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땅부잣집 아들내미 (2)
모든 수련자는 마법을 배우기 전에 적성 검사를 받는다. 열여덟 개의 마력 갈래와 자신의 영혼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예컨대 무색 마력에 깊이 감응하는 이는 전반적인 마법에 능통하고, 적색 마력과 연이 있는 자는 불꽃과 용암을 다루는 데에 뛰어나다.
그러나 특정 마력 갈래에 대한 감응력이 높다고 해서 능사는 아니다. 인간이 다룰 수 있는 갈래는 여덟 종류뿐이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요정 마법에 쓰이거나 필멸자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것이다.
이러한 한계는 때때로 비극이 된다. 보랏빛 갈래에게 사랑받는 이가 명문가의 요정이라면 이름난 신관이 되었을 것이다. 반면 그게 타일라프람의 견습생이라면… 그 재능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 * *
소년은 열 살이 되어 처음 받은 적성 검사에서 검사기를 먹통으로 만들었다. 다른 기기를 쓰더라도 결과는 한결같았다. 제대로 된 검사지를 받아든 것은 정밀 검사소를 찾은 뒤였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무색 마력: 계측 한계 초과.
무색 마력은 모든 색이 될 수 있었고, 그만큼 범용성이 높았다. 다른 갈래에는 연이 없을지라도 무색에 반응하기만 한다면 마법사의 소질은 충분했다. 아니, 차고 넘쳤다.
소년은 천재였다.
소년의 이름은 로안. 로안 노르덴홀즈. 타일라프람의 마법명가, 노르덴홀즈. 물론 방계지만 혈통의 고하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검사지가 나온 당일에 로안은 이미 가문의 유명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네가 로안이구나! 학교에 간다고 들었는데, 그것보다는 우리 연구실에서 직접……."
"이모님, 아이는 또래끼리 어울려 놀아야 하는 겁니다. 그나저나 얘야, 혹시 연금술에 관심이 있으면……."
"어허, 재료를 섞는 건 마법을 몰라도 할 수 있는 일이지. 이런 인재한테는 더 좋은 기회가 있다는 거야. 그러니까, 이 삼촌이 말이다, 로야페타랑 거래를 트고 있단다. 커다란 건설회사인데……."
로안은 풍족한 관심과 호의 속에서 자랐다. 친척들의 공방과 연구실을 놀이터처럼 들락거렸고 가문의 모든 사람에게 배움을 받았다. 엄청난 재능에 활발하고 순한 성격까지. 소년을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로안은 마음속에서 불안이 들썩이는 걸 느끼곤 했다. 마법 적성만으로 뛰어난 마법사가 될 수는 없으니까. 마력을 제어하는 법을 모두 익힌 다음부터는 마법진 설계와 복잡한 계산식들에 익숙해져야 했다.
배우는 내용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심화 과정을 제대로 해낼 자신은 없었다. 아니, 자신이 없었다기보다는, 두려웠다. 못 하겠어요, 라고 말하는 미래가. 사랑 섞인 기대가 한순간에 실망과 좌절로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게다가 영영 장래가 촉망되는 소년으로만 남아 있을 수는 없다. 기초 과정을 마친 다음에는 선택을 해야 한다. 연금술 공방에 들어가건, 건설 회사에서 경력을 쌓건, 마법의 근원적인 원리를 탐구하건 간에.
선택지는 많다. 무엇을 고를지도 자신의 자유다. 선택되지 못할 미래가 벌써부터 가슴에 얹힐 뿐이다. 누군가를 선택한다면 나머지는 버려지고 만다. 사람 좋은 이모도, 사촌누나도, 삼촌도, 큰할아버지도, 모두. 그 사람들에게서 예전과 같은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열세 살의 로안이 생각하기에는, 아니었다.
* * *
기초 과정을 끝마친 날, 아니, 끝마치기로 되어 있었던 날, 로안은 세카두로 가는 공영 차원문을 탔다. 첫 번째 가출이었다. 무슨 계획이 있어서 집을 나온 건 아니었다. 어디든 괜찮으니 친척들의 눈길을 피하고 싶었을 뿐이다.
며칠은 괜찮았다. 용돈을 탈탈 털어 나온 덕에 차원문 이용료를 내고도 돈이 조금 남았던 것이다. 여관방에 묵으면서 세카두 곳곳을 돌아다녔다. 도시는 타일라프람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소박하다 못해 단조로울 정도였지만 그게 오히려 위안이 됐다.
문제는 돈이 다 떨어진 다음부터였다. 여관 주인에게 빌어 봤자 치안대에게 끌려가는 미래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치안대는 노르덴홀즈에 전보를 보낼 테고, 그 즉시 가문 사람이 와서 자신을 데려갈 것이다.
로안은 단념하고 여느 투숙객처럼 여관을 떠났고, 길거리를 맴돌기 시작했다. 꾸역꾸역 앞으로 걸어 나가다가 벽을 마주치면 옆으로 도는 것이다. 그렇게, 목적지도 경로도 마음에 두지 않고 계속 걷다 보면…….
"척 봐도 좋은 집 도련님 같은데… 어디 사니?"
"거, 말하고 싶으면 저 알아서 잘 떠들겠지. 울게 내버려 둬요. 하던 거나 합시다."
여자의 질문에 남자가 시큰둥한 투로 말을 얹었다. 그러고는 둘의 시선이 다시 차투랑가(*Chaturanga, 체스와 유사한 보드게임) 판으로 모였다. 로안은 옷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생각했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서인지 상황을 종잡기가 어려웠다. 아무 생각 없이 돌아다니다가 누군가와 부딪혔던 건 기억이 났다. 그랬다가 소매치기로 몰렸던 것까지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말을 더듬고만 있었다. 그리고 남자가 나타나더니 자신을 여기로 데려왔다.
일단 치안대 제복을 입고 있진 않다. 그러면 뭘 하는 사람들일까? 그렇게 묻는 순간 납치범 이야기가 떠올랐다. 혼자 다니는 어린애들을 데리고 가서 우르게슈에 팔아넘긴다는 것이다. 강령술의 재료로 쓸 수 있도록.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나쁜 짓을 저지를 사람들론 보이지 않았지만, 어린애를 납치한 다음 한가하게 차투랑가를 두고 있을 리도 없지만… 범죄자들이 얼굴에 죄목을 써 놓고 다녔더라면 형사도 탐정도 필요하지 않을 터였다.
"애가 아픈가 본데. 식은땀도 흘리고."
"하여간 불리할 때에만 남 걱정이죠. 그럴 거면 항복 선언이나 해요. 라자를 그 자리로 옮기면 내 파다티에 걸리거든요."
"아니, 봐요. 얼굴이 아주 창백하다니까."
둘은 게임을 멈추고는 로안에게로 다가왔다. 오해는 빠르게 풀렸다. 남자는 아즈리온 교단의 사제인데, 바깥이 떠들썩하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나왔다고 했다. 그랬다가 로안이 쩔쩔매는 걸 보고는 데려왔다고. 여기는 세카두 서부 수도원 숙소라고.
"아무튼, 이제 다 운 것 같으니 몇 가지 묻자. 너도 집에는 가야 할 거 아니냐."
로안은 남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곤혹스럽다는 시선이 날아들더니 여자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부모님이랑 싸웠니? 그래서 혼자 돌아다니고 있던 거야?"
"그런 건 아녜요."
"그러면 무슨 일인지 얘기를 해 줘야지."
"됐어요, 말하기 싫은 모양인데 그냥 가라고 합시다. 여기가 뭐, 보육원도 아니고."
"자기가 데려와 놓고는 그래요?"
"그거야 다 큰 어른이 애 붙잡고 시끄럽게 구니까 그랬지……."
그 후로도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로안은 가까스로 부탁 하나를 입에 올렸다. 잡일을 도울 테니 며칠만 재워 줄 수 없겠냐고. 사제들은 난처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로안은 세카두 서부 회당에서 열 달을 보냈다. 하루만 재워 주겠다던 게 이틀이 되고 보름이 되더니 어느덧 한 달이 지났던 것이다. 그러자 사제들도 언제 집에 갈 거냐고 묻기를 그만두었다.
회당에서의 삶은 만족스러웠다. 평소에는 잡일을 돕거나 아즈리온 전서를 읽으면서 지냈고, 사제들에게 칼 다루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마법만큼 쉽지는 않았지만, 괜찮았다.
소년은 아즈리온 회당의 모든 것을 좋아했다. 단정한 건물 양식과, 넓은 훈련장과, 전서를 낭독하는 수도자들의 목소리와, 대전쟁 시기의 영웅담을.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꼬마일 수 있는 순간을.
"지금까지 맡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줄곧 찾아다녔는데, 사제분들이 아니었더라면……."
"거의 1년씩이나 마음 졸이게 한 점은 죄송합니다. 사정을 알았으면 진작 돌려보냈을 텐데, 애가 아주 고집불통이라서요."
"혹시 아들놈이 무례하게 굴었습니까?"
"아뇨, 그건 아닙니다. 아주 싹싹하고 착하던데요. 게으름을 부리지도 않고요."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로안은 자신 옆에 앉은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수십 번은 되뇐 문장을 재차 떠올렸다. 이렇게 수도원에 머무르던 것이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고. 이곳에서의 나날은 한순간의 꿈일 뿐이고, 자신의 진짜 삶은 타일라프람에 있다고.
"돌아가자꾸나. 다들 걱정하고 있어. 큰고모님도 그렇고, 사촌들도……."
"네."
한 어절은 진심을 담기엔 너무 짧은 길이였고, 그래서 그 울림에는 북소리를 닮은 구석이 있었다. 어디를 때리건 똑같은 음색을 내뱉는, 싸구려 북처럼.
* * *
타일라프람에 돌아온 후에도 추격전은 계속되었다. 로안은 집에는 있었지만 땅에 발을 붙이지는 못했다. 매일 허공에 한 뼘쯤 떠오른 채 몽상 속을 걸었고 눈을 감았다 뜨면 세카두 수도원이 보였다. 가문의 일에 관심을 가지더라도 모두가 시조님에 대한 것뿐이었다. 첫 번째 노르덴홀즈, 즉 셀리멘 노르덴홀즈와 알세스트 노르덴홀즈는 쌍둥이 마법사이자 아즈리온의 동료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사춘기의 방황이다 치고 내버려 두었으나 로안의 태도는 바뀔 기미가 없었다. 부모님의 시선에서는 쏟아진 진주 단지를 보는 듯한 난감함이 느껴졌다. 로안은 흘러 넘치는 사랑보다는 그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기대가 없다면 기대에 부응할 필요도 없으므로.
로안은 대신 전사를 꿈꾸었다. 교단의 정식 사제든, 수도자든, 아니면 떠돌이 용병이든 좋았다. 검술엔 별다른 재능이 없을지라도. 아니, 어쩌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거창하도록 소박한 꿈이 로안을 세카두로 이끌었다. 3년 만이었다.
그는 아즈리온 제단에 숭배 서약을 바친 뒤 용병 사무소로 향했다. 마법사 로안 노르덴홀즈가 아니라 전사 로안으로서. 이번에는 부모도 로안을 애써 찾지 않았다. 감시인을 몰래 붙여두고는 소식을 전해들을 뿐이었다. 그들도 아들의 가출 소동에는 이골이 났던 것이다.
그렇게 여섯 번의 의뢰를 치르면서 한 해가 지났지만 무언가가 좋아질 기미는 없었다. 여전히 풋내기였고 위험에 처할 때면 마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적이든 동료든, 누군가 죽는 모습을 본 날에는 먼지덩어리 같은 구름을, 그 뒤편에 숨은 달을 한동안 노려보곤 했다.
달은 망자의 혼을 저승으로 이고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저 둥글게 빛나는 두레박에 자신이 담길 날은 언제쯤일까? 어쩌면 당장 내일이 아닐까? 만약 살아남더라도, 이렇게, 헛된 몽상에 인생의 한 막을 넘겨주면서…….
혼란과 불안과 오기가 서로 얽혔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오기가 이겼다. 로안은 이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일념 아래 일곱 번째 의뢰지로, 울프 장원으로 향했다.
그곳에 아즈리온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