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good were it for that man if he had never been born (1)
"앉거라."
나트람은 서재에 등받이 없는 의자를 하나 두고 있었다. 러스터는 잠시 머뭇대다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설명조차 듣지 못하고 불려온 상태였다.
주인의 입가에는 묘한 웃음이 서려 있었지만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하인들은 나트람을 진실로 위험하게 만드는 것은 격노가 아니라 유쾌함이라 말하곤 했다. 헤이딘이 목숨을 잃은 후로는 처음 보는 미소였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좋은 소식이 있어 불렀다. 네 주인에게 할 말이 있느냐?"
러스터는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그는 나트람의 시종이었지만 메기도의 발작에 휘말려 부상을 입은 탓에 지금은 온종일 숙소에서 쉬고 있었다. 게으름을 꾸짖으려는 걸까? 혹은 늙은 하인에게 영지를 약간 떼어 주려는 것일까?
침묵이 길어졌다. 이윽고 알 수 없는 기운이 러스터의 고개를 잡아당기듯 들어 올려 시선을 맞추었다. 서둘러 대답하라는 투였다. 그는 빙판 위를 걷는 듯한 기분 속에서 입을 열었다. 잘못 발을 내디뎠다가는 얼음물 속에서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신중하게, 이 폭군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문장을 찾아보자.
"저는 그저 늙은 하인일 뿐입니다. 감히 불만을 품은 적도, 삿된 마음을 가진 적도 없습니다. 팔이 모두 나은 뒤의 처분도 모두 가주님의 뜻에 맡기고자 합니다."
"나는 네 주인에 대한 것을 물었다. 내게 할 말을 묻지 않았어!"
나트람과 눈이 마주친 순간 러스터는 그 안에서 이글거리는 불길을 발견했다. 검고, 어둡고, 차가운 불길이었다. 러스터는 헤이딘의 두 눈이 도려내진 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때 나트람이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도.
세계가 잠시 멎었다. 그는 헐떡이듯 질문했다.
"작은, 작은 도련님의 혼을 찾으셨습니까?"
* * *
전쟁이 끝나고 혼란이 수습된 후, 도망자의 후손을 찾아 죽이는 것은 야스와다 추적대의 소임이 되었다. 젊은 추적자이던 헤이딘은 임무를 받아 황무지로 향했고, 슈문의 지성소를 발견했다. 그리고 빠르게, 금지된 마법에 빠져들었다.
헤이딘이 잊힌 지혜를 탐닉하는 동안 야스와다에서는 완전히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즉 별불꽃의 가주가 갑자기 앓아누웠던 것이다. 차기 가주 후보는 셋이었다. 나트람, 딤 나겔, 그리고 헤이딘.
어머니는 맏아들을 불러 동생을 찾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지 못한다면 딤 나겔에게 가주 직분을 넘겨줄 것이라고. 나트람은 별 수 없이 황무지로 떠났고, 몇 달간의 탐색 끝에 헤이딘을 발견했다.
헤이딘은 황무지에 남길 원했지만 선택은 나트람의 몫이었다. 그는 동생을 제압한 뒤 함께 야스와다로 돌아갔다. 그때 어머니의 병세는 더욱 깊어져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장례를 치르고서 한 해가 지나 나트람이 가주 자리에 올랐다. 딤 나겔은 자신의 가문으로 돌아갔고 추적대를 떠난 헤이딘은 숲지기의 오두막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본가 뒤편의 작은 숲이었다.
* * *
"삼촌은 축연에는 안 오시나요? 이제 스무 날쯤 뒤인데, 아주 떠들썩할 거예요."
"형님은 날 보고 싶지 않아할 테고 나도 마찬가지인데 그게 무슨 소용이냐."
"아버님께서 말을 전하라던걸요."
소년은 입을 비죽거렸다. 첫인상은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운 성격이구나, 친해질 일은 없겠구나 싶었는데 몇 달이 지난 지금은 삼촌만큼 좋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제야 서로 알게 된 것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였다.
삼촌은 예전부터 제 형과는 사이가 안 좋았다고 했다. 그랬다가 성년식을 치른 후로는 본가에서 나가 살았다는 것이다. 할머니가 부를 때에는 가끔 왔지만 그때도 다른 가족들은 일부러 피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조카들이 누가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고.
"러스터 아저씨가 그러는데, 제가 삼촌 어릴 때랑 꼭 닮았대요."
소년의 이름은 메기도, 열 살. 삼촌과는 나이차이가 한참이나 났다. 헤이딘은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체념한 듯 고개를 돌렸다.
"그이와도 보질 않고 지낸 지 좀 됐지. 장례식이 끝난 후로는 아예 가질 않았으니까……."
"삼촌이 본가에서 함께 지내면 좋을 텐데요. 아저씨도 삼촌 이야기를 많이 하셔요. 어릴 적에는 네 분이서, 그러니까 피송곳니에 계시는 분이랑도 같이 어울려 다니셨다고요."
노래하듯 말하던 메기도는 헤이딘의 시선을 알아차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화나거나 언짢은 기색은 아니었지만 무표정한 얼굴에는 묘한 기운이 있었다. 무언가 말실수를 한 걸까? 하기야 그렇게 친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말도 안 섞고 지내는데, 큰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헤이딘은 한동안 그를 응시하다가 질문 하나를 던졌다. 여전히 감정을 가늠하기 어려운 음색이었다.
"형님은 네게 잘 해 주시냐?"
"제 아버님 이야기는 싫어하셨잖아요."
"내가 질문을 했으니 대답을 해야지."
메기도는 눈을 깜박였다. 살아온 날은 나트람이 기르던 칼린카보다도 짧았지만 사람들 사이의 기류는 본능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은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구나, 하고.
환대의 감각이 무엇인지를 되새기려면 할머니께서 정정하실 적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할머니는 그를 볼 때마다 낯설 만큼 환한 웃음을 지었던 것이다. 누나에게도, 아버지에게도 보이지 않던 웃음을.
하지만 병세가 깊어지면서 그것도 모두 지난 일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도 한 해가 흐른 지금은…….
"잘 해 주셔요."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다. 솔직히 말해 봐."
아버지에게 미움 받고 있다는 느낌은 언제나 있었다. 자신이 무언가 잘못했나 싶은 마음에, 일부러 어른들의 말투를 흉내 내고 눈물을 참기도 했다. 혹은 삼촌과 닮은 것부터가 문제일지 모른다는 생각까지도.
하지만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의심은 말해질 때에야 비로소 사실이 되니까. 아직은 그 모두를 의심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메기도는 오래도록 침묵했고, 헤이딘은 지친 투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다. 나는 축연에는 가지 않으려 해. 대신 너는… 오고 싶을 때면 언제든 여기로 오거라. 잠깐 얼굴만 보아도 좋고, 보름을 머물러도 좋아."
"오두막에서 그렇게 오래 지냈다가는 아버님께서 좋아하지 않으실 거예요. 직접 찾아오실 수도 있고요."
"그러면 내가 돌려보내마."
메마른 그늘이 헤이딘의 얼굴을 덮고 있었다. 메기도는 그가 그런 표정을 보이는 이유도,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도 모른 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 모를 온기가 심장 바로 밑에서 꿈틀거렸다.
* * *
"조만간 연회가 열릴 거예요. 아버님께서 부제사장 직분에 오르셨거든요. 말을 전해 보라던데……."
"형님이 부제사장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내 알 바는 아니지."
"가주 취임식에도 오지 않으셨잖아요. 이번에는 한 번 들러 보셔요."
"됐다, 가 봤자 서로 얼굴만 붉힐 뿐이야. 형님과 다투는 건 이제 지겹다."
메기도는 열넷이 되었으며 자신이 나트람에게 어떤 존재인지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마법 스승으로는 헤이딘을 사사했고 매년마다 한 해의 절반쯤을 숲에서 보냈다.
헤이딘은 괴팍한 사람이었고, 생각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을 때도 있었지만, 메기도는 그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본가에는 마음 붙일 구석이 러스터 말고는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메기도가 열 살이 넘어간 다음부터 러스터는 정중한 거리감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하인과 도련님 사이에는 마땅한 간격이 있어야 한다는 것처럼.
하지만 가끔은 예전처럼, 아저씨와 꼬마로 돌아가 소소한 잡담을 나누기도 했다. 러스터뿐만이 아니었다. 메기도에게 세상은 종잡을 수 없이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야멸차게 굴다가도 간혹 과자를 챙겨 주는 누님이나, 아버지의 묘한 미소 같은 것들이. 헤이딘마저도 예외는 아니었다.
숲지기의 오두막은 방 하나와 주방을 품은 거실이 일렬로 붙은 구조였다. 메기도는 거실에서 잠을 청했고 헤이딘은 자신의 방을 썼다. 의아한 것은 헤이딘의 태도였다. 평소에는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고, 번번이 안쪽에서 문을 걸어 잠갔다. 게다가 손님이 찾아오기만 하면 특히 신경이 곤두서는 것처럼 보였다.
이 작은 오두막에 그렇게나 중요한 걸 숨겨 두었단 말인가? 어쩌면 조카에 대한 불신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고작 몇 년쯤 알고 지낸 어린아이에게 터놓기에는 너무 소중한 무언가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달라고 보챈 적도 있었지만 대답을 들은 적은 없었다. 헤이딘은 나트람처럼 신랄한 단어를 쏟아 붓는 대신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상대를 응시하곤 했다. 그렇게 멈춰 있는 모습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석상을 닮아서, 질문을 던진 사람조차도 침묵 속으로 끌려가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제는 기회가 왔다. 헤이딘이 본가의 부름을 받아 급히 나가면서, 자물쇠를 깜빡 잊고 말았던 것이다. 메기도는 한동안 닫힌 문 앞을 서성였다. 고리를 돌리고, 문틈이 천천히 벌어지는 모습을 보다가, 한 발짝을 들이면 된다는 걸 아는데도 그 모든 과정이 오래된 영웅담의 한 조각만큼이나 낯설고 불가사의하게 느껴졌다.
불안과 흥분이 한데 뒤섞이며 상상력이 끝도 없이 영토를 넓혔다. 얇은 벽 너머에 있는 것은 비밀스러운 연구거나, 제국 시절의 유물이거나, 혹은 아무것도 아닌 공상 한 뭉치. 메기도는 부풀어가는 꿈속을 배회하다가 현실에 한 발짝을 내디뎠다.
문고리를 돌리고는 문틈을 약간 벌리자마자 이질적인 황금빛이 새어 나왔다. 마치 한나절의 햇볕을 잘 말려서, 얇게 저민 것만 같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스리며 걸음을 옮기고는 문을 닫았다. 이제 등 뒤에 거실이 있었다. 그렇다면 눈앞에는…….
메기도는 곳곳에 쌓인 종이더미를 흩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정중앙의 조형물을 향해 다가갔다. 둥근 나무 기둥 위에 십육면체가 둥실 떠오른 채 빛나고 있었다. 어디에 쓰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무척이나 아름다워 보였다.
빛은 사방으로 뻗다가 종이더미에 부딪쳐 끊어졌다.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그림자들이 허공에 새겨진 별의 흔적처럼 무리를 이루었다. 십육면체가 우아하게 회전할 때마다, 그림자와 빛으로 이루어진 무용수들도 함께, 조금씩 몸을 비틀면서…….
얼마인지 모를 시간이 흘렀다. 덜걱거리는 소리가 돌진해 오며 한순간에, 찬란한 환영을 산산이 부수었다. 메기도는 딱딱하게 굳은 채 고개만을 돌려 문간을 보았다. 헤이딘이 텅 빈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갖가지 단어가 밀려 올라오며 목구멍을 막았지만 혀끝에 닿는 것은 없었다. 기껏해야 죄송하다는 말 몇 조각뿐.
"죄, 죄, 죄송해요.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어요. 그냥 문이 열리기에, 잠깐만 보려고 했을 뿐인데……."
거처를 최대한 감추는 헤이딘의 습관 때문에, 거실 창은 두터운 암막으로 감싸여 있었다. 낮의 햇살이 옷감의 올 사이로 둔하게 스밀 뿐이었다. 멈춘 듯 서 있는 헤이딘은 빛의 테를 엷게 두른 어둠 덩어리처럼 보였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시선 속에서 정적이 더욱 깊어졌다. 그러는 가운데 십육면체는 여전히, 여전히 우아한 등속으로 회전하면서, 방 전체로, 거실까지로 빛 조각을 퍼뜨려 보냈다. 물에 잠긴 그림자의 파편이 일렁이는 듯했다.
메기도는 빛의 무도회 한가운데에 앉아, 천천히 일그러지는 헤이딘의 얼굴을, 그 입이 한 번도 듣지 못한 울림을 내뱉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었다.
"돌아가거라. 네 본가로 돌아가. 그리고 내 방에서 본 것은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돼. 알겠어? 네 아버지에게도, 누이에게도, 러스터에게도, 그 누구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