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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23화 (124/258)

123화 땅부잣집 아들내미 (3)

노르덴홀즈 장원은 작은 기업도시 같은 곳이다. 장원 서북쪽에는 연구소가 모인 연구단지가 있고, 그 밑으로는 공방과 제작소들이 있고, 학교가 있고, 다시 그 옆과 밑으로는 직계 혈족이 모여 사는 거주 지구가 있다. 장원은 타일라프람의 일부지만 또 다른 도시로도 취급된다. 이러한 특권적 지위는… 장원의 모든 영토가 가문의 사유지라는 데에서 온다.

"정정하겠습니다. 본가보다도 이곳이 더 큰 것 같은데요."

응접실로 안내받고서는 요정 놈이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로야페타처럼 곳곳에 돈이 넘쳐흐른다는 인상은 아니었지만, 궤가 다른 위압감이 있는 곳이었다. 선계에 발을 들인 나무꾼의 기분이라고나 할까.

하인이 가져온 다과까지도 뭔가 남달라 보였다. 가운데에 잼 필링이 장식된 과자는 금테를 두른 루비 브로치를 연상시킨다. 란드와르는 엄지와 검지로 과자 끄트머리를 쥐고서는 빤히 바라보다가 입안에 던져 넣었다.

말루카에서 먹은 것보다 깊은 풍미가 느껴지는 건 자신이 속물인 탓일까, 아니면 정말로 고급 재료가 들어가서 그런 걸까? 심장 깊은 곳에서 천민자본주의 근성이 준동했다.

"아무래도 그렇지?"

"가문 영지가 있고 거느리는 평민들도 있지만 이 정도는 아닙니다. 다른 명문가들도 이러진 않아요."

강현은 요정 녀석에 대한 호감이 재충전되는 것을 느꼈다. 지금이 18세기도 아니고, 21세기의 사람에게는 대기업 후계자보다는 지방 토호가 더욱 친근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여기가 21세기도 18세기도 아니라는 점은 일단 넘어가도록 하자. 아무튼. 이런 동네를 마다하고 세카두에서 일용직 노릇이나 하고 있었다니, 제정신인가?

그래도 티아에게 전해들은 내력을 떠올리자면 참작이 되는 면도 있었다. 어릴 적부터 넘치는 기대를 받았던 탓에, 항상 부담에 시달렸다고 했다. 그랬다가 아즈리온 회당을 마음의 안식처로 삼게 되었다고. 단순히 아즈리온이 멋지고 철이 없어서 광신도가 된 게 아니라, 스트레스 때문에 헤까닥 돌아 버린 셈이다.

그는 이런 곳에서 촉망받는 인재로 살아가는 게 어떤 일일지를 상상해 보았다. 연기금 운용자들이 마약을 하다가 잡혀갔다는 기사와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한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코카인에 취하는 월스트리트의 투자자들… 이게 아닌가?

맥락은 조금 다르겠지만 핵심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긴장과 중압감은 사람을 망친다. 그 뒤에 약속된 게 영광과 번영일지라도. 그러면 두 번째 질문. 기대받는 일이 두려워서 망한 인생을 택한(비록 이제는 본가로 돌아오긴 했지만) 꼬마한테 신위를 맡기는 건 현명한 일인가? 결정적인 순간에 도망치는 건 아닐까?

여기에 대해서도 수없이 묻긴 했지만, 티아의 자문도 구해 보았지만, 어쨌든 괜찮으리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지금으로서는 로안의 충성심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믿지 않는다면 성패가 불분명한 한 달짜리 보조 시나리오를 뚫으러 가야 했다. 로드도 세이브도 없는 현실에서. 뿐만 아니라 요정들이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다. 확실하지 못한 길을 걸을 바에는 그냥 로안을 잘 달래 보는 게 낫다…….

"기다리시게 한 점 사과드리지요. 저는 탈리스커 노르덴홀즈, 로안의 큰삼촌이자 대학 정교수 되는 사람입니다. 로안의 학술적 후견인을 맡고 있습니다."

순간 낯선 목소리가 생각의 흐름을 끊었다. 고개를 들자 사람 좋아 보이는 중년인이 응접실에 막 들어서고 있었다. 단정한 밤색 머리와 눈동자, 콧수염을 덥숙하게 길렀고 둥근 안경을 코끝에 걸치고 있다. 구태여 자기소개를 하지 않더라도, 보는 것만으로도 소속을 알 법한 차림새였다.

"반갑습니다."

란드와르는 일어나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다시 앉았다. 탈리스커는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서는 느릿한 어조로 운을 뗐다.

"세카두에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로안과 연이 있으시다고."

"예, 이즈음에 다시 만나기로 이야기를 해 두었거든요. 약속날에 오는 것보다는 미리 얼굴을 봐 두는 게 좋을 듯해서."

탈리스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운을 뗐다.

"…돌아가 주실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다뇨."

"몇 년간 방황한 아이입니다. 이제야 겨우 마음을 다잡고 마법을 수련하는 중이고요. 여섯 달 만에 엄청난 발전을 보여주고 있어요. 두 해, 세 해는 필요한 일들을 척척 해내고 있지요."

"잘 된 일이군요. 그래서요?"

"사제분을 본다면 마음이 흔들릴 겁니다. 이 아이를 다시 세카두로 보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노르덴홀즈 전체의 뜻입니다……."

무슨 생각인지는 이해가 갔다. 로안에게는 최대한 비밀을 지키라고 말해 두었으니까, 가문 사람들은 전말을 모르리라는 것까지도. 란드와르는 한숨을 내쉬고서는 손등에 프리패스권을 띄웠다.

성흔을 보여주고는 교단의 일이라고 읊자 탈리스커의 태도가 한순간에 변했다. 종교의 권위란 좋은 것이었다.

*  *  *

타일라프람에 돌아온 후로, 로안에게는 수시로 성흔을 띄우고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이유는 여럿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아즈리온을 만났던 순간을 꿈이라고 믿어 버릴 것 같아서. 그가 저 하늘에서, 계속 자신을 내려다보리라는 사실을 상기하기 위해.

로안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았다… 하지만 아즈리온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기초 과정을 겨우 끝낸 소년을, 아직은 그 무엇도 되지 못한 가능성을 택했다. 부족한 마법 실력과, 뛰어나다고는 말하지 못할 검술과, 부족한 경험을 모두 충당할 만큼의 신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신에게서.

그래서 로안은 매 순간 최선을 다했고, 그만큼의 성과를 얻었지만, 질문은 남았다. 여섯 달이 흐르고 약속한 기한이 닥쳐왔을 때 란드와르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의심하지 않으려면,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면 성흔을 보아야만 했다. 그것보다 더한 증거는 없으므로.

아직까지 신은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신도…….

로안은 마력 갈래를 가다듬길 멈추고 힘을 방출했다. 수십 줄기의 얼음이 일순, 그물처럼 쏘아져 나가면서 환영 괴수의 몸을 저몄다. 이제는 섬세한 조정도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었다. 이걸 전투에 적용하려면 실전 경험을 많이 쌓아야겠지만, 시전 시간도 대폭 줄여야겠지만… 그래도 여섯 달 전에 비해서는 꽤나 발전한 셈이었다.

긴장을 푼 로안은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종이 놀란 듯 마력 잔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피아였다. 그녀는 입을 벙긋거리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용건을 전했다.

"손, 손님이 오셨어요. 연금술사의 숲에서 만났다고 하면 알 거라고 하시던걸요. 응접실에서, 탈리스커 교수님과 함께 계세요."

말뜻을 이해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얼굴이 뜨거워지더니 심장이 터질 듯 부풀었다. 로안은 자신이 지난 여섯 달을 아주 생생한 꿈처럼 여겨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는 현실을, 아즈리온의 판결을 마주할 때였다.

처음 란드와르를 마주했을 때에는 기쁜 마음에 스스럼없이 굴었지만, 그 감정은 지난 시간 동안 경외와 긴장으로 변해 있었다. 수련실과 서고에 틀어박혀 마법 연구에 매진하는 동안에도 바깥소식은 계속 들려왔던 것이다.

암적색의 별이 떴고 로야페타에서는 마력 폭풍이 몰아쳤다. 모두 란드와르와 관련이 있는 일인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거기에서 제 몫을 할 수 있을까? 마법을 준비하려면 시간이 한참이나 걸리고, 제대로 된 공격을 가하면 삼십 분은 약한 주문밖에는 쓰지 못하는 얼치기 마법사가…….

란드와르가 약속날보다 일찍 왔다는 사실이 로안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신이니만큼 자신이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지를 줄곧 보아 왔을 터였다. 하지만 그게 란드와르를 만족시킬 정도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그만두라는 뜻을 전하러 온 것이라면?

비록 전서에 적힌 것만큼 근엄한 신은 아니었지만, 격의 없는 모습을 보면 세카두 회당의 사제들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어쨌든 란드와르는 아즈리온의 화신이었다. 평범한 인간들보다는 기준이 한참이나 높을 게 틀림없었다.

생각이 거기에 닿는 동시에 세상이 마법의 잔해보다도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는 하얗게 굳은 얼굴로 시종을 바라보았다.

"소피아, 내가 마법을 쓰는 걸 봤죠?"

"아, 네! 수련실에 함부로 들어온 건 죄송해요. 교수님께서 급한 일이니 빨리 불러오라고 하셔서요. 방해가 되었다면 사과드릴게요."

"아뇨, 다른 걸 물으려고 해요… 내가 괜찮은 마법사처럼 보이나요?"

"그럼요! 얼음을 그렇게 수십 갈래로 쏘는 건 처음 봤어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죠. 제가 나이는 안 많아도, 이곳에서 일하면서 마법사들은 실컷 봤거든요."

"하지만……."

로안은 말끝을 흐렸고, 소피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시종에게 물어서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  *  *

<염려가 많아 보이는군요. 잘 달래 주셔야겠습니다.>

공격대에 심리상담사를 받아야겠는데요. 이번엔 또 뭐가 문젭니까?

<실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게 불안한가 봅니다. 과민한 걱정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천재는 크게 세 종류로 나뉠 수 있다. 에고가 넘치거나, 자존감이 희박하거나, 나사가 빠졌거나. 첫 번째는 재수가 없고, 두 번째는 귀찮고, 세 번째는 머리가 아프다. 란드와르는 생각했다. 이제 재수 없는 놈만 만나면 셋 다 모으는 게 아닌가?

탈리스커는 당장에라도 혼절할 듯한 표정으로 들어온 로안을 보고 기겁했다. 란드와르도 머리가 복잡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니, 이 새끼야, 칼 들고서는 잘만 깝치던 새끼가 왜 갑자기 생각이 많아졌냐… 내가 니 실력 때문에 안 데려갈 거였으면 여기에 왔겠냐고…….

"예정보다 일찍 오셔서 겁을 먹었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서 죄송해요. 제가 괜한 걱정을 하는 버릇이 있거든요."

그래도 탈리스커를 내보내고는 잘 타이르자 로안은 금세 혈색을 되찾았다. 울쿠스보다는 단순한 게 보기 좋았다. 신위 이야기를 꺼내면 태도가 또 어떻게 변할지는 미지수였지만.

란드와르는 당분간은 수정 심장 이야기는 꺼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최소한 보름이 지나고 폐허로 떠나기 전까지는. 섣불리 말했다가는 수련이고 뭐고 내팽개치고 하루 종일 불안해하기만 할 게 뻔했다.

"아무튼, 얼굴 한 번 보려고 왔다. 그간 있었던 일은 너도 대충 알 테고."

"그럼요, 로야페타 일까지도 전해 들었습니다. 사제 한 명이 단신으로 돌연변이를 제압했다고요. 삼촌, 이렇게 부르려니까 이상하네요, 죄송합니다. 아무튼 그것도 삼촌이 맞으시죠?"

일단은 남들 앞에서는 삼촌이라 부르라고 시켰다. 형이 되기에는 나이차이가 거의 스물이고 전사님이라는 호칭은 자신 쪽이 불편했다. 그것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대답의 내용이었다.

"소문이… 다 났구나."

란드와르는 표정을 관리하려 애썼다. 이 소리를 듣기 싫어서 정보사한테 일처리를 모두 미뤄두고는 신경을 껐는데, 결국에는 귀에 담게 되었다. 달갑잖은 예상을 남의 입으로 확인하는 것만큼 언짢은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비록 부정할 마음조차 없는 현실일지라도.

"그럼요. 시종들이 말하기로는, 사실 그 전사가 아즈리온의 화신이 아니냐는 말도 나돌고 있다더군요.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건물 1층 높이는 되었다던데, 그걸 남 도움도 안 받고 혼자 해치웠다는 겁니다. 평범한 인간이 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삼촌께는 쉬웠겠지만……."

표정 관리가 잘 됐는지, 눈치가 없는지는 몰라도 로안은 신나서 떠들어댔다. 여전히 내용이 개 같았다. 란드와르는 내면의 평화를 찾아 헤맸다. 인간들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추론을 하고 있을 뿐이다. 세카두의 주정뱅이가 유명해지지 않은 걸 위안으로 삼자…….

그랬다. 로안에게는 죄가 없었다. 그러면 이 짜증을 어디에 풀어야 하지? 자연스레 시선이 요정 놈에게로 향했다. 동시에 로안이 놀란 듯 말을 멈추고는 짧은 신음을 뱉었다.

"앗, 제 이야기만 하느라 동행한 분을 앉혀두고만 있었습니다. 실례를 저질렀어요. 제가 뭔가에 깊숙이 빠져들면 다른 건 잊어버리는 습관이 있거든요. 로야페타에서 소년과 함께 다니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같은 분이겠지요. 혹시 통성명을 해도 될까요?"

란드와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 말할까? 아니면 나중에, 세카두에 데려온 다음 사실을 밝힐까? 둘 중 무엇이든 큰 상관은 없었다. 로안도 크게 신경 쓰지는 않을 터였다. 아즈리온을 좋아할 뿐이지 요정을 혐오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테네브로즈에요, 아직 열네 살이고요. 열일곱이라 하셨으니까 저한테는 형이겠네요."

자신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갈색 머리 소년의 입에서 망설임 없는 문장이 튀어나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순진하고 착한 열네 살짜리인 줄 알 정도로 또랑또랑한 목소리였다. 란드와르는 경악 속에서 바들바들 떨었다. 이 새끼는 진짜 뭐가 문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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