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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10화 (111/258)

110화 반지에는 생각을 읽는 기능이 없다 (1)

<사이라크의 마력 흐름을 감지했습니다. 차원문을 쓰는 게 아니라, 육상으로 국경을 빠져나가려는 것 같습니다. 유혈사태까지 무릅쓰고 있는 것 같군요.>

지금 출발하면 붙잡을 수 있습니까?

<물론이죠, 교통 혼잡도 많이 해소됐거든요. 최적 경로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당면한 목표는 하나. 사이라크를 죽이든, 마력 구속구를 채우든지 해서 끌고 온다. 메기도가 특이 케이스일 뿐이지 마법사들은 보통 수갑만 차면 일반인이 되고 마니까. 그러고서는 최대한 정보를 얻어 낸다. 대략적인 사항은 알고 있지만 디테일은 언제나 도움이 된다.

란드와르는 주위 사람들을 가볍게 훑어보았다. 당국 관계자는 남은 말이 많은 눈치였다. 마흐트 수도자들이나 치안대원들까지도. 심정은 이해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다시 양해를 구한 뒤 테네브로즈와 벨레다를 끌고 다른 건물 뒤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메기도가 나트람이랑 연결이 돼 있잖아. 요정을 열둘이나 바쳤다면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감각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건 엄청난 일이지요. 정신 지배만큼이나 제물이 많이 듭니다."

다행히도 메기도는 란드와르를 보지 못했다. 수정 거인 자체가, 놈이 죽으면서 생겨난 것이니까. 하지만 확실히 할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사이라크도 누군가랑 이어져 있을까?"

"아가씨도 명문가의 혈족이니까 가능하겠지요. 하지만 아닐 겁니다. 이런 일에는 평민 범죄자들을 제물로 바칩니다만, 한 가문이 스물이 넘는 목숨을 독차지한다면… 다른 가문으로서는 형평을 따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 이거지."

어차피 상대는 하나. 셋씩이나 움직일 필요는 없으리라는 계산이 섰다.

"사제야, 벨레다랑 가서 아미라한테 얘기해 둬라. 나는 사이라크 잡아올 테니까."

이스트리아의 기술이 꽤나 발달한 건 사실이지만 전화는 아직 없다. 장거리 통신은 모두 전보Telegram에 의존하는 상황. 모스 부호처럼, 마력 흐름을 신호화해서 전송하는 것이다. 따따따 따 따 따 따따따.

당연하게도 송신은 기지국에서만 가능했다. 수신 단말도 규모 큰 단체 사무실에나 설치된 게 고작이었다. 이 상황에서 아미라에게 연락하려면 직접 사람을 보낼 수밖에 없다.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으니까. 녀석이 충분히 빠르게 도착한다면 치안대의 협조까지도 구할 수 있으리라.

"무슨 이야기를 전하란 말씀이십니까?"

"내가 투기장에서 칼 맞고 뻗었을 때 네가 뒤처리를 다 했다면서. 그런 걸 하라는 거야. 사이라크한테 정신의 감옥 걸 준비도 하고, 아미라한테도 사정 설명하고. 로야페타 당국에서도 걔한테 물어볼 게 많을 테니까."

"참관객들 앞에서 사이라크를 심문한다고요. 괜찮겠습니까? 인간들에게 너무 많은 걸 알려 주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운데요."

"상업 가문 사람들이 일반인이냐. 이건 솔직히 가는 게 맞아."

로야페타 분파의 고위직 둘이 요정과 내통했고, 결과적으로는 건물 두 개가 박살났다. 하나는 종합금융사의 건물이고 다른 하나는 마흐트 회당이다. 약간이긴 하지만, 다른 교단까지 얽혀 있는 것이다. 대충 덮고 넘어가기에는 스케일이 너무 큰 사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상업 가문은 로야페타 당국의 동의어. 사이라크의 말을 그대로 퍼뜨리면서 혼란을 일으킬 리가 없다. 정보사 명함도 있으니만큼 정식으로 협조를 구하는 편이 훨씬 나을 터였다.

"반지 좀 빌리자."

란드와르는 벨레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동시에 꼬마가 두 손을 모아 쥐더니 한 걸음 멀어졌다. 장난감을 빼앗길까 노심초사하는 아이처럼 보였다.

"항상 끼고 다니는 거 있으시잖아요."

"쓸 데가 없잖아."

지금껏 재생의 반지 덕을 많이 보기야 했다. 볼로디아의 영혼 방벽이 예상보다 강력하다는 걸 확인했으니만큼 앞으로도 자신이 계속 끼고 다니게 될 터였다.

하지만 재생의 반지가 모든 피해에 효과를 발휘하는 건 아니었다. 마법 피해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까. 물리―마법 피해. 그리고 순수 마법 피해. <얼음 화살>이나 <피의 창>처럼 물리적인 투사체가 날아드는 건 전자고 야스와다 학파의, 정신 공격 주문은 모두 후자다. 나우파나 마법 역시 후자에 속한다.

물리―마법 피해는 몸을 움직여 피할 수 있지만 보호장으로 막지 못한다. 순수 마법 피해는 그 반대다. 타격을 최소화하려면 헤이딘이 따라와서 수호 마법을 써 줘야 한다는 소리다.

"그래도……."

"처음 보는 요정한텐 잘만 끼워 주면서 나한테는 못 빌려주겠다 이거냐."

"그러니까 이러는 거죠. 하마터면 완전히 잃어버릴 뻔한 걸요."

"야, 내가 걔랑 동급이야? 니가 보기엔 그래?"

"그건 아니구요."

벨레다는 입을 비죽이더니 반지를 빼내 건네주었다. 왼쪽 손의 반지를 갈아 끼우자 눈앞에 반투명한 요정 소년이 나타났다.

<제자의 불손은 대신 사과하겠소. 어쩔 수 없는 아이라서…….>

곧이어 머릿속에 문장이 밀려들었다. 티아가 속삭임을 밀어 넣을 때와 똑같은 느낌이었다. 설마 생각도 읽히나? 어르신, 한 말씀 해 주시죠.

다행히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  *  *

사이라크는 수월하게 도시 외곽에 이르렀다. 혼란은 도리어 훌륭한 은신처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외곽의 공업 단지는 상업 지구에서부터 시작된 소요 사태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공장들은 대부분 직육면체 형태였고, 명패를 제외하면 어떤 곳이 어느 회사의 건물인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단조로웠다. 휴식 시간을 맞은 노동자나 급사 아이들이 건물 근처를 개미처럼 맴돌고 있었다. 취해야 하는 목숨의 수는, 그 개미 중에서 둘.

그녀는 건물 사이의 골목에 몸을 담그고 곁눈질로 인간들을 살폈다. 저들 중 셋을 끌어올 수 있을까? 최대한 주목을 끌지 않고 빨리 처리해야만 한다.

"신분증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시민증이나 사원증이면 돼요. 교단 징표가 있다면 그거로 대신할 수 있고요."

순간 그 목소리와 함께 그늘이 보다 짙어졌다. 사이라크는 그림자를 드리운 상대를 알아보고는 미간을 좁혔다. 치안대 제복을 입은 남자와 여자 하나씩이었다. 둘 다 마법사인 듯 마력 증폭구 역할을 하는 막대를 허리에 맨 채였다.

"경계 경보가 났거든요. 이곳과는 영 관련이 없는 일이지만, 수상쩍은 사람이 보이면 일단 신분을 확인하라는 지시가 내려와서요. 그쪽이 수상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래도 일단 공장 소속 노동자는 아닌 것 같으니까."

캄파놀로 건물이 터졌으니만큼, 우르게슈 시민증은 쓸모없는 물건이 되었을 것이다. 검문을 통과할 가능성은 낮다. 그렇다면 여전히, 필요한 목숨은 둘. 이곳에 있는 치안대원 역시, 둘. 계산은 짧았고 행동은 빨랐다. 사이라크는 보라색 마력 줄기를 뻗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번뜩이는 빛 갈래가 여자의 가슴팍을 가르며 영혼 파편을 도려냈다. 미리, 몸에 새겨둔 주문 중 하나였다.

"요정이다!"

그 뒤편에 서 있던 남자가 큰 소리로 외치고는 막대를 단단히 쥐었다. 저쪽도 마찬가지로, 준비해 둔 주문이 있었던 듯 얼음 화살이 귓전을 쌩하니 스쳤다. 얼어붙는 듯한 감각과 타오르는 감각이 동시에 일었지만 주의력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새 영혼이 도려내어진 치안대원이 정신을 추스르고 전투에 합류했다. 공세가 이어질 모양새였다. 사이라크는 발치에서 무색 마력을 터뜨리고서는 그 반동을 발판 삼아 높이 뛰어올랐다.

동시에 화염구가 발밑으로 내달리더니 건물 벽을 만나 폭발했다. 사이라크는 잠시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영혼 파편을 제물로 삼아 보호장을 두른 상태였다. 몸에 그려둔 주문은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서둘러 수정 구슬을 가동시켜야 했다.

그녀는 심호흡했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수정 구슬을 움켜쥐었다. 구슬은 한 손에 잡히는 크기였고, 결코 따뜻하거나 차가워지지 않았다. 완전히 다른 세계가, 얇고 견고한 수정막 속에 뭉쳐 있는 것처럼.

화염구를 날렸던 경비대원은 그새 약식 마법진을 완성하고 입속으로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목표물이 고정되어 있으니 일이 쉬워졌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러나 사이라크는 메기도만큼이나 나우파나 마법에도 뛰어났고, 덕분에 평범한 마법사 이상의 움직임을 보일 수 있었다.

각도를 조절하고는 무색 마력을 다시 폭발시키자 몸이 빠르게, 화살처럼 아래로 쏘아졌다. 상대는 상황을 깨닫고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사이라크가 조금 더 빨랐다. 징 박힌 뒷굽이 상대의 정수리를 찍을 수 있도록 왼발을 강하게 차 내렸다. 목판이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소음 속에서도 뚜렷하게 울렸다.

"이렇게 시시하다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지."

사이라크는 허공에서 빙글 공중제비를 돌고서는 우아한 자세로 착지했고, 보라색 마력을 뻗어 다른 목숨마저 거두었다. 이번에는 온전한 영혼이 있었기 때문에 주문의 위력은 충분했다. 원했던 것만큼 조용히 처리하진 못했지만 일단은 목적을 이룬 셈이었다.

수정 구슬이 원하는 것은 목숨 둘. 영혼이 아니라, 그저 목숨을. 사이라크는 마지막으로 주위를 훑어보았다. 골목 틈새로 보이는 하늘은 새하얬으며 인간들의 얼굴 역시 그랬다. 그리고 인파 사이로 뛰어드는, 키 큰 남자가.

"꿈꾸는 분이시여, 제게 눈길을 두십시오!"

사이라크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외쳤다.

*  *  *

최적 경로로 오긴 했는데 쉽진 않았다. 길이 계속 막혔고 검문에도 몇 번 걸렸다. 이런 씨발, 일을 열심히 하시는 것도 좋습니다만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사람이 죽는단 말입니다.

결국엔 사람이 죽었다. 빠르게 도착하지 못했다며 자책할 여유는 없었다. 어차피 누군가는 그렇게 되었을 테니까. 물론 유가족이 이 속마음을 들었더라면 멱살을 잡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최선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이제는 예상치도 못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씨발, 이게 뭐야."

란드와르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석상처럼 굳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둘이 아니라, 주위 인간이 모두. 헤이딘은 아예 사라졌고 사이라크는 건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건물 속으로? 요정의 몸이 유령처럼 벽에 스며들었다.

무슨 상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쫓아가야 했다. 란드와르는 사이라크가 그랬던 것처럼 그냥 직진했다. 벽을 파고들자 영사중인 빔프로젝터 앞을 지나가듯 몸 위에 순간적으로 잿빛이 겹쳤다.

뭐든 통과가 된다는 거지. 유령처럼. 그 사실에 어떤 감흥을 느껴야 할까 고민하던 와중 티아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이걸 여기에서 보다니 놀랍군요. 야스와다의 성물 중 하나입니다. 사람 둘의 목숨을 대가로 세계를 잠시 멈출 수 있죠.>

씨발, 그런 걸 요정 하나가 들고 다녀요? 엄청난 거 아니야? 그런 거 들고 있는 놈들이 전쟁에서는 왜 졌답니까?

<그렇게까지 강력한 효과는 아닙니다. 경험하셨으니 아시겠지만, 자리를 옮기는 것 외에는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으니까요. 마법을 시전하는 건 물론이고 문을 여는 것조차 불가능하죠. 도주나 잠입 용도로만 쓰이던 물건입니다. 사용하려면 두 명을 죽이고 시동어를 읊어야 하고요.>

도주용 성물. 세계를 잠시 멈추는 효과가 있음. 이용료는 목숨 둘.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지만 얻어 두면 요긴할 데가 많아 보였다.

비즈니스 스릴러를 찍으러 왔다가 난데없이 날벼락을 얻어맞아서 그런지 소득이 괜찮았다. 잃은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어야 하는 게 세상의 도리였다. 란드와르는 그렇게 마음을 다독이며 벽을 뚫고 나아갔다.

<남서쪽 방향으로 직진입니다.>

곧바로 네비게이터가 설명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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