야 할지 갈등했다. 일단 애도를 표한다느니 하는 걸 보면 심각한 문제는 아닌 모양이다. 세계의 명운을 두고 그런 농담을 던지진 않을 테니까…….
<노르덴홀즈 원로들이 란드와르의 정체를 깨달았군요. 여기로 몰려오고 있으니 미리 위엄 넘치는 표정을 연습해두시길 권합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적절한 대사가 필요하다면 직접 읊어 드릴 테니까요.>
아니다. 심각했다. 이어지는 설명에 란드와르는 이를 악물었다. 하나같이 눈치가 빨랐다. 파르타 앞에서 하던 짓을 똑같이 반복해야겠지. 인간들의 기대에 부응할 만큼 근엄하고 신중한 초월자가 되는 것이다. 장소가 장소니만큼 대전쟁 이야기도 해 주고.
이런 씨발, 서비스직이 따로 없었다.
"나으리?"
돌아오는 말이 없자 테네브로즈는 란드와르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질문은 나중에 하고, 지금 노르덴홀즈 원로들 몰려오고 있거든. 너는 옆에서 신성한 표정이나 짓고 있어. 만약 개소리 하면 죽일 거야."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으르렁댔다. 구름 사이를 맴돌던 기분이 한순간에 지하로 메다 꽂혀서 그런지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여기서 테네브로즈가 잘못한 건 전혀 없는데도 그랬다. 녀석도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얼굴이 억울한 듯 일그러졌다.
요정아, 미안하다, 나중에 사탕이나 사 줄게…….
* * *
노르덴홀즈의 원로들은 그 명성만큼이나 바빴다. 하지만 가문의 총아가 아즈리온의 조력자로 간택되었다는 소식을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다. 실험이 중단되었고 강의가 미뤄졌으며 회의가 멈췄다. 이제 학계의 거성들은 말하는 쪽이 아니라 듣는 쪽이 되어 연사에게 온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 저는 세카두에서 일곱 번째 용병 임무를 맡고 있었어요. 이번에는 기필코, 마법을 쓰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죠……."
로안은 꿈꾸는 듯한 어조로 울프 장원에서 있었던 일을 읊기 시작했다. 아즈리온 교단의 사제와 동행했다는 것. 전사가 마법을 쓰지 않는 이유를 묻기에, 아즈리온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라고 답했다는 것.
아즈리온은 마법을 꺼리는 신이었다. 그는 신도에게 무예와 살육의 축복을 내렸지만 주문을 다루는 이들에게는 냉담했다. 로안의 족쇄가 된 것 역시 이 부분이었다. 악순환이 반복됐다. 위기를 맞닥뜨릴 때마다 마법의 힘을 빌렸고, 전투가 끝난 다음에는 그만큼의 제약에 시달렸다. 몸놀림이 둔해진다거나 감응력이 떨어지는 식으로.
하지만 로안은 아즈리온을 섬기던 마검사가 몇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역경과 고난 끝에 신앙심을 증명하고 성흔을 받은 이들이었다. 그는 진심을 증명한다면 자신도 언젠가 그런 은혜를 입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임무를 끝마친 뒤, 그 분께서 제게 마지막으로 여쭤 보시더군요. 신앙을 포기할 생각이 정말로 없느냐고요.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허공에서 갑작스레 천사가 나타나면서―"
원로들 앞에서 지난 일을 설명하려니 부담감이 있기야 했지만, 자신이 앞으로의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지금은 기쁨이 더욱 컸다. 지난 몇 년간 받아 왔던 눈길은, 안쓰러움과 한심함과 복잡다단한 감정이 뒤섞인 표정들은 이제 과거로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제 자신은 아즈리온에게 선택받은 사도였다.
"…그게 바로 제가 타일라프람으로 돌아와 마법 수련에 매진한 이유입니다. 지금까지는 사실을 감추고 있었어요. 섣불리 이야기했다가는 대업이 어그러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분께서 제게 여섯 달을 주었고, 열흘 남짓이 남았으니… 이제야 말씀을 드리네요."
로안은 쑥스러움과 기쁨을 반씩 담아 말하면서, 손등에 성흔을 띄워 올렸다. 성흔을 만들어내는 방법은 눈을 살짝 감은 채, 신앙심으로 충만해지는 느낌을 곱씹는 것. 충성과 존경이 심장 한가운데에서 공명하게끔 하는 것.
차가운 불꽃이 소년의 손목을 감싸 오르더니 낫과 망치의 형상을 이루었다. 곧이어 경건한 정적이 원로들을 뒤덮었다. 그들 중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탈리스커였다.
"얘야, 그러면 혹시 너를 만나러 오신 사제분이, 혹시,―"
"그건 아녜요."
단호한 부정은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원로들은 소년이 거짓말에 별 소질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절박한 투로 다그치기 시작했다.
"사실대로 말해 줘야 한다. 너무 많은 무례를 저질렀어. 세상에, 상상도 하지 못했지 뭐냐. 우리가 시조님의 얼굴에 먹칠을 한 거야……."
란드와르의 지시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진 말라는 것. 친족 앞에서라도. 하지만 원로들의 태도로 판단하건대 의심을 면피할 방법은 없어 보였다. 로안은 잠시 갈등했다.
아즈리온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만큼 무섭고 위엄 넘치는 신이 아니었다. 무례에 얼굴을 붉히는 대신 대수롭지 않게 흘려 넘겼고, 상대가 예의를 차리면 오히려 불편함을 느꼈다. 이름 높은 영웅들보다는 세카두 서부 회당의 하급 사제를 닮았다. 접대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언짢아할 리가 없었다. 그 반대라면 모를까.
하지만 그 사실을 원로들이 납득할 것 같지는 않았다. 스스로도 모두 꿈이 아니었을까, 서부 회당을 향한 그리움이 너무 커진 탓에 헛것을 보고 만 게 아닐까 묻기 일쑤였던 것이다. 소박하고 격식 없는 신을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그 신이 주관하는 영역이 무예와 살육이라면, 당연하게도.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에요."
로안은 최대한 확언을 피했지만 원로들에게 그 말은 이렇게 들렸다: 예, 맞습니다. 그리고 당장 한 시간 뒤에는 아즈리온의 신벌이 여기에 몰아닥칠 예정이죠. 어르신들께서는 그 꼴이 나기 전에 서둘러 속죄하셔야 할 겁니다…….
탈리스커가 다급한 목소리로 란드와르의 위치를 알렸다. 대전쟁 기념관을 구경하러 갔으므로 아직은 거기에 있으리라는 거였다. 곧바로 한 떼의 노교수와 회사 중역들이 피난민처럼 전당을 빠져나갔고, 로안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