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땅부잣집 아들내미 (1)
오로지 사랑할 수 있는 것만이 기억된다. 끔찍한 악몽조차도 그렇다. 어둠 속에서 번뜩인 그 무엇 때문에 사람은 비애와 절망을 마음에 남긴다. 그게 이름 모를 날의 낮잠보다 가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서른네 살의 이강현에게 교통사고는 순전한 암흑이었다. 그는 빠르게 잊어버렸고, 멍한 기분 속에서 저택으로 향했다. 지구에 돌아간다면 심리 상담부터 받아야겠다는 다짐 하나만이 침전되지 못한 찌꺼기처럼 맴돌았다.
* * *
거실에는 여전히 요정이 데굴거리고 있었다. 배를 깔고 누운 채, 울쿠스에게 주었던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는 중이었다. 지랄 맞은 고양이가 털실을 굴리고 노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자기 방도 있는 놈이 왜 맨날 거실에 나와서 이러지?
"표정이 영 별로신데요. 욕할 일이라도 생기셨습니까?"
"별 거 아니야. 하던 거나 해라."
기분이 안 좋기야 했지만 남에게 분풀이를 할 건수는 아니었다.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생각을 하자. 도움이 될 생각을… 란드와르는 소파에 가로 누운 채 계획을 항목별로 세분하기 시작했다.
목표: 로안을 데려온 다음 나우파나 폐허에 가서 <수정 요새> 시나리오를 처리해야 함.
보상: 수정 심장.
동료 목록: 테네브로즈, 볼로디아, 헤이딘, 로안. 치유사가 필요하다면 정보사 사제를 데려갈 것.
심장을 먹을 동료는 로안이었다. 피투성이 심장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볼로디아뿐이었던 것처럼, 수정 심장에도 비슷한 제약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물론 조건은 비교적 쉽다. 피투성이 심장에는 전대의 의지가 남아 있었지만, 수정 심장은 그것조차 없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기 때문이다. 기억 조각이 폐허를 떠돌 뿐이다.
따라서 정신력은 일반인 수준만 되어도 충분하다. 마법 실력이나 전투 경험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오로지 감응력이다. 재능 말이다. 특정 갈래의 마력 적성이 아주 뛰어난 사람만이 수정 심장을 흡수할 수 있다.
그러니 로안만한 적임자도 없는 셈이었다. 녀석을 본가로 돌려보낼 때 여섯 달을 준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시나리오가 열리자마자 바로 폐허에 데려갈 작정이었다. 정밀도가 떨어지고 지속력도 최악이지만 위력만큼은 발군인 놈이니까.
약점을 없애기엔 주어진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강점을 배가시키는 수밖에 없다. 수정 심장의 보너스는 모든 주문의 효과가 50%만큼 증가하는 것. 일격필살 컨셉에 어울리는 부가 효과였다.
물론 열일곱 철부지한테 신위를 덜컥 안겨주는 게 장기적으로 현명한 결정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안에게 수정 심장을 주기로 마음먹은 이유가 있었다. 크게 셋이었다.
첫째, 적임자를 찾는 것부터가 일이라서.
그게 가능할 만큼 마력 적성이 뛰어난 인간은 거의 없다. 원래는 한 달씩 걸리는 보조 시나리오를 뚫으면서 동료를 영입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로안이 초장부터 굴러들어온 것이다.
둘째, 티아한테 보장을 받아서.
심장 때문에 타락할 걱정은 전혀 없다. 로안이 비뚤어지는 게 문제일 뿐이다. 착한 어른으로 자라면 잘 된 거고, 뭔가 꼬여서 나쁜 놈이 되면? 그건 누구한테 신위가 주어지든 간에 터질 수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최악의 경우에도 저희 선에서 수습이 가능합니다. 최소한 지금 걱정하실 일은 아니지요. 업무를 모두 끝마치고 원래 세계로 복귀하신 뒤에나 표면화될 문제니까요.>
만약 그렇게 되더라도 알아서 처리할 수 있다는 게 천계의 공식 입장이었다. 란드와르는 그 가능성은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비록 나사가 풀려 있긴 해도 싹싹한 녀석이었는데, 벌써부터 죽일 생각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랬다. 세 번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로안은 싹싹하고 말도 잘 들었던 것이다.
란드와르는 녀석이 광신도라는 사실에 위안을 느꼈다. 로안 노르덴홀즈. 마법 명가 소속인데다가 재능까지 발군인데, 아즈리온이 너무 좋아서 칼을 휘두르고 다니는 마검사 소년. 테네브로즈마냥 헛소리를 하지도 않을 테고 벨레다처럼 이상한 데에서 사고를 칠 리도 없다.
처음 만났을 때에는 골치 아픈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각양각색으로 맛이 간 인간들 사이에서 여섯 달을 부대끼다 보니 로안조차 마음의 안식처가 됐다. 란드와르는 자신의 처지를 일순 비관하다가 요정 놈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사제야."
"예?"
"너는 왜 사람이 병신이 됐냐."
반쯤은 시비였지만 나머지 절반은 진심이었다. 이 새끼가 조금만 멀쩡했으면 얼굴만 봐도 든든했을 텐데, 어떻게 된 게 그 반대였다. 분명히 쓸모도 있고 말도 잘 듣는 녀석인데도 그랬다.
"전 유능하고 똑똑한데요."
"니가 좀 다른 대답을 했으면 좋겠어. 내 소원이야."
"그렇다고 해서 거짓말을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나으리께서도 아시겠지만 저는 실제로 유능하고 똑똑하단 말입니다."
란드와르는 배에 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분명히 저 새끼가 사리분별이 안 되는 새끼가 아닌데. 진지해져야 할 때에는 충분히 진지해지는 법을 아는 새끼인데…….
* * *
란드와르는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가볍게 배낭을 쌌다. 어차피 로안의 본가에서 며칠간 신세를 지게 될 텐데, 짐을 무겁게 가져갈 필요가 없었다. 테네브로즈는 오늘 바로 타일라프람으로 갈 거란 이야기를 듣더니 자신도 데려가 달라고 요구했다.
"혹시라도 요정을 마주친다면 제 도움이 필요하실 텐데요."
"너 정보사 일 돕기 싫어서 따라오려는 거 아니냐?"
"부정할 마음은 없습니다. 그런데 틀린 말도 아니지 않습니까."
과연 솔직하게 맞는 말만 하는 새끼였다. 란드와르는 혀를 쯧 차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타일라프람의 전신前身은 나우파나 폐허 인근의 군사기지 겸 난민촌이다.
대전쟁 직후, 거지와 고아들로 득시글거리던 마을은 지정학적 이점을 발판으로 삼아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수정 심장이 내뿜는 마력이 온 대륙의 마법사를 끌어 모았던 것이다.
여관이 생겼고 장사치가 모여들었다. 마법사들은 마을에 머무르면서 고아에게 주문을 가르쳐 주었다. 아예 그곳에 터를 잡고 연구를 시작한 자도 많았다. 인간 사회에 남은 요정 무리 또한 난민촌의 확장에 기여했다(이 요정들은 후에 로야페타로 옮겨가 상업 가문을 세우게 된다).
시간이 흘러 수정 심장의 광기가 폐허를 완전히 집어삼키고서도, 군사기지로서의 기능이 무색해진 후에도 도시를 찾는 방문객은 끊이지 않았다.
천 년이 흐른 지금, 타일라프람은 마법과 기술의 동의어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첨단이지만 어떤 것도 첨단이 아니다. 날마다, 매 순간마다 새로운 기술이 고안되고 폐기되기 때문이다.
* * *
"오."
타일라프람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온 란드와르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빛 덩어리를 뭉친 듯한 조형물과, 광고용 환영 풍선과, 위압적으로 늘어선 건물들 앞에서.
아미라의 비서가 타일라프람산 승강기를 소개하면서 자신을 촌놈처럼 보았던 게 이해가 갔다. 여기에 비하면 세카두는 촌동네가 맞았다. 1920년대의 뉴욕을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100년쯤을 건너뛴 느낌이라고나 할까.
<게임에서는 이미 여러 번 보셨을 텐데, 새삼스럽게도 놀라시는군요.>
직접 오면 느낌이 또 다르지 않겠습니까. 제가 보기엔 강남보다도 여기가 더 나은데요.
<관광지를 추천해 드릴까요? 근처에 볼만한 전시관이 꽤 많습니다만.>
란드와르는 귀가 솔깃해지는 걸 느꼈지만 이런 유혹에 넘어가면 안 된다고도 생각했다. 별생각 없이 전시관에 들렀다가 요정을 맞닥뜨릴 가능성이 마음에 걸렸다. 기우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관광은 일을 모두 끝마친 다음에 하자. 이시 타브까지 죽인 다음에.
그나저나 전담 천사라는 분이 이래도 됩니까?
<편의를 봐 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어제 술자리를 눈감아드린 것도 그 편의의 일종이라 말씀드리죠. 혹시 엄격한 관리를 원하신다면…….>
됐어요. 내가 미안합니다.
할 말이 없어진 란드와르는 출입국장 근처에서 택시를 잡았다. 검게 도색된 마공학 수레에 몸을 싣고서는 행선지를 외치자 운전사가 말을 붙였다. 택시 기사에게 잡담을 듣는 건 시대와 세대와 세계를 아우르는 숙명인 듯했다.
"노르덴홀즈 장원이라고요? 보아하니 마법사는 아니신 듯한데, 어쩐 일로 가시는 겁니까?"
묻는 이유는 이해했다. 로안의 본가인 노르덴홀즈는 타일라프람에서도 제일가는 명문가였던 것이다. 가문의 시조는 아즈리온의 동료였고, 그 후로도 이름난 마법사들을 수없이 배출했다. 타일라프람 당국에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따라서 노르덴홀즈 장원은 아무나 발을 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잡상인은 당연히 사절이고 용건이 있어도 문턱을 넘기가 어렵다. 다행히도 로안은(비록 방계고, 지금까지 놀고만 있었고, 가출까지 뻔질나게 하긴 했지만) 엄청난 재능 덕분에 직계 친족들의 기대와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다. 친분이 있는 교단 사제쯤은 쉽게 들여보낼 수 있다는 소리였다. 성흔을 보여주고 정체를 밝히지 않더라도.
"만날 사람이 하나 있어요. 아는 동생이라고 하기엔 너무 어리고, 그냥 아는 애인데."
기사는 고개를 돌려 뒷좌석에 앉은 사람들을 힐끔 보았다. 갈색 눈에 교단 징표가 담기는 동시에 알겠다는 듯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검을 가지고 다니시는군요. 교단 소속이시고요. 뭔가 중요한 소식을 가져오셨나 봅니다."
"그런 거 아닙니다. 말 그대로 애에요."
딱 잘라 말했지만 무슨 소용이 있는 일은 아니었다. 기사는 이미 결론까지 다 내린 듯 첩보 영화에나 나올 법한 대사를 치고 있었다.
"그럼요, 아무 일도 아니겠지요. 비밀은 엄수하겠습니다."
착각은 달갑지 않았지만 차내가 조용해진 건 마음에 들었다. 수레는 침묵 속에서 정체 구간을 벗어나 시 외곽으로 접어들었다. 그러자 세상이 조금 흐릿해졌다. 속도가 건물과 가로수를 뭉개서 한 덩어리로 만들어놓고 있었다.
반쯤은 녹색이고 반쯤은 회색인 세계가 한여름에 꺼내둔 버터 덩어리처럼 녹아내렸다. 그 모습이 이상하리만치 평화로웠다. 각각의 건물에는 그 공간만큼의 염려와 불안이 맴돌고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등받이에 몸을 파묻은 채 관성적인 평온을 생각했다. 격변을 직감할지라도 대부분의 삶은 어제와 같이 굴러가기 마련이다. 택시 기사는 손님을 태우고, 무슨 소식이 있는지를 물어보고, 비밀 엄수에 동참하기도 하고.
어느덧 수레는 노르덴홀즈 장원 진입로에 이르렀다. 여기서부터는 직접 걸어야 했다. 삯을 치르고 내리자 운전수는 란드와르에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건승을 비는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 중요한 소식을 전하러 온 사제에게 눈도장을 찍으려는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어쨌거나 택시는 갔다. 이제 란드와르와 테네브로즈만 끄트머리도 보이질 않는 진입로를 앞에 두고 있었다. 능묘에서 뱀을 만났을 때도 별 감흥이 없었는데, 여기에서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움츠러드는 걸 보면 자신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구나 싶었다. 한국인은 원래 압도적인 부동산 앞에서 자신감을 잃는 민족적 고질병이 있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 속에서 도로를 따라가던 란드와르는 문득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요정 녀석도 명문가 출신이었다.
"너 본가랑 여기 중에서 어디가 더 넓냐."
"글쎄요, 들어가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압니까. 아마 큰 차이는 없을 것 같긴 한데요."
"그게 장담이 돼?"
"어둠달도 작은 가문은 아니니까요. 의회에서는 두 번째란 말입니다. 쫓겨난 후로는 발도 들이지 못했습니다만……."
란드와르는 마음의 거리가 소폭 멀어지는 걸 느꼈다. 종족이 다르고 살아온 세계가 다르고 사고방식이 다른 것보다는 이 요정이 땅부잣집 아들놈이라는 점이 더욱 낯설고 이상하게 다가왔다. 딱히 테네브로즈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