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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11화 (112/258)

111화 반지에는 생각을 읽는 기능이 없다 (2)

직진, 직진, 직진. 온갖 것을 통과하면서 무조건 앞으로 나아간 지도 십 분쯤이 지났다. 란드와르는 로야페타 바깥의 숲을 내달리고 있었다. 굳이 따지면 공장 단지 인근인데 나무들이 울창했다. 마력은 친환경 에너지인가?

<친환경이지요. 폐기물을 잘못 처리하면 돌연변이가 생기긴 하지만 석유처럼 매연을 내뿜진 않으니까요.>

아, 그렇군요. 정말 중요하고 궁금한 건 모르고 이런 것만 열심히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쪽 잘못은 아니니까 그러려니 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건 좋은 마음가짐이죠. 아무튼, 이게 요점이 아니라… 10초 뒤에는 성물의 효과가 끝납니다. 그때부터는 계속 다른 방향을 부를 테니 잘 따라가셔야 할 겁니다.>

티아의 속삭임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이제부터는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방해물이 나오면 피해 가야 하는 세계로. 일단 속도를 줄이고 멈췄다. 나무와 겹친 상태에서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다.

이윽고 하늘이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란드와르는 시험삼아 나무를 만져 보았다. 거칠거칠한 감촉이 손끝에 느껴졌다. 티아가 알려 주는 방향을 따라 걸음을 내딛자마자 헤이딘이 말을 붙였다.

<여긴… 아까 전까지는 도시 안에 있지 않았소?>

"사이라크가 도주하면서 성물을 썼다는군요. 세계가 잠시 멈췄어요. 저는 예외라서 여기까지 따라왔습니다만."

예외인 이유는 간단했다. 아즈리온의 화신이라서. 생쥐들의 사무실에는 원인을 자세하게 설명하기 위한 이론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따져 묻기에는 귀찮았다. 어차피 헤이딘도 별다른 설명을 요구하진 않았다.

<아, 알고 있소! 별불꽃의 가보라오. 가주 자리와 함께 물려받는 거지.>

"나트람이 빌려준 걸까요?"

<그럴 리가. 형님은 제 자식보다는 그걸 더 소중하게 여길 거요. 어떻게든 훔쳐낸 모양인데…….>

친자 검사를 할 필요도 없이 딸도 그 애비만큼이나 인성이 엉망이었다. 그는 야스와다의 요정 노인을 위해 감사 인사를 올렸다. 자식을 저렇게 키워 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이런 곳에서 요정 성물을 다 얻어 가는군요.

<사이라크가 멈췄습니다. 충분히 거리를 벌렸으니 잠시 쉬려는 것 같군요.>

티아가 그 말을 전한 건 감사 인사를 올리고서도 한참이 흐른 뒤였다. 란드와르는 냉철한 판단력을 발휘해 단기 목표를 세웠다. 죄책감이고 뭐고 간에, 일단 사이라크를 죽여야 했다. 죽여도 마법을 쓰면 심문이 가능하니까.

수갑을 채우더라도 이 먼 거리를 끌고 갈 자신이 없었다.

*  *  *

사이라크가 쉬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예민한 청각이 경보 신호를 울렸다. 무언가가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발소리로 판단하건대 인간이었다. 그것도 딱 하나.

일단 나무 뒤편에 숨어 생각을 정리했다. 도시 당국과는 관계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혼자서 숲을 헤매는 이유가 뭐지? 여기까지 오면서 다른 인간이라고는 한 명도 본 적이 없는데?

생각을 더 뻗어나가려던 순간 불쾌한 감각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축축한 손가락으로 머릿속을 헤집는 듯한 느낌. 혼란 주문이었다. 정신을 다잡고서는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곧이어 시야에 인간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야스와다의 노예가, 임무에 실패한 요정을 죽이러 온 걸까?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너무 일렀다. 로야페타에서 도망을 나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으니까. 게다가 마법을 배운 노예라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검격이 날아들었다.

"젠장!"

사이라크는 왼손으로 수인을 갖췄고, 무색 마력을 바로 앞에서 폭발시켰다. 몸을 공중에 띄워 올릴 정도의 추진력은 없었지만 검의 궤적을 뒤틀기에는 충분했다.

*  *  *

정신 조작 마법에는 저항 확률이 있다.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을수록, 원래부터 정신력이 강한 사람일수록 확률이 높아진다. 그리고 혼란과 공포는 정신 조작 마법에 속했다.

사이라크는 혼란에 저항했다. 란드와르는 그것까지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저 애가 내 조카라서 그런 게 아니라오. 아시겠지만 이런 주문은 언제나 실패할 확률이 있거든. 의심하지 않아 주었으면 좋겠소만…….>

헤이딘이 이토록 길게 떠드는 건 안 괜찮았다. 가능하다면 멈추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로. 그럴 겨를이 없는 게 통탄스러웠다. 이런 씨발, 반지에는 왜 생각 읽는 기능이 없는 거지? 티아는 잘만 읽던데?

"어느 가문에서 보낸 노예지? 어둠달?"

설상가상으로 사이라크한테는 인간 노예 취급을 받고 있었다. 어둠달이라면 테네브로즈의 가문이다. 나트람 쪽과는 사이가 별로 안 좋았다고 했고. 그러니까, 그 맏딸이 인간 세상으로 나온 틈을 타 암살을 시도하려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대충 그런 거지."

란드와르는 짧게 대답하고서는 돌진했다. 착각의 비용은 착각하는 쪽의 몫이었다. 칼끝이 가슴팍을 겨누는 순간 다시 무색 마력이 진동했다.

"명문가의 마법까지 배우다니, 꼴에 총애를 받은 모양이군! 그렇다고 해서 추적자를 상대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나? 감히?"

이번의 폭발은 란드와르를 밀치는 대신 사이라크를 허공으로 튕겨 올렸다. 머리 위에서, 유유하게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꼬라지를 보자니 지상 유닛의 비애가 느껴졌다. 게임에서도 짜증스러웠는데 현실이 되어놓고 보니 훨씬 좆같았다.

<혈족의 무례에 대해서는 대신 사과드리겠소. 조카딸을 본 지 하도 오래되어서 몰랐는데, 어찌 된 게 형님과 똑같이 말하고 있지 않소…….>

다행히도 그에게는 원거리 동료 유닛이 있었다. 헤이딘의 주문이 효과를 발휘한 듯 사이라크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집중력이 떨어지면서 요정의 몸을 받쳐 주던 무색 마력 갈래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추락사를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사이라크가 우아한 몸짓으로 착륙하는 동시에 보랏빛 마력 줄기가 쇄도했다. 사나운 외침이 귓전을 쳤다.

"주문을 꽤나 익혔구나. 야스와다에 돌아가자마자 네 가문에 고발장을 넣어 주마!"

마력 줄기가 살갗을 파고들었다. 피를 흘리지도, 근육이 끊어지지도 않았지만… 대신 머릿속에 불이 붙었다. 독감에라도 시달리는 것처럼 세상이 덥고 흐릿하게 느껴졌다. 전투의 열기에 사로잡힐 때와는 다른 감각이었다.

세계가 멈춰도 멀쩡한 몸인데 야스와다의 주문에는 피해를 입는다니 참 놀라운 일이었다. 그랬다. 머리가 살짝 맛이 간 다음에도, 거기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와중에도 몸은 멀쩡하게 움직였다. 페어플레이 정신에 위반되는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건.

어차피 페어플레이는 진작 물 건너간 게임이었다. 이쪽은 사실상 두 명이고 사이라크는 하나니까. 게다가 도시를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이미 많은 주문을 썼다. 마지막 공격까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이상 승산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인간 주제에!"

외침을 한 귀로 흘린 란드와르는 적을 향해 내달렸다. 사이라크는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당황했고, 최선의 수를 택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힘을 끌어올려, 무색 마력을 폭발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폭발은 너무 미약했다. 검이 겉옷을 뚫고 들어가 심장을 찢었다.

*  *  *

란드와르는 수정 구슬을 찾아 챙긴 뒤 시체와 함께 숲을 빠져나왔다. 잘 포장된 도로가 뻗어 있었다. 곧이어 귀를, 아니, 머리를 의심할 소리가 들려왔다. 주문을 맞아서 생긴 부작용이라고 믿고 싶을 정도였다.

<갓길을 따라 30분간 걸으시면 됩니다.>

걸으라고요? 여길? 30분 동안?

<물론 로야페타 지부에 신탁을 내려서 수레를 끌고 오게끔 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일로 신앙심을 낭비하실 생각이신가요?>

도시와 도시를 잇는 길은 보통 한 종류다. 화물용 수레가 오가는, 육상 수송로 말이다. 개인용 도로는 근 삼백 년 전에 유지보수가 멈췄다.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멀쩡히 작동하는 차원문을 내버려 두고 걸어갈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개인용 고속도로를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각 도시의 의견이 달랐던 탓에 논의는 탁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언제나 공사비 분담률이 문제가 됐다.

아무튼.

"어르신, 이 시체를… 띄워 올릴 수는 없습니까? 조카분이 한 것처럼 말입니다."

<마력 폭발을 일으키는 건 나우파나 마법 중에서도 아주 기초적인 수준이지. 허나 방향과 각도를, 세기를 정확히 조절하고 유지하려면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오. 잘못했다가는 띄워 올리는 수준이 아니라 몸을 조각내게 될 수도 있소.>

"연습을 안 하셨군요?"

덕분에 돌아가는 길은 끔찍했다. 란드와르는 요정 시체를 짊어진 채 갓길을 따라 끝없이 걷기 시작했다. 화물용 수레 특유의 굉음에 시달리면서. 운전기사들이 속도를 높이느라 창밖을 보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그랬더라면 피투성이 남자를 발견했을 테니까.

그는 로야페타의 출입국 수속을 상기했다. 화물 기사들은 주차장에 임시로 차를 댄 다음 출입국장에서 심사를 마쳐야 한다. 물류기지로 출발하는 건 그 다음이다.

달리 말하면, 누군가는 이 꼴을 보게 될 거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것도 꽤 많은 사람들이. 란드와르는 불현듯 시체의 무게를 느꼈고, 특유의 뻣뻣함을 느꼈고, 등에서 철벅이다가 다리를 따라 흘러내리는 핏물을 느꼈고, 모두 때려치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심란했다.

아니나 다를까 서부 출입국장에 발을 내딛자마자 흉악범을 보는 듯한 시선이 쏟아졌다. 이유는 이해했다. 그런데 씨발, 다짜고짜 얼음 화살부터 날리는 건 너무한 일이 아닙니까…….

"이런 씨발, 죽일 새끼 죽인 겁니다. 요정요."

란드와르는 간발의 차이로 주문을 피하고서는 출입국장 바닥에 사이라크를 내던졌다. 매끈한 대리석이 피범벅으로 변했다. 여러모로 쓰레기 같은 짓이라고 생각은 했는데 예의를 갖출 겨를이 없었다.

사이라크의 귀를 확인한 경비원들은 당혹에 사로잡혔고, 란드와르를 빤히 바라보았다. 설명을 요구하는 투였다. 하기야 로야페타 바깥에서부터 요정 시체를 업고 온 남자라니, 이상하게 보일 게 틀림없었다.

다행히도 쉬운 방법이 있었다. 테네브로즈를 보내 두었던 것이다. 티아가 전해 주기로는 일은 제대로 마쳤다고 했다. 아미라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각종 시설에도 협조 요청을 보내 두었다고.

"보자, 내가 할 말은 딱히 없고… 아마 당국 본부에서 전보가 왔을 텐데. 현장에는 아직 전달이 안 됐나? 뭐라고 쓰여 있는진 모르겠지만 그거 확인하면 됩니다. 일단 수레나 불러 둬요."

"죄송합니다만, 지금 하시는 말씀이……."

"이거 가지고 본부로 가야 하니까, 윗사람이랑 얘기해서 수레 끌고 오란 겁니다. 내가 이 꼴로 시체 들고 돌아다니면 모습이 안 좋잖아요. 누가 보면 연쇄살인마인줄 알 거 아니야."

슬슬 인내심의 한계가 느껴졌다. 거기까지 말하고서는 품에서 목함을 꺼냈다. 시가 끄트머리를 자르고, 입에 문 다음, 주위를 둘러보면… 어린애가 없는 걸 확인한 란드와르는 그대로 불을 붙였다. 자라나는 새싹에게 간접흡연을 시키면 안 되는 법이었다.

말리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 혐연자도 없는 듯했다. 란드와르는 잿빛 연기가 눈앞을 가리는 장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주 작은 비둘기 떼가, 평화의 상징이 날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신경이 곤두서서 그런지 환각도 보는 모양이다.

환각이라. 그는 고개를 돌려 헤이딘을 찾았다. 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적응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앞으로도 이런 모습 자주 보실 테니까."

"예?"

대답은 헤이딘이 아니라 경비원에게서 왔다. 란드와르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머리에 문제가 있어서 가끔 환청을 듣거든요. 신경 쓰지 말고 윗사람이나 불러 줘요."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슈리브요. 아즈리온 교단 소속이고."

"슈리브, 라고 하셨습니까?"

"예."

경비원들은 한참이나 굳어 있다가 못마땅한 역할을 서로 떠넘기는 팀원들처럼 눈짓을 주고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중 하나가 돌아서더니 확성기를 들고 심사대 너머의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안심하고 자리에서 대기해 주십시오. 경계 경보가 해지되는 대로 출입국 수속을 재개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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