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말단 현장직의 비애 (3)
"울쿠스처럼 저승에 간 건 아니란 말이지. 그런데 왜 영혼이 없냐."
"글쎄요, 건물이 무너지고 수정 거수가 도시 한복판에 나타났는데 영혼이 사라지는 일쯤이야 사소하지 않겠습니까."
"이 새끼 정체가 뭐야. 그것부터 확실히 말하고 가자."
기본적인 개요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다섯 해 전에 나우파나 폐허에 조사원으로 파견됐고, 동료들은 모두 죽고 혼자만 돌아왔다고. 그 후로 마력 폭풍이 시작됐다고. 놈이 수정 심장과 어떤 식으로든 얽혀 있다는 건 분명했다… 어떤 식으로?
"저번에 말씀드렸던 게 끝입니다. 수정 심장이 메기도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지요. 이런 현상은 모두 무색 마력 갈래가 베푸는 가호고요. 그 이상은 저희도 모릅니다."
"질문을 바꿔 본다. 얘가 반신이냐, 아니면 그냥 울쿠스 같은 경우냐."
"복잡합니다만, 후자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영혼이 왜 없어졌냐고. 그걸 설명하라는 거야."
테네브로즈는 잠시 고민하더니 답을 내어놓았다.
"수정 심장은 그 주인의 통제를 벗어난 상황입니다. 대신 심장 스스로가 새로운 주인을 찾고 있지요. 희생자의 영혼에 징표를 찍고 그걸 모아들이는 겁니다. 그런 경우에는 대개 폐허로 돌아가 죽음을 맞이합니다만… 나우파나 바깥까지도 영향력이 닿는 모양입니다."
란드와르는 오래된 신화를 복기했다: 천 년 전, 아즈리온과 그의 동료들은 나우파나의 신, 아 드지즈를 처치하고 심장을 얻는다. 신위는 젊은 인간 마법사에게로 돌아간다. 그러나 마법사의 정신은 힘을 지탱하기에는 너무 연약했고…….
따라서 수정 심장은 주인이 없다고도, 있다고도 말하기 어려운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신위를 잇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자아를 잃고 만 것이다. 지금의 아 드지즈는 나우파나 폐허 그 자체였다. 제대로 된 지성도, 의지도 없이 혼란스럽게 자라나는 수정 덩어리 말이다.
<수정 요새> 시나리오의 배경은 나우파나 폐허. 그곳에서 플레이어는 수정 거수와 희생자들의 망령을 상대하며 폐허 깊숙이로 진입하게 된다. 개방 시점은 게임이 시작되고서 6개월이 지난 뒤. 그 전에도 들어갈 수는 있지만 그랬다가는 동료 전체가 환각에 사로잡히고 만다.
잠깐만. 어쩌면 여기에 답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각을 막아 주는 건 <기억 조각>이라 이름 붙여진 중립 NPC들이었던 것이다. 해당 NPC는 크게 세 종류.
인간, 여성, 마법사.
요정, 남성, 전사.
그리고, 청람색 머리의 요정 소년.
추론을 해 볼 때였다. 란드와르의 존재 때문에 메기도의 운명이 비틀렸다고 치자. 하지만 인간 도시에 나오는 것만이 달라진 부분이고, 죽는 건 정해진 미래였다면? 그리고 그게 바로 시나리오의 개방 조건이었다면?
그렇다면 놈이 게임에 전혀 나오지 않은 것도 설명이 됐다. 플레이 시점에서는 기억 조각으로 변했으니까, 야스와다에서 살아 있는 메기도를 마주칠 일은 없는 것이다.
"혹시 얘, 한 달쯤 뒤에 죽을 예정이었냐?"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는데요."
"그러니까… 얘가 원래는 야스와다에서 죽을 계획이 있었냐는 거야."
"매일 죽고 싶다면서 울던 녀석인데요, 사실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신기한 일이지요. 언제 죽더라도 이상하진 않습니다. 게다가 소생 계획이 끝나갈 무렵에는 발작이 특히 극심해지기도 했고요."
란드와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치 못하게 좋은 소식을 들으니 깝깝하던 기분도 조금 풀렸다. 별생각 없이 산 복권에서 4등이 나온 느낌이었다. 하지만 4등 당첨금으로, 5만 원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사실은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는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사방이 개판이었고 사이라크 역시 아직 잡지 못했다. 아직은 끝난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이 광경이 나트람에게 전해졌을 가능성도 컸다. 한숨을 내쉬고는 벨레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너 스승님은 멀쩡하시냐."
"그럼요, 좀 놀라서 조용해지신 것만 빼면요. 이렇게까지 말이 없으신 모습은 처음인걸요. 어떻게 된 거냐고 여쭤봐도 답이 없으세요. 아, 잠깐만요, 잠깐만……."
말꼬리를 흐린 벨레다는 허공을 응시했다. 이윽고 소녀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반쯤은 충격적이고 반쯤은 예상했던 답이 튀어나왔다.
"세상에, 나트람이 저를 봤을 거라네요. 스승님이 여기 계신 것도 알게 되었고요."
* * *
아미라는 요정들이 쓰고 있는 우르게슈 시민증 목록을 얻어 낸 후 그걸 치안대에게 넘겨주었다. 사이라크를 찾아내고 다른 도시들에도 이 사실을 알리도록. 거기까지는 수월했다. 그렇게 한 고비를 넘겼나 싶더니 사건이 또 터졌다.
"건물이 하나 더 무너졌대. 엄청난 짓을 저지르셨군."
그녀는 싸늘한 눈으로 수갑을 찬 남자를 바라보다가 상체를 숙였다.
"내가 상임의원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어쩌면 사장직까지 내놓아야 할지도 몰라. 모두 네 덕분이지."
곧은 손가락이 쉬브의 뺨을 스치더니 그 뒤편의 살덩어리를 어루만졌다. 절반이 잘려 나갔고, 금속판을 테처럼 덧두른 귀였다. 신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도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군. 고액 투자자들의 미래를 알아 보았자 서부 거래소 부사장에게는 쓸모가 없지. 그 귀 큰 놈들과 거래하면서 이득을 본 건 미라지뿐이야. 왜, 갑자기 자선 사업이라도 하고 싶어지셨나? 망해가는 선물 거래 부서를 되살리고 싶었어?"
쉬브는 아미라를 빤히 바라보다가 킬킬 웃었다.
"서부 거래소에서는… 더 올라갈 데가 없었어. 넌 너무 유능하고 살날도 많이 남았으니까. 그럴 바에는 캄파놀로에서 투자 고문 노릇이나 하는 게 좋아 보이더군. 언젠가 거기로 옮겨갈 생각이었어."
"투자 고문보다는 서부 거래소 부사장이 더 명예로운 직함일 텐데."
"아, 다르지. 완전히 달라. 투자 고문은 사실상 명예직이니까. 발버둥 치는데도 그 자리에 멈춰 있는 상황과, 아예 발버둥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의 차이지."
"참으로 그럴듯하고 충분한 이유로군. 요정한테 시민증을 만들어 주고, 기밀을 빼돌리고, 건물 두 개를 부수기에 충분한 이유야."
비아냥에 쉬브는 두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낸들 알았겠냐는 투였다.
"야스와다 요정들이 이런 식으로 나온 건 처음이야. 알잖아."
"전혀 모르겠는데."
"천 년 동안, 요정과 내통한 놈들을 모으면 도시 하나는 만들고도 남을 거야. 그러고서도 인간들은 멀쩡하게 살았어. 요정들은 여전히 저 끄트머리에 박혀 있고. 그 배신자 대군에 두 명이 더해진다고 크게 달라질 것도 없지. 없다고 생각했어."
"네 의견이야? 정말로?"
"미라지의 말을 빌렸다고 해 두지."
잠시 생각하던 아미라는 입속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열흘째 올랐으니 내일도 오를 거라는 소리를 듣는 기분이군. 그런 식으로 투자하니 성과가 엉망이었던 거라고 말해 두지."
쉬브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미라는 맞은편의 소파로 돌아가,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불안과 긴장이 살갗을 따갑도록 찔러왔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자신을 기다리는 일들을 떠올렸다.
요정 한 놈은 또다시 건물을 터뜨렸지만 다른 놈은 행방을 모른다. 그래도 아직은 도시 내에 있을 확률이 높다. 행인을 대상으로 검문을 실시하고 시설 업주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게끔 전보를 보냈다.
그녀는 서부 거래소의 사장이기 이전에 램페이지 분파의 상임위원이었고, 도시의 행정에 상당 부분 관여할 수 있었다… 아니, 관여해야만 했다.
도시 차원에서의 피해 복구는 상업 가문 소속 회사들의 분담금으로 이루어졌다. 이 상황이라면 대부분을 서부 거래소가 떠맡아야 할지도 모른다. 책임을 덜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노후 준비를 하겠답시고 엄청난 금액을 날리셨어."
"이렇게 될 줄 몰랐다니까."
"가문 총회에서도 그렇게 말하길 빌지."
* * *
란드와르는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나쁜 소식: 나트람이 벨레다와 헤이딘의 존재를 감지했다.
좋은 소식: 란드와르와 테네브로즈는 보지 못했다.
미묘한 소식: 교단 사제가 수정 거인을 때려잡는 걸 본 구경꾼은 백 명이 넘는다.
질문: 좆된 건가?
아직은 그렇게까지 좆되지 않은 것 같았다. 만약 교단 사제와 소년 시종이 화신과 요정이라는 결론을 내렸을지라도, 요정들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다.
시종을 데리고 다니는 성인 남성은 한둘이 아닌데다가 정확한 신원도 알지 못한다. 그러면 요정 입장에서도 쫓아갈 방법이 마땅치 않은 것이다. 물론 별점술이 더해진다면야 일이 복잡해지겠지만, 거기서부터는 이제 자신의 소관이 아니었다.
"그거 말고 따로 들은 이야기는 없으시대냐."
"메기도가 직접 말한 건데, 별자리가 뒤틀린 요정들을 인간 세상으로 보냈대요. 얘는 자기 누나랑 같이 왔다가, 누나를 잃어버려서 이렇게 됐고요. 일부러 이런 것 같지는 않다는데요."
"별자리가 뒤틀려?"
"자세한 설명은 못 들으셨대요. 뭐, 들으나마나 별점술 얘기겠죠."
예상했던 일이긴 하지만 하나는 확실해진 셈이었다. 동행을 잃어버린 건 메기도의 부주의 때문이 아니었으리라. 나트람과 사이라크가 이 상황을 의도한 것이다. 마력 폭풍에 걸려드는 존재가 누구인지 보기 위해.
결국 화신을 불러낸 걸 보면 성공적인 수작이었다고 평할 수 있겠다. 란드와르는 별을, 운명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을 로야페타에 데려다 놓은 운명을. 그러자 요정들, 이라는 낱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 요정들이라는 게… 메기도랑 사이라크 말고 다른 애들도 왔다는 소리냐?"
"확실하지는 않은데,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본능적인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온 요정이 정확히 몇 명인지는 모른다. 아주 많은 수는 아닐 것이다. 그랬더라면 로야페타에 두 명만 나오진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판이 돌아가는 꼬라지가… 앞으로도 이런 꼴을 수없이 겪을 것 같았다.
그는 남은 핵심 시나리오를 짚어 보았다. <수정 요새>, 타일라프람 동남쪽의 나우파나 폐허. <황무지의 학자들>, 북부 늪지대 너머 황무지. <불멸의 제국>, 타마기스. 마지막으로는 <야스와다의 파멸>.
야스와다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 기어들어갈 곳은 아니지만, 혹시 몰랐다. 메기도부터가 제정신이 박힌 사람은 아니잖은가.
"사제야."
"예?"
"전직 부제사장 의견 좀 들어 보자. 앞으로 어떻게 될 거 같냐."
"비슷한 일이 계속 일어나겠지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요정들을 마주치게 될 겁니다."
"걔네들이 나우파나 폐허까지 따라올까?"
"별자리가 뒤틀렸다지 않습니까. 그건 의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슨 이유로건, 어떤 방법으로건 그 장소에 가 있게 될 겁니다. 비록 당사자가 원치 않을지라도요."
이윽고 란드와르는 정신승리로 향하는 출구를 찾아냈다. 이건 그냥 추적대한테 쫓기는 것과 똑같은 일이었다. 어찌 됐든 방해하는 요정들을 죽이면 그만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생각을 마친 그는 메기도의 주검을 들쳐 안은 다음 모여든 사람들에게로 돌아갔다. 그 잠깐 사이에 당국 관계자가 도착해 있었다. 아미라에게 대강의 사정을 전해 들었다고 했다.
간략하게 설명하고서는 시체를 인계했다. 그러자 질문이 따라붙었다. 자세한 조사를 위해 동행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뇨, 지금은 바빠서요. 내일쯤에 서부 거래소 사장 통해 연락 주시면 그때 찾아뵙겠습니다.
다행히도 일이 더 귀찮아지지는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사이라크의 마력 흐름을 감지했습니다. 차원문을 쓰는 게 아니라, 육상으로 국경을 빠져나가려는 것 같습니다. 유혈사태까지 무릅쓰고 있는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