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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17화 (118/258)

117화 good were it for that man if he had never been born (3)

고발장이 날아든 후로 메기도는 신경이 잔뜩 곤두섰다. 그때, 큰 소리로 외친 게 화근이 되었음이 틀림없었다. 그때 본가에는 온갖 가문의 요정들이 모여 있었으니까, 2층에도 듣는 귀가 있었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그 일로 질책을 받지는 않았다. 나트람은 식사 자리에도 모습을 내밀지 않을 만큼 바빴던 것이다. 그러나 메기도는 더욱 큰 암운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모든 일을 끝마친 뒤에, 나트람은 건방진 아들에게 어떤 처분을 내릴까? 헤이딘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감히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메기도는 긴장과 불안 속에서 세 달을 보냈다. 고발이 무혐의로 마무리되고 헤이딘도 풀려 나왔을 때, 그는 러스터에게서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헤이딘은 울타리 너머의 별채에 갇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아무도 만나지 못한 채, 평생 거기에 매여 있어야 할 거라고. 마력 구속구를 낀 채.

러스터는 소년이 나트람에게 한 말을 모르고 있었다. 알았더라면 헤이딘의 일을 그대로 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하인은 아직 자신의 편이었다. 묘한 안도가 느껴졌지만 순간이었다. 무력감이 다른 감정을 게걸스레 삼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절망을 뚫어내며 분명해지는 것도 있었다. 삼촌의 평생을 망치고서도 어제처럼 살아갈 수는 없었다. 무언가를 해야 했다. 무언가 도움이 될 일을… 메기도는 그 결론을 수없이 곱씹었고, 나트람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  *  *

나트람은 은발의 신관과 함께 3층의 서고를 거닐고 있었다. 메기도는 심호흡했고, 아버지에게 독대를 청했다.

"네 삼촌 때문에 온 것이로구나, 그렇지?"

나트람이 차갑게 내뱉었다. 메기도는 대답해야 할지, 아니면 일단은 부정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낯선 신관 앞에서 용건을 입에 담는 건 현명한 판단이 아닐 듯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년이 망설이는 사이에도 아버지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왜, 자비를 구걸해 볼 생각이냐? 헤이딘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판단력도 염치도 없어야만 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 네가 딱 그 꼴이지 않으냐!"

메기도는 신관의 눈치를 살폈다.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는 걸 보면, 나트람도 거리낌 없이 질타를 내뱉는 걸 보면 저 자도 전말을 모두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건 아니에요. 그냥… 저는 세 해쯤이 지나면 삼촌과 비슷한 키가 될 거예요. 그때가 되면 삼촌을 도시 바깥에 풀어 주고, 저를 별채에 가두고 불을 지르셔요. 그리고 삼촌이 불타 죽었다고, 저는 집을 떠났다고 말하고 다니셔요. 그런다면 못마땅한 친족을 오래도록 집안에 둘 필요도 없으니 아버지께도 좋은 일이겠죠."

"내가 그럴 수고를 들일 이유가 뭐란 말이냐?"

"아버님께서 삼촌을 이 도시로 다시 데려왔으니까요! 삼촌이 황무지에 계속 머물러 계셨더라면 모두가 행복했을 테고, 이런 일도 없었겠죠!"

그렇게 외치자마자 눈앞에 불꽃이 일더니 뺨이 얼얼해졌다. 메기도는 잠시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고통보다는 당혹이 더욱 컸다. 이건 하인에게나, 그것도 인간 노예에게나 가하는 벌이었다.

"네 할머니께서는 그 놈을 끔찍하게도 사랑하셨지. 살려서 데려오지 않으면, 내가 후일에라도 동생을 죽이면 가주 자리가 피송곳니 놈에게 넘어갈 거라고 떠들어댈 정도로 말이다. 병들어 죽어가면서도. 그런데 보아라, 이제는 은빛매의 주인이 내 손을 붙들지 않으냐!"

메기도는 이어지는 말을 이해하려 애썼다. 일드얀이 그를 불러 정치적 동맹 관계를 제안했다는 것. 하지만 헤이딘은, 나트람을 붙들어두는 목줄로 남게 되었다는 것. 가문에 배반자를 남겨 둔다면, 그것만으로도 치명적인 약점이 될 것이므로.

"그래서요? 날 가두고 불을 질러요! 우리 둘이 없어지는 건 아버님께도 기쁜 일이 될 테니까요! 사고를 두고 뭐라 따질 수 있겠어요? 몸이 불탄다면 영혼마저도 빠르게 흩어지겠지요!"

"내게 명령을 하는구나. 이 일을 자초한 건 모두 너인데 말이다……."

나트람의 두 손이 메기도의 목을 움켜쥐었다. 목뼈가 짓눌리면서 숨을, 혈류를 가로막았다. 흐려지는 시야에 나타난 것은… 미소? 웃고 있단 말인가? 메기도는 눈을 부릅뜨고는 아버지를 똑바로 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타오르듯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시선이 마주친 순간 불길은 재빨리 자취를 감췄다. 손아귀에서 풀려난 메기도는 컥컥거리다가 덤벼들듯이 울부짖었다.

"그래요, 아버님께서는 제가 죽기를 바라시는군요! 언제나 알고 있었어요!"

"아니, 아니다… 지금은 됐어. 알아서 하거라."

나트람은 놀이에 흥미가 식은 어린아이처럼 중얼거렸고, 등을 돌려 걸어 나갔다. 은발의 신관은 메기도에게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리고는 그 뒤를 따랐다.

이윽고 거짓말을 닮은 평안이 서고를 뒤덮었다. 메기도는 혼란 속에 잠시 굳어 있다가… 그대로,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세상이 한 차례 뒤집히더니 하얀 뼈가 무릎을 뚫고 나왔다.

*  *  *

언제나 원했던 것은, 헤이딘이 그런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지 않게끔 하는 것. 마음을 부숴 놓고 삶과 죽음마저도 자신의 손아래에 두는 것. 그래서 놈이 무릎 꿇고 개처럼 애걸하는 모습을 보는 것.

그러나 헤이딘의 환영은… 메기도는 죽음의 문턱에서도 기세를 잃지 않았고, 그 사실은 나트람을 실망시켰다.

*  *  *

고통이 치솟을 때마다 눈앞이 번쩍였다가 어둡게 물들기를 반복했다.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었다. 메기도는 타오르는 암흑 속에서 허우적댔다. 러스터! 삼촌! 삼촌, 삼촌! 아직 유령이 되지 못한 기억들이 얼핏 떠오르는 꿈처럼 머릿속을 맴돌다가 사라져갔다.

그는 나트람의 말이 옳음을 알았다. 아버지는 가문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선택을 했을 뿐이다. 치기 어린 분노로 안식처를 부순 것은 오로지 자신이었다. 화를 이기지 못하고 난간에서 몸을 던진 것도, 모두.

앞선 선택은 헤이딘의 삶을 앗아갔다. 그렇다면 이번의 결정은 자신을 죽일 수 있을까? 메기도는 부디 그러길 빌었다.

"둘째 도련님, 깨어 계십니까?"

낯선 목소리가 어딘가 먼 곳에서 울렸다. 메기도는 가까스로 말을 걸어오는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렸다. 나트람의 곁에 있던, 은발의 신관이었다. 그는 더듬거리면서 되물었다.

"도련…님……?"

"당분간 이 댁에 신세를 지기로 했거든요. 그러니 마땅히 하인의 예를 갖추어야지 않겠습니까."

신관의 저의를 깊이 파고들기에는 고통이 너무 거셌다. 하지만 그가 좋은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님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뼈가 부러진 소년을 도울 작정이었더라면 이렇게 말을 걸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아버님께서는… 내가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 것도 지겨워지신 모양이죠."

"어르신의 명령 때문에 온 건 아닙니다. 며칠쯤 더 내버려 두다 거둘 작정이라던데요."

"그러면……."

"둘째 도련님을 위해 왔지요… 어린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너그러워지거든요. 소원이라도 있으십니까?"

제사장도 가주도 아닌, 일개 요정 하나가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이 무엇일까? 그렇게 묻자마자 참담한 기분이 닥쳐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나트람에게도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다. 이 신관이라고 해서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나를… 죽여 줘요."

"성년식을 치른 이의 목숨만을 거두겠다고 서약했습니다. 다른 소원을 말해 봐요."

하지만 소원이 있을 리가 없었다. 무엇이든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를 탓할 마음도 없었다. 뇌리에 남은 것은 자학뿐. 헤이딘이 시킨 대로, 본가로 돌아가서 나트람을 섬겼더라면 이럴 일도 없었을 거라고. 모두가 자신의 잘못이라고.

"아이조차 죽이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군요. 나를 내버려 둬요."

"글쎄요, 고통스러운 기억을 감춰 드릴 수는 있지요."

기억을 없애는 주문이야 있었지만 몇 달을, 한 해를 모두 지울 정도는 아니었다. 어쩌면 신관이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부터가 환각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망이 스스로 움직이면서, 또 다른 소망을 전해 오는 것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참 좋겠죠… 이게 헛꿈만 아니라면……."

"그래요, 두 분이 모두 허락을 해 주시는군요. 너무 염려하진 마십시오. 언젠가 둘째 도련님께서 아픔을 감당할 준비가 되면, 잊힌 것들도 자연스레 떠오를 겁니다."

낯설도록 부드러운 목소리에, 메기도는 힘겹게 눈꺼풀을 열었다. 번뜩이는 초록색이 시야 한 귀퉁이를 스치더니 평생이 망각 속으로 사라져갔다.

*  *  *

로야페타에서 남은 일을 마치고 식사 대접까지 받은 뒤 세카두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밤이었다. 란드와르는 거실 소파에 누워 막연히 빈둥거렸다. 이스트리아에는 4K급 빔프로젝터도 넷플릭스도 없었던 것이다(머릿속에 직접 영사해 드릴까요? 아뇨, 됐습니다.). 물론 아즈리온 전서를 읽어 볼 수도 있겠지만 여가시간을 공부에 바치고 싶지는 않았다.

란드와르는 대신 기억을 되짚어가기 시작했다. 되도 않는 판타지 세계에 처음 떨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를. 그러자 궁금증이 하나 생겼다. 테네브로즈도 사이라크만큼은 아니지만 나우파나 마법을 익혀둔 상태였기 때문이다. 최소한 게임상으로는 그랬다.

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요정을 보았다. 융단에 시체처럼 엎드려 있었다.

"너 투기장에서는 왜 맞았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놓고 싸우진 못해도 나우파나 마법 간간이 써 주면 됐을 거 아니냐. 무색 마력이 검출이 돼도 그건 고위 사제나 되어야 아는 거란 말이야. 카스바에서 그거 좀 쓴다고 들키겠냐고. 색이 보이는 것도 아닌데."

"그래서 썼는데요. 물구슬을 터뜨린다고 손이 미끄러져서 칼을 놓치는 게 말이나 됩니까?"

"그렇구나."

시큰둥하게 대답한 란드와르는 머릿속에 불꽃이 튀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 씨발, 인간들 앞에서 요정 마법 썼다는 거잖아. 너 진짜 들키면 어쩌려고 그랬냐?"

"왜 안 쓰냐고 따지다가 이제는 또 왜 썼냐고 따지시다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요정 놈은 당황하지도 않고 줄줄이 답을 내뱉었다. 참 타당하고 할 말이 없는 논변이었다. 란드와르는 욕을 하기에도 애매하고 가만히 있기에도 애매한 기분 속에서 가만히 누워 있었다. 이윽고 생각의 흐름이 속도를 높이면서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실어 날랐다.

"아무튼 메기도 말이다, 다시 만나게 될 거거든. 나우파나 폐허에 걔 기억이 있어. 영혼인지 기억인지, 아무튼 간에."

나우파나 폐허의 중심부에는 <수정 요새>라 불리는 거대한 구조물이 있다. 마흐트 회당에 놓여 있던 마력 결정 원석이 거수로 변이한 것처럼, 천 년간 자라난 수정이 도시 전체를 뒤덮은 것이다.

섣불리 들어갔다가는 심장의 광기에 휘말리고 말지만, 이성을 유지할 방법이 있다. 수정 요새 전체에 퍼진 기억 조각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다.

기억 조각의 종류는 셋. 인간 마법사와 요정 전사, 그리고 요정 소년. 플레이어의 목표는 세 진영 중 하나를 택해 다른 조각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수정 심장이 안정화될 수 있도록.

공략상으로는 어떤 진영을 택하든 전개는 똑같다. 메기도와 헤이딘의 관계가 마음에 걸릴 뿐이다. 그렇게 정신 나간 놈의 유언이 헤이딘에게 남기는 사과라는 건… 뭔가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걔가 죽으면서 한 말이 신경 쓰이거든. 나트람도 아니고 헤이딘한테 사과를 할 이유가 없잖아."

"이유야 있죠. 우리 둘째 도련님이 입 간수만 잘 했으면 영감도 무사했을 거란 말입니다."

"그래?"

일드얀과 쉭겐에 대한 설명을 모두 들은 란드와르는 이미 수십 번은 했을 말을 또다시 입에 담았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지겨운 대사였지만 적절한 반응이 달리 없었다.

"그런데 왜 말을 안 했어?"

"예전엔 친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가뜩이나 급한 상황에 구구절절 이야기할 문제는 아니라 대강 넘어간 겁니다."

"아니야. 뭔가가 있어."

란드와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요정 놈이 비록 도덕이 부족하고 수상쩍고 음흉한 새끼긴 하지만 사리분별은 가능했다. 뭔가 따로 감춰야 하는 게 있어서 그렇게 얼버무린 게 분명했다.

"솔직히 말하자. 지금 이야기하면 욕 안 하고 넘어간다."

"뭘 솔직히 말하라는 겁니까."

"니가 숨기고 있는 거."

"제가 뭘 숨기고 있단 말씀이십니까."

"나는 모르지. 숨긴 사람이 알지."

뱉고 보니 미친 소리였다. 보아하니 테네브로즈도 할 말이 없어 보였다. 란드와르는 찜찜한 느낌을 의식 저편에 던져 버리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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