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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12화 (113/258)

112화 내 잘못은 아니지 (1)

당국 본부로 이동하기까지는 잡음이 조금 있었다. 출입국장 관리자가 란드와르의 신분을 의심했던 것이다. 아니, 요정 시체를 둘러메고 온 전사가 아즈리온 교단 사제가 아니라면 뭐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전보도 받으셨다면서요?

어쨌든 큰 문제는 아니었다. 전보가 몇 차례 더 오가자 관리자도 현실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미라가 보낸 수레가 출입국장 앞에 나타났다. 일전에 보았던 비서가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뒷좌석에 올라탄 란드와르는 경비들 앞에서 시가를 태운 걸 반성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 자리에서 위스키까지 병째로 땄어야 했는데. 그때 위스키가 있었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후회 속에서 옆을 보자 사이라크의 시체가 앉아 있었다. 죽은 사람을 곁에 두고서도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대단한 일이었다. 이래서야 지구에 돌아간다 쳐도 멀쩡하게 살 수 있을까?

어쩌면 이걸 강점으로 삼아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독사 청소업체라는 게 있다지 않나. 아니면 필리핀 말라떼에서 살인청부업자를 할 수도 있을 테고… 물론 그 경우에는 화신의 몸을 들고 가야겠지만…….

도착할 때까지 란드와르는 말도 안 되는 공상 사이를 헤맸다. 헛생각을 하면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 법이었다. 비서는 주차장은 아닌 곳에 수레를 세우더니 정식 통로는 아닌 곳으로 란드와르를 이끌었다. 계단과 경사로를 오가다 보니 어느덧 멀끔한 응접실이었다.

요정 모습의 테네브로즈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뒤편으로는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을 게 분명한 늙은이들이 셋. 아미라. 그리고 소파에 앉아 뭔지 모를 물건을 만지작거리는 벨레다까지. 마치 불안에 사로잡혀 끝없이 쳇바퀴를 굴려대는 햄스터처럼 보인다.

"모셔 왔습니다. 바깥에서 대기하겠습니다."

비서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나갔다. 란드와르는 갑작스러운 막막함이 밀려오는 걸 느꼈다. 일단 시체를 들고는 있는데, 이 시체를… 어떻게 해야 하지? 요정 놈이 환술을 푼 걸 보면 정체는 밝힌 모양이지만…….

다행히도 테네브로즈가 먼저 나섰다.

"주문을 준비하는 동안에는 다른 곳에 계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인간들에게 보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니까요."

당국자들은 선뜻 수긍했고, 자리를 비웠다. 머릿수가 줄어들자 그제야 배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고풍스러운 목재 바닥과 흰 벽의 대조가 인상적인 응접실이다. 책장이 한쪽 벽을 메웠고, 접대용 탁자와 소파가 놓였고, 앤티크 소품들로 장식되어 있는, 작은 방.

란드와르는 융단 위에 사이라크를 뉘였다.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보다는 깨끗한 융단에 피를 묻힌다는 데에서 오는 죄책감이 더 컸다. 문양이 화려한 걸 보면 수제작품인 모양인데.

그는 어딘가의 장인을 위해 잠시 묵념했다. 그리고 현실로 되돌아왔다.

"죽은 놈한테 말 거는 거 말이다, 울쿠스한테 했던 방식으로 갈 거냐."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그 경우에는 저쪽에서 대답을 하질 못합니다. 게다가 당국자들도 아가씨가 직접 말하는 걸 보고 싶어 할 테고요… 저승닻을 써야지요."

죽더라도 몸만 멀쩡하다면 하루이틀은 영혼이 남아 있었다. 그걸 이용해서, 망자와 대화를 나누는 방법은 두 종류. 첫째는 헤이딘의 각인이 그런 것처럼 의지를 밀어 넣는 것이고 둘째는 <저승닻> 주문을 활용하는 것이다.

저승닻에 걸린 시체는 타마기스 언데드와는 달리 자기 의지도 없고 스스로 움직이지도 못한다. 묻는 말에나 겨우 대답할 뿐. 적에게서 정보를 얻어낼 때에나 시전하는 마법이었다.

그러니까, 딱 이런 경우에 쓰면 된다는 소리다.

"어르신은 물어볼 거 없으십니까? 어쨌든 명색이 조카인데, 집안 문제로 나눌 이야기가 좀 있을 것 같아서요."

<글쎄, 메기도가 왜 저렇게 됐는지 궁금하긴 하오만… 저승닻을 쓰면 영혼은 빠르게 닳지. 괜한 의문으로 시간을 허비하기엔 아깝지 않겠소. 어차피 내가 궁금해 하는 건 저 녀석도 모두 알고 있을 것 같으니.>

저 녀석, 이란 테네브로즈를 의미했다. 란드와르는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벨레다에게 반지를 돌려주었다. 당국자들이 나가자마자 옆에 와서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꼬마는 거의 뺏어가듯이 반지를 건네받았다.

"별 일 없었죠?"

"말이 좀 많으시더라."

"당해 봐야 안다니까요."

벨레다는 입을 비죽이더니 소파로 돌아가 헤이딘과 대화를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꼬마도 인생사가 참 다사다난하다 싶었다. 야스와다에 팔려갔고, 헤이딘과 함께 감금당했다가, 탈출해서 카스바로 향했고… 이제는 또 이러고 있었다.

몇 살이었더라? 스물셋? 겉모습이 애 같고 철없는 부분도 가끔 있어서 잊고 있었는데, 잘 따져 보니 존경심마저 느껴졌다. 뭐가 어쨌든 간에 그 나이대가 흔히 겪을 일은 아니니까. 나이가 조금 더 많더라도 마찬가지다.

란드와르는 묘한 감상에 잠겨 있다가 테네브로즈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주문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사람들 부르기 전에 잠깐 기다려 봐라. 따로 물어볼 거 있으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승닻은 억지로 그릇을 봉합하는 주문인 만큼 영혼에 심한 무리가 갔다. 지속시간은 그만큼 짧아서, 삼십 분 가량. 하지만 정보를 얻어 내기엔 충분한 시간이기도 했다.

란드와르는 사이라크의 주검 앞에 섰다. 눈을 감고 있는 탓에, 피로 그려진 마법진만 아니라면 그냥 시체처럼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냥 시체라니. 참 이상한 단어라는 생각과 별 일을 다 겪는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살아 있는 시체와 대화를 나누는 경험을 세상 어디에서 할 수 있단 말인가.

"성물 말이다. 나트람한테서 받아온 거냐, 아니면 네가 훔친 거냐."

"떠나기 직전에… 몰래 가져왔어…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었으니까……."

시체는 여전히, 눈을 열지 않은 채 입술만을 달싹였다. 숲에서 듣던 목소리와는 달리 단어 하나하나가 꺼져가는 숨을 내쉬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쓰는 거야."

"구슬을 옆에 둔 채로… 사람 둘을 죽이기만 하면 돼… 죽인 다음 시동어를 읊어……."

"시동어?"

"정해져 있지는 않아… 나만을 보아 달라고 부탁하면 돼… 꿈꾸는 분께……."

"꿈꾸는 분이 누구인데."

"그냥 주문일 뿐이야… 아주 오래된 주문… 제국 시절부터 있었던……."

그 지점에서 티아가 끼어들었다.

<사이라크가 외친 시동어는 저희가 알고 있습니다. 시간이 넉넉할 때 다시 말씀드리죠.>

아, 그렇죠. 계속 추적을 하고 계셨으니까.

빠르게 수긍한 란드와르는 테네브로즈의 시선을 알아차렸다. 요정 놈이 자신을 부담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새끼가 뭘 잘못 먹었나?

"왜 그런 식으로 보냐."

"성물이라면… 아가씨가 수정 구슬을 가지고 나온 겁니까? 나으리께서 그걸 빼앗으셨고요?"

"빼앗다니, 새끼가 말을 이상하게 하네. 땅에 떨어졌길래 챙긴 거야."

"나으리께서 아가씨를 죽였으니까 땅에 떨어졌겠지요."

"너는 이 상황에서 시비를 걸고 싶냐?"

"아뇨, 그게 아니라……."

테네브로즈는 눈동자를 굴리다가 입을 꾹 닫았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다. 란드와르는 더 물어볼까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저승닻은 삼십 분밖에 남지 않았지만 요정 놈에게는 언제든 욕을 해 줄 수 있었다.

*  *  *

로야페타 당국자들을 다시 불러들이기에 앞서, 란드와르는 사이라크에게 화신에 대한 것을 물어보았다. 화신은 내려오지 않았다고, 대신 다른 별이 이상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별자리가 뒤틀린 요정들이 인간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다고.

"화신이 안 내려왔다고?"

"별자리로 보기에는… 아즈리온의 별은… 칠살은 뜨지 않았어… 대신 자미가 움직이면서……."

"자세하게 설명해 봐."

사이라크는 자신이 아는 내용을 그대로 읊었다. 설명을 들었고 이해도 했지만 마음에 와 닿는 건 없었다. 마치 <사주팔자로 이해하는 양자장론> 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듣는 기분이다.

이강현의 불행은, 이스트리아에서는 사주팔자가 바로 과학이라는 점이었다.

티아 씨, 이거 무슨 소립니까?

<글쎄요, 그냥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시면 될 것 같은데요. 저희도 화신의 몸에 인간을 연결한 건 처음이거든요. 별이 작동하는 방식을 모두 파악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아, 제가 처음이에요? 능묘에서 뱀이 저를 이방인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만. 이방인이 감히 화신을 빌려 쓰고 있다고. 설마 그 이방인이라는 게, 지구인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거야 차원 생쥐들을 보고 한 이야기지요. 안타깝게도요.>

안타깝게도, 항상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차원 생쥐들은 도움이 안 됐다. 그는 낯선 세계의 낯선 과학을 납득하려던 시도를 관두고 현실에 시선을 고정했다.

좋은 소식: 요정들은 화신이 내려왔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음.

나쁜 소식: 대신 요정들은 더욱 심각한 사태를 경계하는 중임. 자미성이 움직이는 게 그렇게까지 충격적인 일인지는 의문이지만(별이 그렇게 중요하단 말인가? 그냥 별 아닌가?).

잠깐만. 란드와르는 그 지점에서 이스빈드의 점괘를 떠올렸다. 명반에 떠오른 별은 분명 하나뿐이었다. 그 별의 이름은…….

애매한 소식: 화신의 행보를 반영하는 건 자미임(아마도).

애매하지만 확실히 나쁜 소식: 요정들은 자미성의 움직임을 보고 화신을 쫓아올 것임(아마도).

항목이 더해지자마자 논의가 순식간에 후퇴했다. 수정 거인을 잡은 직후에, 테네브로즈와 똑같은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났다. 별의 의지가 운명이 뒤틀린 사람들을 한데 모을 거라고. 언제든, 어디든 간에 예외가 아니라고.

그랬다. 자신이 바로 자석이었다. 그리고 자석은 로야페타에 발을 들이자마자 요정 둘을 끌어당겼다. 알게 된 사실은 있었지만 도움이 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추적대에 걸린 것보다도 좆같은 상황이라는 느낌만 언뜻 들 뿐이었다.

테네브로즈의 목소리가 충격을 뚫고 들어왔다.

"나으리, 저도 잠깐 아가씨와 이야기를 나눠도 되겠습니까."

"넌 시체를 아가씨라고 부르고 싶냐."

"그러고 싶으니까 이렇게 부르는 게 아닐까요?"

"됐다. 알아서 해라."

테네브로즈는 별불꽃의 내부 사정을, 그리고 은빛매와의 관계를 묻기 시작했다. 란드와르에게는 생소한 이야기였다. 공략을 대부분 알고는 있지만 요정 가문끼리의 정치적 역학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았으니까.

"은빛매에서는 쉭겐이 가끔 본가에 오지… 정확히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는 몰라… 아버지는 자기가 백 년쯤은 더 살 거라고 믿는 것 같거든…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아……."

"모두 그대로군요. 하기야 그 짧은 시간동안 뭐가 바뀌었을 리가 없습니다만."

투덜거린 테네브로즈는 용건이 끝났다는 것처럼 란드와르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고, 로야페타 당국자들을 불러오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응접실로 돌아온 사람들은 피범벅이 된 융단을 보고는 살짝 미간을 좁혔지만 대놓고 불평을 쏟아내진 않았다.

거기에서부터 다시 문답이 시작됐다. 이번의 대화는 조금이나마 영양가가 있었다. 수십 명의 요정 귀족들이 인간 세상에 나왔다는 것. 우르게슈 신분증은 일부일 뿐이고 위장 신분은 더욱 다양하다는 것. 별자리가 뒤틀렸지만 야스와다에 머무르는 요정들도 몇 있다는 점. 그리고 기타 등등.

무언가를 더 물으려던 찰나 저승닻의 효과가 끝났다. 이번에는 란드와르 일행이 자리를 피해 줄 때였다. 로야페타 당국자들은 긴 의논을 시작했고, 한참이 지나서야 아미라가 란드와르가 있는 방으로 건너왔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이 필요합니다. 비밀은 엄수하지요."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여섯 달 사이에 별이 두 개나 커졌고 요정들은 이러고 앉아 있는데 이상함을 못 느끼면 도시를 운영할 자격이 없었다.

하지만 로야페타 당국자들이 이성적인 존재인 것과는 별개로, 란드와르는 극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수정 거인도 부수고 요정도 죽이고 시체도 배달해 왔는데 뭘 또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겉옷만 겨우 갈아입고 온 상태였다. 머리카락에 스며든 피는 제대로 씻어내지도 못했다. 요정의 음모는 중요한 문제였지만 지금은 목욕물과 위스키와 부들부들한 샤워 가운이 더 중요했다.

"제가 설명드릴 수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 저는 좀 쉬어야겠어요. 그러니까 일단… 도시 봉쇄를 해제해요. 그러면 저 녀석이 적임자를 데려올 겁니다."

란드와르는 엄지로 테네브로즈를 가리켰다. 티아를 불러낼 필요까지는 없으니까, 어차피 말을 맞춰둬야 하는 부분도 있으니까 귀찮은 건 정보사 사제들에게 하청을 줄 작정이었다. 애당초 시나리오는 자신보다 파르타가 훨씬 더 잘 쓸 테고.

문제는 요정 놈의 반응이었다.

"제가 왜요?"

하여간 하나를 잘 하면 다른 하나에서 매를 버는 새끼였다. 란드와르는 사장님들 앞에서 욕을 하면 안 된다는 대전제를 되새기며 미간을 좁혔다.

"왜요는 무슨 왜요야. 너 한 거 없잖아. 쟤는 메기도 쫓아갔고 나는 사이라크 죽이고 왔는데 넌 뭐 했냐고."

"여기에 와서 상황을 알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세카두 가서 한 번 더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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