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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14화 (115/258)

114화 내 잘못은 아니지 (3)

혼란은 빠르게 수습되었다. 마법사들은 건물을 해체했고 당국 사무관들은 소요사태가 빚어낸 유무형의 경제적 피해를 추산하기 시작했다. 상업 가문 총회가 소집되었고 에스웍스 쉬브가 재판대에 올랐다(미라지는 그때까지 혼수상태였다).

혐의는 명백했고 책임을 피할 방법 역시 없었다. 쉬브는 증인석에 불려 나온 란드와르를 빤히 바라보다가 자포자기한 투로 진상을 읊기 시작했다.

*  *  *

테네브로즈는 사이라크를 심문한 뒤 곧바로 세카두로 돌아갔다. 파르타와 대외적인 입장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화신과 별자리에 얽힌 사실들을 솔직히 밝힐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얼버무리고 지나갈 일도 아니었다. 구체적인 거짓말이 필요했다.

논의는 길어졌고 참석자들도 그만큼 많아졌다. 테네브로즈와 파르타의 독대는 어느덧 열일곱 명이 참여한 연석회의로 변해 있었다. 밤을 꼬박 지새운 끝에 그럴듯한 각본이 완성되었다.

*  *  *

다음 날 아침이 되어 테네브로즈가 돌아왔다. 정보사 소속 사제, 라나지트가 옆에 있었다. 그때 상업가문의 상임위원들은 전당에 모여 소식을 기다리고만 있었다. 테네브로즈는 란드와르와 벨레다의 옆에 자리를 잡았고 라나지트가 연단에 섰다.

"아즈리온의 종, 라나지트가 상업 가문의 여러분께 소식을 전합니다."

사제는 그렇게 운을 떼고서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뒤틀린 별자리에 대해서는 어제 이미 설명을 들으셨을 겁니다. 마력 폭풍이 일어난 이유도요. 하지만 이 사실을 대중에게 그대로 공표할 수 없으리라는 점은 모두 동의하시리라 믿습니다."

란드와르는 발표를 귀에 담으며 정보사 회의를 복기했다.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티아가 상황을 전달해 준 덕에 오간 이야기는 모두 알고 있었다.

라나지트의 말대로, 별자리에 대한 걸 솔직히 밝힐 수는 없었다. 엄청난 혼선이 빚어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보전 측면에서도 현명한 판단은 아니다.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밝히는 것은 패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다행히도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어낼 재료가 몇 가지 있었다. 란드와르가 다음으로 띄울 별은 나우파나의 것이라는 점. 마력 폭풍의 원인이 된 것은 무색 마력 갈래라는 점. 그리고 거기에서 뻗을 수 있는 여러 가능성들.

"최근 나우파나 폐허에서 이상 현상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보랏빛 별과 암적색 별이 잇달아 떠오르면서, 고정된 별이 제 자리를 벗어나고 옛 신의 흔적이 그에 동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보사는 마력 폭풍 사태를 복선으로 활용하기로 결론내렸다. 나우파나의 별이 떠오르는 상황을 미리 대비해 두자는 것이다. 말루카에서 그랬던 것과는 달리 정확한 시점을 알고 준비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관측에 따르면, 무색 마력 갈래가 점점 불안정해지고 있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세 번째 별이 떠오를 가능성이 큽니다."

여기까지는 밝혀도 된다는 것이, 밝혀야 한다는 것이 정보사 전체의 판단이었다. 미친 요정 한 명 때문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화신에 대해서 여쭙고 싶습니다."

"아직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질문이 꼬리를 물었지만 그뿐이었다. 그 대답만으로도 상황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했던 것이다. 격론은 다른 데에서 왔다. 발언권이 상임위원들에게로 넘어가자마자 온갖 곳에서 조용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공표시기를 조정해야 해. 마력 폭풍 사태 이후로 무색 마력 결정 가격이 235까지 올랐어… 암적색 별까지 합하면 보름 만에 3할이나 급등한 거야……."

"발표를 늦추면 더 올라가겠지요. 불확실성은 시장의 가장 큰 적이에요……."

"이봐, 마력 지맥 범람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 지금이 바로 고갈기에서 범람기로 넘어가기 직전이란 말이야… 때를 맞추기만 한다면 가격은 충분히 안정화될 거야……."

"전시태세를 계산에 넣어야 할지도 모르죠… 화신이 내려왔다면 가능성은 충분해요… 이전 시기에도, 대전쟁에 준하는 사태가 한 번 있었고……."

"우리의 대원칙을 잊은 건 아니겠지, 솔직히 밝히고 시장에 맡겨. 참여자들이 결정하는 가격을 보자고…….

"하지만 이대로라면 타격이 너무 커……."

"아무리 큰 타격이라도 도시 전체가 무너지는 것보다는 사소하지… 건전한 시장을 위해서는, 인간들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서는 최대한 정직을 지켜야 해… 이렇게 위험한 시기일수록, 금융은 믿음 위에서만 굴러가는 거야……."

이윽고 공표 시기와, 방법과, 마력 결정 생산 사이클과, 피해 복구액 분담에 대한 논의가 전당을 가득 채웠다. 앞장서 떠드는 이들은 대개 크랭크웍스와 하드라인 분파의 상임위원들이었다.

하드라인 분파는 농업과 광업을, 크랭크웍스 분파는 제조업을 담당했다. 마력 결정 시세가, 즉 동력원 가격이 매출원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는 뜻이었다. 국제유가가 농산물과 비철금속 시세에 영향을 주는 것과 똑같은 이치였다. 요정 신이고 별이고 간에 돈 걱정부터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존경심마저 느껴졌다.

"좀 놀라야 하는 거 아니냐. 신한테 기도도 하고. 돈 이야기나 하는 게 아니라."

"그러게 말입니다. 이토록 신성모독에 능한 족속은 처음 봅니다."

란드와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고의 신성모독은 무관심한 태도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누가 그랬던가, 힌두교 구루였던가? 정말로 신에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는다면 욕조차 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로야페타의 반쪽짜리 요정들만큼이나 세속적인 부류는 없을 것이다.

"요정으로서 이 상황에 대해 논평을 해 봐라. 동족이잖아."

"이건 요정이 아닌데요. 최소한 야스와다 요정들은 안 이럽니다."

하기야 요정들이 인륜과 도덕을 모르는 사이코패스들이긴 했지만 돈에 미친 것 같지는 않았다. 둘 중에서 뭐가 더 나은지는 알 수 없었다.

*  *  *

"벌써 돌아갑니까?"

"바쁜 일이 많거든요. 애당초 저로서도 이런 사태를 예상하고 온 게 아니고, 담당 사제도 따로 왔으니만큼……."

전당 회의가 어찌저찌 끝나자마자 란드와르는 아미라를 만나 돌아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단순히 바빠서는 아니었다. 생각 없이 나돌아 다니다가 또 어떤 요정을 끌어들일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냥 세카두 저택에 틀어박혀 있는 게 민폐를 줄이는 길이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마자 속이 쓰렸다. 결국 피해 배상 얘기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럴 분위기조차 아니었던 데다가 당국 사무관들이 추산한 피해액은 끔찍할 정도였다.

란드와르는 로야페타 상업지구의 공시지가가 강남 뺨치는 수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물류 허브가 봉쇄되었을 때 일어나는 연쇄반응을 실감했고, 그리고…….

나는 신인데 왜 이런 걸 고민해야 하지?

"아무튼, 상임위원직이랑 사장직 유지하시게 된 점은 다행이고… 남은 일 잘 처리하시길 빌겠습니다."

"바쁘다니 아쉽군요. 도면에 대해 논의할 부분이 있었습니다만, 차후에 다른 사제분께 말씀을 전하지요."

"각인 도면 말입니까?"

"크랭크웍스 쪽에서 관심을 보이더군요. 기술 교류를 부탁하려 합니다. 생산은 업체 측에서 도맡을 수 있습니다. 램페이지에서도 적극적으로 협조할 방침입니다."

"통상적인 각인이 아닌데, 그래도 가능합니까? 옛 요정 방식입니다."

"해석이 가능하다면 기술 사범도 있다는 말씀이겠지요. 모른다면, 가르치면 됩니다. 처음부터 각인을 배우고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원자는 많습니다. 충분한 돈만 있다면 타일라프람에서 제일가는 학자도 불러올 수 있지요."

갑작스레 머릿속이 맑아졌다. 벨레다와 헤이딘을 전투에 데려가야 하나, 제작을 시켜야 하나 고민이 많았는데 그게 단번에 해결된 것이다.

일단 타일라프람에서 각인사들을 차출한 다음 와그다스 각인을 가르친다. 당분간은 헤이딘이 고생하겠지만 시스템이 궤도에 오른 다음부터는 일이 편해진다. 란드와르 일행이 나우파나 폐허와, 황무지와, 타마기스를 드나드는 동안에도 계속 재정렬 목걸이가 생산될 테니까.

물론 그 짧은 기간 동안 완제품을 만들 수준까지 오르리라는 기대는 없다. 각인은 마법인 동시에 일종의 공예니까. 그래도 기초 작업을 분담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세부 공정이야 각각의 시나리오를 끝마치고 돌아온 다음, 벨레다가 짬짬이 처리하면 그만이고.

"비용 부담은 모두 그쪽 분들께서 해 주신다는 이야기군요…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문제라도 있나요? 이 제안을 받아들이실 경우에, 생산품은 우선적으로 정보사 측에 배정될 겁니다."

"너무 좋은 제안이라 그렇습니다."

"이건 장기적인 투자입니다. 요정들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면, 그래서 화신이 내려왔다면… 우리도 정보사에게 힘을 보태야겠지요. 수익은 이 순간이 역사의 일부가 된 뒤에 따져도 괜찮습니다."

하기야 정보사를 돕는 것만으로 재정렬 목걸이를 독점할 수 있다면 충분히 수지맞는 장사였다. 란드와르는 머릿속으로 주판을 굴려 보았다.

정보사가 얻는 것: 재정렬 목걸이 여러 쌍.

로야페타가 얻는 것: 와그다스 각인 기술, 해석된 각인 도면, 판매 수익…….

자신이 결정하고 끝낼 문제가 아니었다. 파르타에게 맡겨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사제 한 명이, 구두로 약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군요. 우선은 돌아가서 상부에 보고하겠습니다."

"계약서를 준비하겠습니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지요."

*  *  *

"…그러니까 스승님 놀이 하지 말고 제대로 잘 해. 제자들이 뭐 사라고 해도 절대 사지 말고 그냥 각인만 가르치라고."

"절 뭐로 보는 거예요?"

"귀 얇은 애."

"수익이 세 배나 났는데요!"

암적색 별에 더해 마력 폭풍 사태까지 터진 탓에 벨레다의 선물 계좌는 그야말로 연전연승이었다. 숄이 아니라 로야페타에 작은 주택 하나쯤은 살 수 있을 돈이 된 것이다. 이제는 수익을 확정했으니 정말로 벌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새끼야, 그게 중요하냐…….

"니가 그거 투자 안 했으면 건물 부서질 일도 없었어. 푼돈 벌겠다고 건물 두 채 박살낸 거라고. 알아?"

"설마요!"

"아니, 봐라. 너는 무조건 별자리가 뒤틀려 있어. 원래 죽을 운명이었던 걸 내가 살렸으니까. 그리고 메기도랑 사이라크는 뒤틀린 별자리에 이끌려서 여기에 온 거야. 그러면 범인이 누구냐. 너잖아."

"제가 죽을 운명이었어요? 왜요?"

벨레다의 반문에 란드와르는 갑자기 할 말을 잃어버렸다. 왜 죽을 운명이었냐면, 음, 게임이 그렇게 만들어져 있어서? 설명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너 지금 신한테 말대답 하냐?"

"신 아니라면서요. 신 비슷한 거라면서요."

"됐다, 씨발. 관두자."

어차피 욕은 헤이딘이 대신 해 줄 것이었다. 란드와르는 바깥으로 나와 시가를 빼어 물었다. 로야페타에서 마지막으로 피우는 담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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