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개 같은 술친구 (1)
밤이 지나갔고 해가 밝았다. 란드와르는 다른 놈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동안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다. 이게 바로 원청과 하청과 재하청의 관계였다. 차원 생쥐들은 서른네 살 한국인에게 일을 떠넘기고, 한국인은 다시 이스트리아 사람들에게 업무를 배분한다. 이 얼마나 합리적인 체계인가?
물론 누워서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마당에 나와 공을 던지던 란드와르는(공을 던지면 펠로시가 물어왔다) 불현듯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다. 잘 생각해 보니 이 짓을 시작한 후로 중요한 대목에는 어김없이 펠로시가 끼어 있었던 것이다.
그랬다. 연금술사의 숲에 가기 전에도, 지하 투기장에서도, 말루카에서도 펠로시는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로야페타에 가게 된 것까지도 모두 이 정신 나간 도박중독자 때문이었다.
이거 뭐, 반신 같은 거 아니야?
"너, 그… 어릴 때 이상한 거 먹은 적 있냐?"
사모예드는 입을 벌려 공을 떨어트렸다.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개 목구멍으로부터 빠져나왔다.
"무슨 소리예요?"
"수정 조각이나, 살덩어리나, 아무튼 이상한 거."
"아뇨?"
티아에게도 물어보았지만 평범한 늑대인간이라는 대답이 나왔다. 믿을 수 없었다. 테네브로즈를 데려와서 영혼을 들여다보도록 시켰다. 여전히 평범한 늑대인간이었다.
"나으리, 세상에는 우연이라는 게 있습니다."
현대인 이강현은 별점술이 과학인 세계의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물론 일상 속에는 우연이라는 게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 단어를 꺼내들 때가 아니었다.
"우연이 겹치면 필연 아니냐."
"나으리께서 제 일을 맡아 주신다면 제가 그 필연이라는 걸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됐으니까 가서 일이나 해라."
간만의 휴식과 맞바꿀 만큼 심각한 의심은 아니었다. 란드와르는 다시 빈둥거리면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잘은 몰라도 펠로시도 만만치 않게 별자리가 망가져 있는 것 같았다. 그걸 확인하려면 변경에 가서 이스빈드를 만나야 한다. 별점술은 인간들에게는 실전된 기술이니까. 짧게는 오십 년, 길게는 백 년을 배워야 겨우 한 사람 몫을 하는 분야라서.
생각이 거기에 닿자마자 또 다른 의문이 튀어나왔다. 이스빈드는 란드와르의 정체를 눈치 채고 있지 않을까? 그때 이스빈드는 명반이 고장 난 것 같다면서 당황했고, 자신도 별생각이 없었지만…….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티아가 핀잔을 주었다. 그래요, 내가 미안합니다. 그런데 그럴 수도 있죠. 어차피 조만간 죄다 알게 될 텐데.
<수정 요새> 시나리오까지 끝마친 다음 바로 공표할 작정이었다. 요정 측에서도 알 건 다 아는 판에, 화신이 내려왔다는 사실을 숨겨 봤자 이득이 없었다. 그 다음부터는 아예 인간 도시랑 엮일 일이 없기도 하고.
로안을 데려오고, 나우파나 폐허에서 수정 심장을 얻고, 황무지에 가서 와그다스 학자들을 만나고, 타마기스의 황제를 죽인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앞으로의 전개를 알아도 막막한 느낌이 있지만 어쨌거나 그렇다.
란드와르는 업무 스트레스와 함께 위스키를 땄다. 혼자라서 그런지 술맛이 그닥이었다. 제대로 마실 상대가 누가 있지? 개한테 술을 먹이면 동물학대고, 벨레다는 어린애니까 넘어가고, 요정 놈은 술은 입에도 안 대고, 정보사 사제들은 바쁘고.
차례차례 소거법을 적용해 나가자 남은 사람이 한 명밖에 없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알톤이라면 받아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용병 사무소에 간 첫날, 시비를 걸기에 어깻죽지를 부러뜨려 준 놈 말이다. 어쨌든 그럭저럭 훈훈하게 화해하고 끝냈으니까.
후드를 뒤집어쓰고는 용병 사무소로 갔다. 어깨가 넓은 갈색머리 남자가 대기소에서 노닥거리고 있었다. 알톤이었다. 으슥한 곳으로 데려간 다음 얼굴을 보이자 녀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형씨, 죽은 거 아니었어?"
"내가 왜 죽어?"
"그, 뭐야… 연금술사네 물건 배달하다가 용을 만났다고 들었는데."
란드와르는 소문이 대체 어디서부터 새어 나갔을까 생각해 보았다. 카리나가, 그러니까 연금술사의 딸이 이야기를 하고 다닌 걸까? 가능성은 많다. 아예 이렇다 할 범인이 없을지도 모른다. 파편적인 정보를 모으면 커다란 윤곽이 나타나기 마련이니까.
"누가 그래?"
"누구라니, 그냥 소문이 다 났어. 아, 그래. 형씨 소식을 묻고 다니는 놈들이 좀 있긴 했지. 다섯 달쯤 전에 한 번 그러더니 요즘 갑자기 또 생기더군."
소문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사람들의 후각 역시도. 란드와르는 표정 관리를 하려 애쓰면서, 뒷조사를 하고 다닌 잡놈들이 누구일까 생각해 보았다. 다섯 달 전에 보내진 녀석은 벨레다의 수하일 공산이 크다. 그리고 지금은…….
씨발, 하나뿐이지. 요정들이다. 어디에서부터 역추적이 들어왔는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바단의 별이, 그리고 지하 투기장에서 볼로디아를 빼온 게 화근이 되었을 것이다. 연결고리를 짚어 나가다 보면 테빈을, 연금술사의 숲을, 그리고 그 임무를 맡은 용병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
하여간 쉬운 일이 없었다. 오래된 격언이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다 자신만큼은 똑똑하다, 고. 그런데 이렇게까지 추리력이 좋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다닌 거야? 일단 파문당한 건 확실한데."
알톤은 고개를 숙여 란드와르의 허리를 힐끔거렸다. 칼자루에 교단 징표가 없는 게 눈길을 끈 모양이다. 최대한 눈에 뜨이지 않을 요량으로 떼어놓았는데 이런 오해를 만들고 있었다. 알아서 생각하라지.
"일이 좀 복잡하게 됐어. 나머지 얘기는 술이나 마시면서 하자고."
"술친구 찾으러 온 거야?"
"그래."
대답이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알톤은 미심쩍다는 투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랑 형씨가 그렇게까지 친했던 것 같진 않은데."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 술 마실 상대는 더더욱 없고."
"무슨 일인진 몰라도 나까지 엮어 넣는 건 사양이야."
"우리 사이에 섭섭하게 굴지 말고."
"우리가 무슨 사이인데?"
"좆같은 사이지."
알톤은 란드와르를 빤히 바라보다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이렇게 나오셔야지.
"술값은 형씨가 내는 거지?"
"돈은 많아. 조용한 데로 가자고."
* * *
알톤이 고른 곳은 각실이 있는 고급 주점이었다. 보아하니 떳떳한 이야기를 할 것 같진 않은데, 이런 곳이 낫지 않겠냐는 게 놈의 말이었다.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란드와르는 위스키 한 병에 생햄을 주문하고서는 대화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우리도 그 연금술사가 카스바 쪽이랑 얽혀 있는 건 대충 알았거든. 테빈이랑 일해 본 놈들도 몇 있어. 그런데 형씨가 연금술사네 임무 맡고 며칠 지나서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형씨 소식을 묻고 다니는 거야. 뭐가 있구나 했지."
"용 얘기는 또 누구한테 들었어?"
"그게 소문이 안 돌 리가 있나, 알 사람은 다 알지."
"자세히 말해 봐."
"며칠이 또 지나더니 늪지대 건너가는 수레에는 위험 할증이 잔뜩 붙었다고. 물어보니까 테빈이 수레를 부숴 먹었대. 지나가다가 용을 만났다는 거야."
입속으로 앓는 소리를 내다가 위스키를 한 잔 더 따랐다. 이런 종류의 소문이라면 정보사가 뭘 하든 막을 방법이 없다. 알톤 놈은 란드와르의 속은 모르고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비싼 곳에 와서 신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었던 거야? 한 몫 단단히 잡은 모양인데."
"뭐일 거 같아?"
알톤은 생각에 잠긴 듯 턱을 매만지다가 알았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사제 노릇은 때려치우고 상단에 취직했군, 그렇지? 차원문으로 먼저 카스바에 간 거야. 늪지대에 따라가진 않았고."
"세카두에 돌아온 이유는 뭐라고 생각해?"
"보나마나 거기서도 성질부리다가 해고당했겠지."
하여간 인성은 똑같이 처참한 새끼한테 이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지 못했다. 란드와르는 잔을 소리 내어 내려놓고는 으르렁거렸다.
"술 사주는 사람 앞에서 할 소리야?"
"내 성격 알면서 새삼스럽게."
"그건 그래."
알톤 놈도 자기객관화는 되는 모양이었다. 화를 누그러뜨리고는 다시 잡담을 시작했다. 할 이야기는 차고 넘쳤다. 바단의 별이 뜬 것에서부터 로야페타에 마력 폭풍이 휘몰아친 것까지. 추가금 붙은 임무가 많아져서 좋긴 한데 시국이 너무 뒤숭숭하다고 했다.
"형씨가 교단에 남아 있었으면 물어봤을 텐데, 알잖아… 뭔가 엄청난 게 일어나고 있어. 늑대인간들이야 잘 됐다고 쳐도, 요정이 로야페타 한복판에서 폭발을 일으킨 건 보통 일이 아니지. 보라색 별도 그렇고. 내일 당장 화신이 세카두에 나타나도 놀랄 사람이 없을걸."
란드와르는 마음속으로 알톤의 발언을 정정했다. 화신은 이미 세카두에 있어. 세카두의 고급 주점에서 성격 나쁜 용병이랑 위스키를 퍼 마시는 중이지. 두 달쯤 뒤에는 그걸 모두에게 까발릴 예정이고.
그러자 질문이 하나 생겼다.
"화신한테 할 말은 있냐."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만약, 화신이랑 단 둘이서 이야기할 수 있으면 어떤 말을 하겠냐는 거야. 예전엔 교단 소속이었다면서."
"음."
짧게 신음한 알톤은 묵상하듯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입가에는 밝은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엿이나 먹어라?"
"진지하게 그럴 거야? 화신한테 욕해도 돼?"
"어차피 파문됐는데 무슨 상관이야."
"그거 잘 기억하고 있어라. 진짜 말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알톤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농담으로만 들리는 모양이었다. 진담이야, 이 새끼야.
어쨌거나 지금 당장 밝힐 일은 아니었다. 란드와르는 위스키 한 병이 모두 바닥난 걸 보고는 일어섰다. 혼자서 마실 때에는 아주 물마시듯 마셨는데 대작할 상대가 있으니 속도 조절이 됐다.
그래도 이쯤에서 놓아줘야겠지. 보통 인간은 위스키 반 병이면 잔뜩 취하니까.
"나 만난 거 어디 가서 이야기하고 다니지 마."
"쫓기는 몸인가?"
"그래. 한둘이 아니야."
"카스바에서 사고를 제대로 치셨군. 공짜로 입막음을 할 생각은 아니겠지."
뜻밖의 반문에 란드와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뭐, 협박이라도 할 생각인가? 그런다면야 수도원에 가져다 박으면 그만이다. 그는 수용소에 한 자리를 추가하기 전에 일단 요구사항부터 들어 보기로 했다.
"뭐, 돈이라도 찔러 줄까?"
"꼬냑 한 병만 시켜 줘. 치즈랑."
"더 마실 수 있어? 충분히 마신 것 같아서 일어난 건데."
"의외로 주량이 별로시구만. 나야 통으로 가져다 줘도 마시지."
알톤만 괜찮다면 자신이야말로 통으로 마실 수 있었다. 낄낄 웃고는 다시 앉았다. 첫인상은 개 같았는데 이제 보니 마음에 드는 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