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개 같은 술친구 (2)
3차까지 간 이강현은 알톤에 대한 판단을 정정했다. 비록 인성이 나쁘고(둘 다 착한 편은 아니었다) 사람도 죽인데다가(사람은 이강현이 더 많이 죽였다) 술 사주는 사람한테 막말을 할지라도(욕도 이강현이 더 많이 하고 있었다) 어쨌든 알톤은 좋은 놈이었다.
잘 마시는 놈이 앞에 있으니까 술맛이 났다. 옛날 생각도. 강현은 지구에서의 나날을 휘적거리다가 노래 하나를 끄집어냈다. 마지막으로 부른 지 거의 십 년이 지났는데도 곡조가 똑바로 떠올랐다. 요즈음의 삶과 겹치는 구석이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오늘은 어디 가서 깽판을 놓고 내일은 어딜 가서 신세를 지나, 때리고 부수고 마시고 싸워라……."
"그건 대체 무슨 노래야?"
"있어. 어릴 때 많이 불렀어."
"노래도 형씨같은 것만 부르는구만."
씨발, 뭐가 어때서. 내가 마이크 잡고 쉬즈곤을 열창한 것도 아닌데. 그래도 남 앞에서 흥얼거리기엔 가사가 묘하긴 했다. 그는 건전한 노래 목록을 나열해 보다가 알톤의 질문에 생각을 멈췄다.
"그나저나 형씨는 고향이 어디야?"
"왜?"
"사람들이 뒤를 캐고 다니는데, 잘 생각해 보니까 형씨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더라고. 교단 소속이고, 그 실력에 성격이면 소문이 날 법도 한데, 그래,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멀리서 왔어. 말해도 몰라."
"변경 근처인가보군. 아까 전에 부른 것도 그쪽 노래야?"
"대충 그렇지."
대답은 건성으로 했지만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을 상상하자니 웃음이 입가를 비집고 나왔다. 파울리스의 말대로 자의식이 강하긴 강한 모양이었다. 화신 직함까지 달고 이러는 건 보통 사람이 할 짓은 아니다. 한동안 실실거리다가 알톤과 눈을 마주쳤다.
"내가 사실은 아즈리온의 화신이라면 어떨 것 같아?"
"무슨 의도로 하는 질문인지 모르겠는데. 도대체 얼마나 취한 거야?"
"하나도 안 취했어. 신이 되면 약한 독성에 면역이 생기거든. 위스키 통에서 목욕을 해도 끄떡없지."
"간만에 괜찮은 술친구를 만나서 좋았는데,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다니 안타깝군. 그게 진담이라면 형씨는 과대망상증 환자야. 주량이 엄청난 과대망상증 환자지."
"내가 신이 아닐 이유가 어디 있는데?"
알톤은 술이 깼는지 안 깼는지 모를 표정으로 강현을, 아니, 란드와르를 빤히 바라보았다. 일종의 동정 섞인 시선이 느껴졌다.
"칼솜씨가 좋고 힘이 세고 술에 안 취한다고 해서 아즈리온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야. 신들은 인간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신은 파문당한 사제랑 맥주를 마시지도 않고 카스바 상단에 취직했다가 쫓기는 몸이 되지도 않아. 그건 인간이나 할 짓이지. 그것도 글러먹은 인간."
"그러니까, 내가 인간이라서, 신일 수가 없다는 거지?"
"그렇지."
딱 잘라 말한 알톤은 진지한 표정으로 충고를 이어갔다.
"그래도 너무 실망하지는 마. 형씨는 괜찮은 인간이니까. 성격이 지랄맞긴 해도 유쾌한 구석도 있고 착해 보일 때도 있거든. 게다가 저 하늘에 계시는 분은, 빌어먹을 아즈리온께 영광 있으라, 이렇게 술을 사주진 않는단 말이야!"
강현은 웃음을 터뜨렸다. 면전에서 욕을 들어먹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대화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요정이든 화신이든 차원 생쥐들이든 모두 잊어버리고 낄낄댈 수 있는 순간 말이다. 그냥 떠돌이 전사로 남아서, 이렇게…….
* * *
늙은 요정이 안락의자에 기대어 있었다.
한때 희미한 보랏빛이 감돌던 은발은 모두 세어 흰 거미줄처럼 변했지만 눈만큼은 젊은 시절의 빛을 유지했다. 노인에게 남은 쇠퇴의 흔적이라고는 외관뿐이라고 해도 좋았다. 정신은 눈빛만큼이나 예리했고 기억 역시 마모되는 법이 없었다.
노인은 다른 요정들과 긴 시간을 보낸 다음이면 이곳에 들르곤 했다. 막내아들의 거처였다. 그는 수십 해 전에 가문을 떠났지만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주인은 잠시 외출했을 뿐이고, 언제고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처럼.
막내아들과 두 딸을 담은 액자가 노인을 몽상으로 이끌었다. 기억들이 파도처럼 부딪혀 왔다. 둘째 딸은 지병 탓에 본채 바깥으로는 나가지 못했지만 건강한 이들보다 더욱 많은 것을 보았다. 그녀는 작은 짐승들을 보내 막내를 좇았고, 무언가 나쁜 일이 생긴 날에는 이 방에서 동생을 기다리곤 했다. 그렇게 문이 열리면…….
문 열리는 소리가 추억을 산산이 부수고 들어왔다.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노인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청지기께서 무슨 명을 내리셨느냐?"
"논의를 전해 듣고 싶어 하십니다. 로야페타 사건에 대해, 의회가 얼마나 많은 것을 알아냈는지 궁금해 하시는군요."
노인, 아자라스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삼켰다. 그는 스티그미르의 동생이자 테네브로즈의 아버지였고, 어둠달의 가주였으며, 솔로틀의 종복이었다.
"아즈리온 교단의 사제가 단신으로 수정 거인을 제압했다는구나. 이번에도 소년 시종이 곁에 있었고. 아마도 막내일 게다… 의회의 판단도 마찬가지야."
나트람이 메기도의 시야를 통해 확인한 것은 벨레다의 존재뿐이었지만 확신을 얻어 내기에는 충분했다. 사제 일행에 대한 소문이 이미 파다하게 퍼졌던 것이다. 장신의 사제. 성흔을 받은 소년. 그리고 금발의 소녀. 물론 사제와 소년의 외관은 지금껏 모인 정보와는 달랐지만, 그건 오히려 환술에 대한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나트람이 제 아들의 피를 따로 받아 두었더구나."
"쉭겐이 점괘를 보았겠군요."
"별들이 나우파나 폐허를 가리키고 있다. 2교구에서, 정확한 시일을 알아내기 위해 계산을 거듭하는 중이야."
별자리는 많은 것을 말해 주지 않았다. 폐허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게 무엇일지도. 하지만 말루카에서 일어난 일을 복기한다면, 추론은 가능했다. 이제는 나우파나의 별이 떠오를 것이다. 또 다른 신위가 인간들에게로 넘어가는 것이다.
"인간들이 수정 심장을 넘본다면… 막아내야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야. 추적자들이 보내질 게다. 만약 별자리가 뒤틀리지 않았더라도, 마찬가지로……."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모르겠다."
아자라스는 그 한 마디를 툭 던져놓고는 입을 다물었다. 다시 소리가 들려온 건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네 동생과 이야기하고 싶구나."
"아버님께서 원하신다면요."
오래된 주문이 장송곡처럼 들려오더니 방의 공기가 돌변했다. 맏딸의 몸을 차지한 것은 그 동생, 파니스크의 영혼이었다. 아자라스는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잘 지냈느냐."
"항상 평안하지요."
"막내는."
"제 소임을 다하고 있답니다."
온화하지만 무감각한 목소리는 동굴이 들려주는 반향을 닮았다. 한때는 깊은 질문을 나누기도 했지만 그러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아자라스는 기억 속의 자식들이 영영 사라졌음을 알았다.
"이만 돌아가거라."
"언니와 나눌 말씀이 있으신지요?"
"아니다… 너희 둘 다, 가서 쉬어라. 그게 어디가 됐건 말이다."
문이 닫혔고 아자라스는 다시 둔한 고요 속에 내버려졌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아득히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과거가 맹습했다.
수십 해 전, 솔로틀은 그의 두 자식을 택했다. 파니스크가 기나긴 투병 끝에 목숨을 거둔 직후였다. 아자라스는 잊힌 신에게 선뜻 충성을 바칠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식들을 버릴 만큼 냉혹하지는 못했다.
그는 가까스로 딸을 지켜냈다. 테네브로즈가 내쫓기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지만 다른 둘은 곁에 남긴 것이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스스로도 알았다. 하지만 아자라스는 다른 모든 혈족보다도 자식들을 사랑했다.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들이 무언가 다른 존재가 되었을지라도. 과거의 한자락을 붙잡기 위해 아자라스는 테네브로즈만큼이나 많은 일을 저질렀다. 형님을, 스티그미르를 죽였고 몇 명의 피를 더 보면서 가주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야망 넘치는 요정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저승에, 막내가 알아내지 못한 소식을 전할 수 있도록.
그는 지금껏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하지만 테네브로즈가 3교구의 요정들을 모두 죽이고 달아난 후로, 아자라스는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을 만큼 깊은 무력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는 손등으로 이마를 짚었다. 지친 목소리가, 엘드리그에게는 하지 못한 말이 눈물처럼 흘러나왔다.
"모르겠다. 나는 늙은 요정일 뿐이야. 신들끼리의 다툼은 짐작할 능력이 못 되지. 알고 싶지도 않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건 의회에서의 암투가 고작이란 말이다. 그것만큼이나 쉽고 사소한 일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이냐, 모든 영광과 권세도 죽음 앞에서는 빛을 잃고 마는데……."
그러나 아자라스에게는 죽음조차 안식이 아니었다. 그 사실이 언제나 노인을 괴롭혔다.
* * *
테네브로즈는 가끔 아버지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보통은 안타까움을 느꼈지만 진심 어린 공감이라기보다는 건조한 인지에 가까웠다. 예전이라면 슬퍼했으리라 생각하는 것과 깊은 비애에 사로잡히는 것 사이에는 머나먼 간극이 있기 마련이니까.
어쨌거나 슬픔을 모르게 된 것도 슬픈 일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그랬듯이 생각이 뚝 멎었다. 그는 거실 융단에 드러누운 채 지혜의 고리를 만지작거렸다. 정보사 사제들과 한참을 부대끼다가 저택으로 돌아와 쉬는 중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란드와르가 지하층에서 올라왔다. 돌아오면서 교구 차원문을 쓴 모양이었다.
"뭘 하셨기에 술 냄새를 그렇게 풍기십니까. 같은 방에만 있어도 취하겠습니다."
"어쩌다 보니 위스키로 목욕 한 번 했다."
"나으리께서는 좀 숨어 다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안 그래도 소문 다 났더라. 요정 쪽에서도 뒷조사가 들어왔다던데. 내가 어디 있는지를 모르는 거지 누구인지는 대충 알 거야."
"그걸 알면서도 위스키로 목욕을 하신 겁니까."
"낮술 하는 주정뱅이가 화신이라고 누가 믿겠냐. 같이 마신 새끼도 안 믿더라."
"흠, 나으리를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안 취하는 게 아니라, 항상 취해 있어서 술이 효과가 없는 게 아닌가 하고……."
"하여간 이 새끼는 말을 이쁘게 하는 법이 없어. 일단 씻고 이야기하자."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이번의 잔소리도 취미였다. 란드와르가 술냄새를 풍기며 시내를 누비든, 얌전히 세카두 저택에 누워 있든 간에 나우파나 폐허에 추적대가 보내지는 건 정해진 미래였던 것이다.
테네브로즈는 란드와르가 목욕을 마치고 나올 때까지 계속 거실에서 데굴거렸다. 란드와르는 요정을 쓰레기봉투 찢는 길고양이를 보듯 내려다보다가 그 뒤편의 소파에 걸터앉았다.
"저번에 이야기했잖아. 먼저 타일라프람으로 갈 거야. 데려올 애가 하나 있어. 나우파나 폐허는 그 다음이고."
란드와르가 말하는 것은 마검사 소년, 로안이었다. 재능은 마법 쪽에 있지만 아즈리온 신화를 너무 많이 읽은 탓에 검술을 배우겠다고 설치는 꼬마 말이다. 일단은 원소학이나 제대로 연마하라며 집에 돌려보낸 상태였다. 방계긴 해도 이름난 마법사 가문의 일원이니만큼 지원은 충분히 받고 있으리라고 했다. 조만간 가서 데려올 거라고도.
"예, 기억합니다."
"그런데 약속한 날짜까지 보름 정도가 남았거든. 그때까지 세카두에서 가만히 있어야겠냐, 아니면 뭐라도 해 보는 게 좋겠냐."
"섣불리 돌아다녔다가는 요정을 더 만나게 될 텐데요."
"그건 그런데."
란드와르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석연찮은 듯 미간을 좁혔다.
"어차피 나우파나 일까지 끝낸 다음 다 밝힐 거거든. 요정들도 알 건 대충 알고. 그러면 요정들 좀 더 만나도 상관없는 게 아닌가 싶어서. 이제는 메기도처럼 위험한 놈도 없다고 했고……."
"가만히 있기 싫다는 말씀이시지요."
"시간낭비라고 생각하지 않냐."
"어차피 저희는 바쁠 예정인데요. 저는 정보사 일을 돕는 중이고 벨레다는 기술 교류를 가야 합니다. 한가한 건 나으리 하나뿐이라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