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엄청난 비밀도 진실도 없다 (1)
요정 놈은 로안이 관심을 보이자마자 울쿠스 앞에서 했던 짓을 그대로 하기 시작했다. 인간이었으면 노망이 나다 못해 관짝에 들어갔을 나이인 놈이 어린애 흉내를 내면서 아양을 떨었다는 소리였다.
"테네브로즈에요, 아직 열네 살이고요. 열일곱이라 하셨으니까 저한테는 형이겠네요."
제정신인가?
"아직 어리시군요. 교단 소속이신가요?"
"교단에 속해 있긴 하지만 체술은 배운 적이 없어요. 대신 마법에 조금 소질이 있네요. 원소학 실력은 아직 부족하지만요."
"겸손이시겠죠! 부족한 실력으로 곁에 계실 리가 없으니까요."
이 새끼를 데려온 게 후회스러웠다. 임기응변이 부족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지만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여기에서 대뜸 사실을 밝혔다가는 분위기가 묘해질 테고, 그리고…….
"사제야."
란드와르는 일단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대화가 한순간에 멎더니 시선 둘이 한순간에 자신에게로 모였다. 요정 놈은 눈치가 없는지 양심이 없는지 여전히 생글거리고 있었다.
"너는 나중에 나랑 이야기 좀 하자."
그 말까지 하고서는 몸을 일으켰다. 빨리 탈리스커를 불러서 본론을 밝히고 치워야겠다는 계산이 섰다. 최소한 요정 놈은 이 장소에서 치울 필요가 있었다.
문 바깥에는 하인 하나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소피아? 어쨌건 란드와르는 소피아에게 탈리스커를 다시 불러오게끔 했다. 들어오는 걸음은 체면을 차리려는 듯 느릿했지만 어쩔 수 없는 조급함이 느껴졌다.
하기야 태연한 척을 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긴 했다. 이 시국에, 성흔을 받은 사제가 직접 찾아오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당장 신위와 화신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진실을 밝혀야 할 것이다.
"상황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다만 그 전에… 이 녀석을 둘 데가 있겠습니까?"
란드와르는 요정 놈을 가리키고는 탈리스커와 시선을 맞췄다.
"시종 소년 말입니까? 비어 있는 응접실이 따로 있습니다만, 거기에서 기다리게끔 하면……."
"이야기가 길어질 텐데, 그동안 혼자 두면 사고를 칠 겁니다. 가능하시다면 감시할 어른을 하나 붙여 주시면 좋겠는데요."
"나으리께서는 제가 어린아이로 보이시나 봅니다."
테네브로즈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탈리스커는 녀석을 빤히 바라보다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철없게 들리는 대사가 긴장을 푸는 데에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이걸 좋아해야 하나?
"그러면 전시관에 보내 두지요. 구경거리가 많으니 아이에게는 즐거운 시간이 될 겁니다. 소피아에게 안내역을 맡기겠습니다."
게임에서, 노르덴홀즈 장원 지역은 대부분 접근 불가로 처리되어 있었다. 연구소나 테크 기업은 흥미롭기야 해도 스토리 진행과는 별 관련이 없으니까, 용량상 제외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현실이었다. 관광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전시관 중에는 대전쟁 기념관도 하나가 있습니다. 가문의 시조들부터가 아즈리온님의 동료였으니까요. 마법의 원리나 연금술에는 별 관심이 없으실 듯하니 그쪽을 추천드리죠.>
란드와르는 재빨리 계획을 세웠다. 일단 테네브로즈를 대전쟁 기념관에 보내둔 다음 탈리스커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자신도 기념관으로 가서 구경을 해 보자.
"대전쟁 기념관이 있다고 들었는데, 거기가 좋을 것 같습니다."
"예, 아이들에게는 제일 인기가 많은 곳입니다. 아무래도 마공학 기술관 같은 곳은 어려운 내용이 많으니만큼……."
"전 똑똑해서 다 이해할 수 있는데요."
"조용히 하고 그냥 가라."
어쨌든 란드와르는 사악하고 성가신 요정을 성공적으로 제거했다. 이제부터는 생산적인 논의를 할 때였다. 로안에게도 말을 해 두었으므로 탈리스커만 빠르게 납득시키면 그만이다.
권위는 설득에 힘을 준다. 대부분은 그렇다. 그 권위가 신의 것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티아 씨, 나와서 이야기 좀 해 봅시다."
란드와르는 일부러 소리 내어 불렀다. 동시에 천사의 반신이 그들 사이의 허공에 나타났다. 검정색 정장과 각진 안경테가 날카로운 인상을 주는 여성.
탈리스커는 놀란 듯 눈을 깜박였다. 마법사들이 만들어 내는 환영은 반투명한 탓에 주문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천사들은 물리력을 행사하진 못할지라도 겉보기로는 보통 사람과 완벽히 똑같았다.
"아즈리온님의 부관이 셀리멘과 알세스트의 먼 후손들에게 인사합니다."
시선 교환을 마친 티아가 인사말을 입에 올리자 탈리스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대로 굳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걸 보면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티아는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좁히고서는 란드와르의 의견을 구했다.
<항상 느끼는 점이지만, 신앙심이 너무 높아도 탈이군요. 모든 인간이 늑대인간 대장군처럼 사무적일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요.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릴까요,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저 양반이 놀랄 때마다 기다려주면 해가 질 때까지도 설명이 안 끝날 텐데요. 그대로 갑시다. 귀가 막히진 않았을 테니까.
"탈리스커, 우리는 이 땅의 관리인이자 평화의 조성자입니다. 역사가 옳은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도우며, 인간 중 뛰어난 이들에게는 영웅으로서의 소임을 맡기기도 합니다."
곧바로 티아가 운을 뗐다. 란드와르는 청중의 반응을 살폈다. 탈리스커는 정지 상태를 유지하고 있고, 로안은 뿌듯한 기색이 얼굴을 뚫고 나오려 하고 있었다.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는 건 집안 내력인가?
"…나의 주인께서 로안 노르덴홀즈의 재능과 신심을 높이 사셨음을 밝힙니다."
티아는 거기까지 말하고서는 일단 멈췄다. 심장이 백 번쯤은 뛸 만큼의 침묵이 지나가더니 탈리스커가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엽이 고장난 탓에 오작동을 일으키는 기계인형처럼 보였다.
"예, 예! 예!"
"탈리스커, 침착하십시오. 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나는 놀랍고 기쁜 소식이 아니라 환란과 위기를 전하러 왔기 때문입니다. 로안 노르덴홀즈는 뛰어난 마법사이자 아즈리온의 성흔을 받은 사도로서 그 환란에 맞서 싸울 것입니다."
관광 큐레이션을 해 주던 순간을 기억에서 몰아낼 만큼 경건하고 엄숙한 목소리였다. 늑대인간 대장군들에게 설명을 할 때에도 한 번 불러내기야 했지만 이런 면모를 보니 낯설었다. 하기야 사찰과 도감청을 일삼고 남 생각에 끼어들어서 핀잔을 주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면야 교단은 존속할 수가 없을 터였다.
"예!"
하지만 티아가 훌륭한 고위천사인 것과는 별개로 탈리스커는 예, 예, 하는 소리만을 연발하고 있었다. 반쯤 정신이 나간 모양새였다. 란드와르는 무언가 방법이 있을까 싶어 로안을 빤히 보았다. 녀석은 시선을 알아채고서는 환한 웃음으로 답했다.
아니, 이 새끼야, 웃을 게 아니라 니 삼촌 좀 어떻게 해 봐라…….
* * *
란드와르가 예상치 못한 반응으로 골머리를 앓는 동안 테네브로즈는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소피아는 스물 하나인데 성년이 되고부터 노르덴홀즈 본가에서 하인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3년차인 셈이었다. 쉽게 얻을 수 있는 일자리가 아닌데 운이 좋았다고도.
거기까지 이야기를 듣자 테네브로즈에게로 차례가 넘어왔다. 바야흐로 자기소개의 시간이었다.
"타일라프람에는 처음 와본 거죠?"
"네, 지금까지는 세카두에서만 지냈거든요."
그 대답을 듣자마자 소피아의 얼굴에 괜스레 뿌듯한 표정이 일었다. 부모님의 자랑거리가 자신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열 살짜리 꼬마처럼 보였다.
"여기 말예요, 세카두랑은 완전히 다르죠? 타일라프람에 있으면 다른 도시들은 잘 안 가게 돼요.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들은 모두 여기에 모여 있거든요.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지만, 다른 곳에 다녀오면 시간여행을 한 느낌이에요. 백 년쯤 전의 과거를 들여다본 것만 같죠."
테네브로즈는 호들갑을 떠는 소피아에게 그저 웃어 주었다. 인간들의 기술이 어떤 형태로 발전했는지를 보는 것은 아흔 살쯤 먹은 요정에게도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야스와다의 마법은 결코 타일라프람에 뒤처지는 수준이 아니었지만, 이처럼 화려한 형태로 나타나진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대전쟁 기념관에 발을 들이자마자 테네브로즈는 조금 더 기분이 좋아졌다. 곳곳을 장식한 환영이나 전시품 때문만은 아니었다. 익숙한 이름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이 가문의 시조들이세요. 비록 셀리멘님은 대전쟁 도중에 돌아가셨지만, 알세스트님은 계속 기억을 하고 싶으셨대요. 아무래도 쌍둥이니까요."
기념관의 중앙에는 남자와 여자의 환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여자는 셀리멘이고 남자는 알세스트라지만 이름표를 바꿔 놓아도 알아챌 사람이 없을 정도로 똑같이 생겼다. 밝은 금발을 길게 길러 묶었고, 새파란 눈은 한낮의 호수를 연상시킨다.
"예전에, 요정들은 인간한테 마법을 잘 안 가르쳐 줬대요. 가르쳐 주더라도 평소에는 구속구를 끼고 다니게 했고요. 당연하죠, 노예들이 마법을 쓰면 주인한테 덤빌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두 분은 마음껏 마법을 썼대요. 구속구를 끼우기엔 아까울 정도의 재능이라서요."
같은 사건을 겪더라도 받아들이는 바는 서로 다르기 마련이다. 그 괴리에는 언제나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그게 역사라면, 세월만큼의 기억이 모인 결과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만큼 마법에 뛰어나면 더더욱 구속구를 끼워야 할 것 같은데요. 결국 이렇게 됐잖아요."
"글쎄요, 천 년 전의 요정들은 그렇게 생각했나 보죠. 이제 와서 멍청한 짓이라고 따져 봐야 뭐가 남겠어요? 게다가 덕분에 제가 여기서 일하고 있는 거니까, 따질 필요도 없죠! 두 분이 없었으면 노르덴홀즈 장원도 없었을 테고 제 일자리도 없었을 테니까요."
소피아는 모르겠다는 어깨를 으쓱였고, 다음 전시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테네브로즈는 잠자코 따라가면서 진상을 복기했다.
제국 말기에, 나우파나 귀족들은 야스와다의 명문가와 손잡고 영혼공학의 저변을 넓혀가고 있었다. 이러한 연구에는 주로 인간이 이용되었다. 요정의 혼은 강력한 만큼 다루기가 어려웠고, 늑대인간의 경우에는 괴수와 인간의 영혼을 동시에 조작해야만 했다.
노르덴홀즈의 시조가 된 쌍둥이는 영혼공학이 빚어낸 걸작이었다. 무색 마력 갈래와 비정상적으로 강렬하게 교감하도록 혼을 뜯어 고친 것이다. 그러나 성공의 기쁨은 순간이었다. 구속구가 먹히지 않는다는 게 밝혀지자마자 폐기 명령이 내려졌다.
쌍둥이를 만들어 낸 마법사는 자신의 걸작과 함께 도망쳤고, 그들에게 마법을 가르쳤다. 처음에는 복수심이 동력이었겠지만 그 감정은 시간이 흐르며 자식을 향한 애정으로 변했다… 추적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바칠 만큼.
쌍둥이는 그 후로 몇 년간 숲과 들판을 떠돌았다. 그리고 인간들의 신이, 아즈리온이 나타났고 대전쟁이 일어났다.
소피아의 말대로, 쌍둥이를 요정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더라면 둘은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인류의 영웅이 아니라, 요정의 편에 서서 인간들을 학살한 미치광이로. 요정 사회에서 영혼공학의 맥이 끊길 일도 없었을 것이다…….
테네브로즈는 지나가는 말로 중얼거렸다.
"예전에 들은 말인데, 사람들은 좋은 것만 보려 한대요."
"당연한 이야기를 하네요. 그러면 나쁜 걸 보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어요?"
소피아의 말대로, 일부러 나쁜 면을 내보일 사람은 많지 않다. 쌍둥이를 만들어 낸 마법사가 인간의 역사에서는 완전히 지워진 것처럼. 그리고 셀리멘의 최후 역시도.
"진실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니까요. 그렇잖아요?"
"그 나이에는 그런 생각을 하기 마련이죠. 하지만 우리 인생엔 엄청난 비밀도 진실도 없다고 말하겠어요. 대신 이런 건 있죠. 안정적인 일자리와 고정적인 봉급 말예요. 그쪽도 나이가 들면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알게 될 테죠. 저도 제대로 된 어른은 아니지만, 이건 진심 어린 충고에요. 스물이 되면 정말 많은 게 달라진다구요. 진실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니까요."
소피아는 유쾌한 논변을 펼치더니 소년을 향해 밝게 웃어 주었다. 테네브로즈는 세계를 감싼 거짓말을, 그 위에 선 사람들을 생각했고 그들 각각의 일상을 생각했다. 수레 운전수가 있었고 노르덴홀즈의 후손들이 있었고 해맑은 하인이 있었다. 그리고 저승에는, 잠든 늑대와 외로운 청지기가.
"가끔은 엄청난 비밀이 있던데요."
"에이, 성년식부터 치르고 와요!"
그녀는 펼친 손바닥으로 소년의 등을 찰싹찰싹 내리쳤다. 철없는 동생을 대하는 투였다. 테네브로즈는 소피아를 빤히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