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개 같은 술친구 (3)
낮부터 시작된 술자리는 해가 질 무렵에야 끝났다. 알톤과 헤어지자마자 단번에 정신이 돌아왔다. 방금 전까지는 미친 것처럼 달리고 있었는데 술상대가 사라졌다고 머리가 이렇게나 맑아지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화신으로서의 품위는 일절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 멋졌다고 말씀드리죠. 엄청나시더군요.>
이거 반어법이죠?
<진심도 조금은 섞여 있습니다.>
진심 섞인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란드와르는 골목을 빠져나오기에 앞서 자신의 행색을 점검해 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술에 찌든 데다가 후드까지 뒤집어쓰고 있는, 건장한 남자.
어떻게 보일지는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대로변으로 나오자마자 행인들이 슬금슬금 자신을 피하는 게 느껴졌다. 미심쩍은 거동수상자가 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조금 더 걷자 세카두 치안대가 달려와서 협조를 요구했다. 신원을 밝히라는 것이다. 사제라고 말했지만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다. 눈에 띄지 않으려고 교단 징표를 떼어놓고 온 게 화근이었다. 시민증은 당연히 없었다. 이런 씨발.
그렇다고 해서 성흔을 보여주기에는 꼴이 엉망이었다. 잠자코 지서로 끌려간 란드와르는 자세한 설명을 듣게 되었다. 로야페타에서 요정이 사고를 친 후로 검문을 강화하고 있다고 했다. 잔당이 다른 도시에 퍼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전 그냥 신분증을 집에 두고 온 주정뱅이인데요. 딱 봐도 요정은 아니지 않습니까."
"검문을 강화하라는 공문이 내려왔습니다. 신원 보증이 가능한 지인이나 소속 단체를 말씀해 주신다면 최대한 빨리 처리하겠습니다."
정말 열심히 일하시는군요. 그나저나 여러분, 이 사실을 아십니까? 그 지시를 내린 장본인이 바로 저란 말입니다…….
요정들이 인간 도시에 숨어들었다는 건 알았지만 놈들을 일일이 색출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방법부터가 마땅치 않았거니와 그럼으로써 얻을 이득도 딱히 없었다. 지금은 일상적인 검문을 강화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니, 자신이 끌려온 걸 보면 과도하게 충분한 것 같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아즈리온 교단 소속입니다. 세카두 외곽 수도원에서 지내요."
"똑바로 대답해 주셔야 합니다."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으시죠. 교단에 연락해 봐요."
…란드와르는 한 시간쯤 유치장에 갇혀 있다가 저택으로 돌아왔다. 요정 놈과 짧게 이야기하고는 욕조에 몸을 담그자마자 티아의 핀잔이 날아들었다.
<이제 슬슬 체면이라는 걸 생각해 보시는 건 어떤가요?>
이미 늦은 것 같은데요.
그래도 떳떳할 수는 없을 일이었다. 다른 놈들이 바쁘게 일하는 동안 자신은 교단 재정을 축내고만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때늦은 죄책감이 밀려왔다. 생산적으로 살아야 했다. 낮술이나 까면서 돌아다니다가 파출소에 끌려가는 게 아니라.
일정을 복기해 보자… 메기도가 죽으면서 <수정 요새>의 개방 조건이 충족되었다지만 출발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로안과 만나기까지는 보름쯤이 남았던 것이다. 볼로디아가 국정을 수습하고 세카두로 올 시기도 그 무렵이었다.
게다가 다른 녀석들도 각자의 이유로 바빴다. 운신이 자유로운 건 란드와르뿐이라는 이야기였다. 보름. 보름동안 혼자서 뭘 해야 하지?
란드와르는 목욕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요정 녀석과 그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기 싫다는 말씀이시지요."
"시간낭비라고 생각하지 않냐."
"어차피 저희는 바쁠 예정인데요. 저는 정보사 일을 돕는 중이고 벨레다는 기술 교류를 가야 합니다. 한가한 건 나으리 하나뿐이라는 겁니다."
"알아, 새끼야. 아니까 이러는 거잖아. 넌 내가 보름 내내 술병이나 깠으면 좋겠냐."
"나으리께서 원하신다면 저는 괜찮은데요."
"내가 안 괜찮아."
딱 잘라 말한 란드와르는 가능성을 세어 보았다. 둘 중 하나였다. 인간 도시들을 돌아다니면서 보조 시나리오를 처리하는 것. 혹은 타일라프람에 가서 로안과 미리 재회하는 것. 대뜸 데려오는 것보다는 함께 시간을 보내 두는 게 나을 테니까.
그렇다면 중요한 변수는…….
"지금 나온 애들 말이다, 메기도만큼 맛 간 놈은 없는 거지?"
"그렇지요."
"내가 보름쯤 돌아다녀도 별 문제 없겠지? 만약 요정이랑 엮인다 쳐도?"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아마도. 그 어절을 입속으로 발음하자마자 불안감이 몰려왔다. 시나리오 보상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로안을 만나더라도 도시 바깥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 * *
헤이딘은 용사 노릇이 만족스러웠다. 처음에는 손사래를 쳤지만 마음이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허공에 둥둥 떠서 주문만 쓰면 그만인데다가 부수입도 쏠쏠했다.
벌써 각인 도면을 두 개나 얻었다. 능묘에서 베껴온 것과 상업 가문에서 받아온 것 하나씩이었다. 게다가 제자들도 새로 생길 예정이었다. 큰 기대는 없었지만, 직접 가르칠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이 늑대인간보다는 똑똑하고 성실할 게 틀림없었다.
"숙제를… 하나도… 안 했구나."
저택의 오른쪽 가장자리 방으로, 슈문의 영토로 돌아온 헤이딘은 텅 빈 종이뭉치를 확인하고는 손을 바르르 떨었다. 자신이 말루카에 다녀올 동안 늘상 놀고만 있었던 모양이었다.
우물쭈물대던 펠로시는 시선을 피했다. 이윽고 짧은 어절이 정적을 깼다.
"네."
변명도, 부정도, 반항도 아닌, 네. 헤이딘은 귀를 의심하다가 되물었다.
"네?"
"네?"
펠로시가 멍청한 어조로 그 말을 되풀이했다. 헤이딘은 짧게 혀를 차고서는 벨레다를 돌아보았다. 소파에 기대 재미있다는 듯 둘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걸 수업 조교로 쓰겠단 말이냐?"
"이거라뇨, 스승님도 말씀이 심하세요. 펠로시도 사람인걸요."
"그래서 이 얼간이를 수업 조교로 삼겠다는 게야?"
"저 혼자서 열다섯 명을 어떻게 가르치겠어요! 스승님은 당분간 폐허에 가 있을 테고, 돌아오시더라도 사람들 앞에 나오진 못할 텐데요."
벨레다의 말대로였다. 헤이딘은 란드와르 일행을 따라갈 예정이었고, 벨레다는 그동안 기술 교류를 나가기로 합의가 되어 있었다. 당연한 귀결이긴 했다. 벨레다에게는 전투 능력이 없고 헤이딘은 다른 인간들 앞에 나타나지 못하니까.
거기까지는 불만이 없었다. 펠로시의 존재가 석연찮을 뿐이었다. 성실하지도, 똑똑하지도 않다. 얼마 전에는 벨레다를 꼬드겨서 대형 사고를 치기까지 했다.
"게다가 펠로시도 열심히 하겠다고 했는걸요. 그렇죠?"
"네! 비록 절반쯤 잊어버려서 숙제는 제대로 못 했지만, 앞으로는 잘 하겠습니다!"
펠로시가 갑자기 열성적인 어조로 외쳤다. 사실 여기에서 제일 절박한 사람은 그녀였다. 조교 자리를 따내지 못하면 꼼짝없이 수도원에 갇히고 말았다. 하염없이 아즈리온 전서를 옮겨 적고 훈련장을 뛰어다니는 것보다는 조교 노릇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믿기지는 않지만, 열심히 한다고 치자꾸나. 그러면 지능이 올라간다더냐?"
헤이딘의 일갈에 벨레다가 나섰다.
"비록 펠로시가 도박을 좋아하고, 걱정하는 법을 모르고, 금전 감각도 많이 떨어지긴 하지만… 스승님이 생각하시는 것만큼 바보 같진 않아요. 스승님께서 떠나 계신 동안 이야기를 많이 해 봐서 알죠. 학교 다닐 때에는 수석도 했다던데요!"
"멍청하지가 않다고? 내 설명은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디 있는 학교인지는 몰라도, 거기에서는 얼간이가 되는 법이라도 가르치는 모양이지. 그러면 저것도 수석은 될 수 있을 테니……."
"그거야 스승님이 말씀을 너무 어렵게 하는 탓이죠. 제가 저번에 그랬잖아요, 세상 사람들은 스승님처럼 각인 생각만 하고 사는 게 아니라니까요. 실력이야 비할 바가 아니겠지만 가르치는 건 제가 더 잘 할 걸요."
벨레다의 말이 끝나자마자 방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정곡을 찔린 헤이딘은 못마땅하다는 듯 팔짱을 낀 채, 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윽고 한숨을 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렇더라도 안 될 일이야. 애당초 허락을 받았는지도 모르겠고……."
"화신님 말씀하시길, 쓸모도 없고 사고만 치니까 수도원에 다시 넣을 거라던걸요. 달리 말하면, 쓸모가 있으면 여기 계속 남아 있어도 된다는 소리겠죠!"
"억지를 부리느라 논리고 뭐고 다 저버렸구나. 됐다. 가서 허락을 맡아. 그러면 나도 신경쓰지 않으마."
* * *
테네브로즈와 대화를 마친 뒤 밖으로 나와 시가에 불을 붙였다. 연기 한 모금을 머금자마자 벨레다가 저택에서 튀어나왔다. 급하게 논의할 문제가 있다고 했다. 일단은 불을 껐다.
"뭔데."
"이번에 제가 기술 지원 가잖아요."
"그렇지."
아직은 양해각서 단계긴 했지만 벨레다가 기술지원을 가는 건 사실상 확정이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하기로 했으니까 늦어도 사나흘 안에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될 것이다.
란드와르는 잠시 묵념했다. 양해각서와 계약서 초안과 공문 더미에 파묻힌 정보사 사제들을 위해. 갖가지 사건이 겹친 덕분에 모두들 야근을 거듭하고 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자신은 참 편하게 일하는 셈이었다.
비윤리적인 훈훈함이 느껴졌다. 비참한 사람을 보면서 위안을 얻는 건 망종이나 하는 짓이라지만 효과 하나는 끝내줬다. 란드와르는 빙긋 웃으며 벨레다를 내려다보았다. 입이 막 열리고 있었다.
"강의 조교가 필요한데요, 펠로시를 데려가고 싶어서요. 스승님이 허락이나 받아 오라고 성화시네요."
단번에 훈훈함이 달아났다. 잘 생각해 보니 자신이 정보사 사제들을 불쌍하게 느낄 계제가 아니었다. 벨레다와 펠로시 콤비 덕분에 로야페타에서 그 고생을 하고 돌아온 게 바로 어제인데, 뭐? 편하게 일해? 잠시 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었다.
"너 지금 생각하고 하는 소리냐?"
"사고 안 칠게요. 도박장도 안 가고 선물 투자도 안 할게요. 어차피 보는 눈도 많으니까, 로야페타에서도 호위를 붙일 테니까 다른 짓 할 수도 없을 거예요."
"알았으니까 정보사 사제 하나 가르쳐서 데리고 가. 똑똑한 애들 많잖아. 걔네들도 외근 나가고 싶어 하더라."
"펠로시도 똑똑한 편인걸요. 말도 잘 해요. 바보 같아서 그렇지."
"아니, 걔를 꼭 데려갈 이유가 대체 뭐야.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대 봐. 어차피 제자도 열다섯 명이나 생길 텐데 펠로시 데리고 스승님 놀이를 할 필요가 없잖아."
벨레다는 오래도록 머뭇거렸다. 할 말 없으면 관두라고 말하려던 찰나 꼬마의 입이 열렸다.
"그 늑대인간요, 이거 다 끝나면 말루카로 간다면서요."
"오냐."
"대장군인지 왕인지, 아무튼 그 사람 게 되는 거잖아요. 물론 볼로디아는 착해 보였으니까, 펠로시를 괴롭히진 않겠지만……."
"그래서."
"그러니까요."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인지 알 수가 없었다. 되도 않는 농담을 하나 싶어 얼굴을 힐끔 보았지만 낯설게도 진지한 표정만 떠올라 있을 뿐이었다. 잘 웃는 것 말고는 이쁠 구석도 없는 늑대인간 하나가 뭐가 그리 중요해서. 정말로 뭐가 그렇게 중요해서, 볼로디아도 벨레다도…….
"우리 없는 동안 펠로시랑 무슨 얘기 했냐. 선물 투자 말고 다른 이야기도 했을 거 아니야."
"아무 이야기나 다 했어요. 부적도 거의 완성했더니 할 일이 없어서요. 펠로시도 저한테 궁금한 게 많더라고요. 아무래도 요정 유령이랑 같이 다니는 게 흔한 일은 아니니까요. 펠로시가 학교 다닌 이야기 해 주면 저는 카스바까지 도망친 이야기 하고, 그렇게 하나씩……."
신난 것처럼 어조가 높아지더니 까만 눈이 흑요석처럼 반짝였다. 문득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던 질문이 입가를 간질였다. 얘는 어떻게 살았지? 어릴 적에는 헤이딘이랑만 지냈을 테고, 카스바로 자리를 옮긴 다음부터는 부하 다섯이 더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너 말이다, 펠로시 말고 다른 애한테 그런 소리 한 적 있냐. 여기 말고 카스바에서."
"그걸 남한테 어떻게 말해요. 부하들한테도 안 했어요."
란드와르는 벨레다의 양면을 곱씹었다. 지하 투기장에서 보았던, 능숙한 사업가의 모습과 지금의 어린애 같은 면모를. 태도가 그렇게까지 극적으로 바뀌는 이유가 항상 궁금했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본모습은 언제나 후자였겠지. 카스바에서, 돈을 노리거나 목숨을 노리는 놈들 사이에서 살아가려면 위장이 필요했을 것이다. 지금껏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는 헤이딘이 유일했으리라.
"펠로시는 남이 아니면 뭐야."
다시 긴 침묵이 있었다. 벨레다는 고민 끝에 한 문장을 내어놓았다.
"같이 있으면 편해요.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서 좋아요."
"그거, 친구라는 거다."
말해 놓고 보니 진부한 신파극에나 나올 법한 대사가 되고 말았지만, 아무튼, 좆같은 환경에서 평생을 보낸 탓에 뭔가가 망가진 애한테는 이런 멘트가 필요했다. 신파극을 이루는 것은 보통 효과 좋은 최루성 낱말들이니까.
"친구는 중요하지. 중요한데, 펠로시랑 노는 건 나중에도 할 수 있어. 몇 년 안 본다고 없어지는 거 아니야."
"볼로디아가 안 보여주면요? 자기 거라면서 가두면요?"
"대장군이 그럴 사람이냐."
트라우마틱한 망상에 시달리는 어린애를 안심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이가 스물셋이라지만 제대로 된 어른으로 자라진 못했으니까 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볼로디아는 나트람이 아니며 펠로시가 입궁하는 건 순전한 호의라고 열 번쯤은 거듭 강조하고서야 겨우 설득이 됐다.
"그러니까,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이해해. 펠로시랑 놀고 싶어 하는 것도 알겠어. 그런데 공이랑 사는 구분해야지. 너도 카스바에서 구른 짬이 있으니까, 내 말 알잖아. 강의 조교가 필요하면 정보사 사제 중에서 하나 뽑아서 가고."
기나긴 심리상담은 그렇게 끝났다. 그는 멀어지는 벨레다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시가에 다시 불을 붙였다. 그래, 친구는 중요하지… 천천히 타들어가는 시가 끄트머리는 차 안에서 넘겨다보는 가로등을 닮았다. 아니, 어쩌면 돌진하는 헤드라이트 불빛을. 일그러진 시야 속에서 어룽거리는 광점 뭉치를.
곧이어 달갑지 못한 기억이 물에 떨어진 잉크처럼 풀려나갔다. 한밤중에, 차를 타고 달리다가… 상대 차가 중앙선을 넘어와서… 암전. 그때 뒤에 타 있던 사람은… 씨발, 심리상담은 나도 받아야 하는데.
강현은 시가를 깊숙이 빨아들였다. 불빛은 둥글게 퍼지며 어둠과 불화하는 경계면을 만들었고 연기에서는 쓴맛이 났다. 그는 가물거리는 불꽃이 손끝을 태울 때까지 그대로 멈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