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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13화 (114/258)

113화 내 잘못은 아니지 (2)

란드와르는 목욕을 마치고 나왔다. 요구한 대로 위스키 한 병이 도착해 있었다. 기분 좋게 잔을 기울이는 순간 달갑지 않은 손님이 들이닥쳤다. 아미라의 비서였다.

"휴식을 방해하게 된 점 죄송합니다만, 잠깐 시간 되시겠습니까?"

"어디 또 나가야 돼요? 겨울이라 머리 좀 말리고 싶은데."

"아뇨, 현장을 조사하는 중입니다만… 마흐트 회당에서 중요 물품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알고 계시는 바 있으시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러고 보니 메기도가 두 번째로 박살낸 곳이 마흐트 회당이긴 했다. 중요 물품이라. 신전도 아니고 수도자들이 모인 회당에 찾아다닐 만한 물건이 있나?

<마력 결정 이야기입니다. 커다란 원석을 회당 중앙에 가져다 놓았거든요. 아무래도 로야페타 지부는 돈이 넉넉하니까요.>

아, 그런 게 있었어요? 어차피 박살났을 텐데 그걸 왜 나한테 묻지?

<부서지진 않았습니다만… 수정 거인의 재료가 그겁니다. 회수는 불가능하다고 전해 주시죠. 마력에 반응해 변이하는 과정에서 오염이 심하게 됐거든요. 재처리 비용이 더 들어갑니다.>

잘은 몰라도 무척이나 비쌀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기도가 로야페타 재정에 유의미한 타격을 입혔으리라는 생각도. 아니, 잠깐만. 란드와르는 그 지점에서 중요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요정들은 결국 자미성에 이끌려서 이곳에 온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자신이 로야페타를 행선지로 잡았기 때문에 이 사태가 터졌다는 소리였다. 조금 더 근본적으로 접근하자면… 벨레다를 안 죽이고 살려 놓아서. 사과해야 하는 건가?

아니, 그런데 솔직히 내 잘못은 아니지.

"짚이는 구석이 있으십니까? 거대한 수정 덩어리처럼 생긴 것입니다. 투명하지요."

란드와르는 입속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무엇이 어쨌든 간에 모든 게 끝난 뒤에도 이 사실은 비밀에 부쳐야 할 것 같았다.

"담당 천사분께서 그러시는데, 수정 거인이 그거였다는군요. 회수는 불가능할 거라고 합니다. 오염이 너무 심해서 재처리 비용이 더 들어갈 거라던데요."

대답을 듣자마자 비서의 얼굴이 박제만큼이나 창백해졌다. 인체의 신비전에 전시해 놓아도 될 정도였다. 비서는 가까스로 인사하고는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 분담금 이야기를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났다. 서부 거래소 측에서 피해액의 상당량을 부담해야 할 거라고. 이건 정말로 미안한 일이었다.

우리가 보전해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금전적인 문제는 저희가 아니라 파르타와 논의하셔야 합니다. 혹은 로야페타 당국자들과 회동할 자리가 몇 차례 더 있을 텐데, 그때 화두를 던져 보셔도 되겠죠.>

잠깐만, 이거 마흐트랑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파울리스랑 몇 번 만나본 것처럼. 아니면 이야기를 대신 전해 주셔도 좋고.

<흠, 마흐트님의 업무는 파울리스님께서 도맡고 계십니다. 실질적으로는 그쪽에서 두 교단을 모두 관리하는 셈이죠. 직접 만나서 대화 나누시겠어요, 아니면 말씀 전해 드릴까요?>

마흐트는 파울리스와 쌍벽을 이루는 마법사의 신. 파울리스는 연금술이나 각인처럼 응용 분야를 관장하는 반면 마흐트는 원천적인 마력을 다룬다. 공학과 순수 이학 정도의 차이다. 그런 만큼 신도도 많고 세력도 크지만…….

아, 그래. 저번에 들었어요. 마흐트도 아즈리온만큼이나 상태가 안 좋다고. 설마 대화도 어려울 정도입니까?

<그런 셈이죠.>

이건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마흐트는 인게임에서부터 대사는 물론이고 초상화조차 없었던 것이다… 업무를 대신 처리하고 있다지만 마흐트 교단과 엮인 일을 파울리스에게 부탁하려니 모습이 영 좋지 못했다. 만나기 껄끄러운 것도 있었다.

티아 씨 생각은 어때요?

<모른 척 하고 잊는 편을 권합니다.>

명색이 천사신데 그래도 되는 겁니까?

<실리적인 조언을 드릴 뿐입니다. 선택은 스스로의 몫이지요.>

그랬다. 실리적으로 생각하면 입 씻고 넘어가는 게 우월전략이었다. 정보사 돈이 넉넉하다지만 피해를 모두 복구하고도 끄떡없을 정도는 아닐 테니까.

란드와르는 쓰레기가 된 기분을 느끼며 술잔을 기울였다. 안주도 없이 알코올을 들이켜서 그런지, 새삼스럽게도 충격적인 소식 덕분인지 속이 쓰렸다. 하여간 회당에 원석을 왜 들여놓아서…….

*  *  *

"스승님, 안 보세요? 이건 스승님이 직접 확인해 보셔야 하는데."

벨레다는 침대에 엎드린 채 종이뭉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미라가 넘겨준 와그다스 각인 도면이었다. 여러 가지로 다사다난했지만, 사실 이제는 쉬브가 배신한 증거보다도 마력 폭풍 사태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지만, 약속했던 보수는 제때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꽤나 복잡해 보이는구나. 작업은 세카두에 가서 시작하도록 하자. 몸이 있어야 밑줄도 긋고 해석도 덧쓰지 않겠느냐.>

물론 반지는 슈문의 영토와 이어져 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세카두의 방으로 돌아가 몸을 찾는 게 가능하긴 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인가, 도면을 반지 속으로 가져갈 수가 없는데.

"그러면 뭐, 저도 쉬어야겠네요. 오늘은 너무 바빴으니까."

벨레다는 협탁에 도면을 올려 두고서는 정자세로, 천장을 바라보고 누웠다. 오랫동안 잠수했다가 뭍으로 올라온 사람처럼 푸우, 하는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누구든 와서 사실 다 꿈이었다고 말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 요정 말예요, 어쩌다 그렇게 됐는진 들었지만 아직도 믿기가 어려운걸요. 제정신이었으면 아주 엄청났을 것 같은데……."

<형님 밑에서 자란 아이가 제정신일 리가 있겠느냐.>

"그래도 그 누님 쪽은 나트람이랑 성격이 꼭 닮았다면서요. 그게 신기하다는 거죠. 한 명은 저렇게 됐고 다른 한 명은 자기 아버지를 데려다놓은 수준이니까. 어릴 때도 저랬어요?"

헤이딘은 또다시, 익숙한 두통을 느꼈다. 세월 속에 사라진 기억들을 떠올리려 애쓸 때에는 언제나 그랬다. 별채에 갇히기 전에, 조카들과는 어떤 사이였더라? 본가에 간 적은 있었던가?

한동안, 소용없는 질문들만이 휘돌더니 다른 의문을 끌어 올렸다. 메기도가 죽으면서 남긴 말은, 미안하다는 것. 나트람이 아니라 헤이딘에게.

예전에는 무언가 특별한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나트람이 동생의 잔영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을 리가 없으니까. 자신이 그걸 보고만 있었을 리도 없으니까. 하지만 확실한 건 없었고 추론은 제자리를 답보하기만 했다.

<모르겠구나. 떠오르는 게 하나도 없어.>

*  *  *

늑대가 막 꿈을 꾸기 시작했을 때, 세계는 몹시 변덕스러웠다. 땅은 고르지 않았으며 용암이 곳곳에서 들끓었고 강이 범람했다. 방황하던 다섯 신은 저승으로 되돌아가 그 주인을 깨웠다.

늑대의 아홉 머리 중 하나가 일어나 그들의 간청을 들었고, 용을 만들었다. 용들은 땅을 밟아 다졌으며 강이 흐를 물길을 닦았다. 세계는 보다 고요해졌으나 다섯 신은 그에 만족하지 않고 더한 것을 바랐다.

"우리는 아직 별을 잘 다루지 못하니, 부디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 말에 다른 머리가 눈을 떴고, 자신의 꿈을 조금씩 떼어 나누었다. 세계로 돌아온 다섯 신은 꿈 조각으로 갖가지 물건들을 장식했다.

*  *  *

<그러니까, 성물을 훔치란 말씀이십니까? 나으리는 옷을 훔치라더니 청지기님께서는 수정 구슬을 훔치라고 명을 내리시는군요. 별불꽃 본가에 얹혀 살 때에는 금고를 열어보지도 못했는데 여기에 와서야 보다니 참 얄궂은 일입니다.>

<훔치라는 게 아니야! 꿈 조각을 되찾으라는 것뿐이지.>

테네브로즈는 잠시 생각하더니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논점과는 완전히 벗어난 이야기였다.

<되찾는다고요? 나으리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빼앗은 게 아니라 땅에 떨어져 있어서 주웠을 뿐이라고. 두 분께서 만날 날이 온다면, 물론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만, 서로 잘 통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지금이라도 말을 걸어 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솔로틀에게는 달갑지 못한 대답이었지만 하나는 동의할 수 있었다. 화신을 빌려 쓰는 게 누구인지는 몰라도, 잡담을 나눌 기회가 생긴다면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다. 특히 이 자그마한 정원사에 대해서는.

그는 때때로 테네브로즈의 마음을 잘못 도려냈다는 후회에 사로잡혔다. 아니, 사실은 꽤나 자주 그랬다. 새로운 정원사를 들일 때마다 해 왔던 일인데 왜 이 요정에게만 실수를 저질렀는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챙겨 두어라. 어렵지 않을 게다. 그 자는 너를 꽤나 믿고 있으니까.>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나저나 나으리께서 진실을 아시면 열흘 밤낮은 욕을 퍼부으시겠군요. 그럴 일이 생기면 청지기님께서 잘 말려 주십시오.>

<지금 당장 쓸 곳은 없다. 그냥 챙겨 두기만 하면 돼.>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세상의 일에 집중하고 싶은데요. 인간 늙은이에게 시달리고 있거든요. 정보사 수장이라는 작자 말입니다. 참, 누님께서 혼례만 일찍 올리셨더라면 동갑인 조카가 있을 텐데…….>

<내 소관은 아니지. 알아서 하거라.>

솔로틀은 이방인을 혐오했고 요정들을 싫어했지만 인간에 대해서는 중립적이었다. 이방인은 말할 것도 없었고 요정은 늑대와의 약속을 어겼다. 하지만 인간은… 늑대는 그들을 아꼈다.

테네브로즈가 란드와르를 돕게 만든 이유 중에는 그것도 있었다. 함부로 행동해서 인간들을 위험에 빠트린다면, 늑대를 깨우더라도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너그러운 주인님에게 호통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땅을 거닐던 시절의 기억이 텅 빈 눈구멍을 메웠다. 그를 내친 혈족이 있었고 친우라 믿었던 자가 있었다. 저승의 문턱에서 등을 돌린 친우가… 생이 그에게 안겨준 것은 희망으로 포장된 고통뿐이었다.

그러나 솔로틀은 모든 삶이 한순간일 뿐임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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