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말단 현장직의 비애 (2)
흙먼지가 걷히며 수정 거인이 몸을 일으켰다. 수정과 건물 파편이 뭉쳐서, 인간 형상으로 덩어리진 것이다. 어깨에 비하면 작은 머리와, 손발을 땅에 짚은 자세. 이목구비 없는 고릴라를 연상시키지만 체고는 란드와르보다도 다섯 뼘쯤이 더 높다.
경악이 모두를 휩쓸었다. 마흐트의 수도자 몇몇이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일단 물러나요!"
놈의 허리께까지 얼음 방벽이 자라났지만 소용이 없었다. 팔이 방벽을 후려치자마자 얼음은 경쾌한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다행히도 거인은 공격을 이어가는 대신 그 자리에 멈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낯선 곳에서 길을 잃어버려서, 당혹에 사로잡힌 아이처럼 보인다. 메기도의 무의식이 구체화된 걸까?
무의식이라는 부분이 그나마 위안이 됐다. 저런 짓을 의식적으로 벌일 수 있었더라면 훨씬 무서운 상대가 되었을 테니까. 그렇다, 상대. 이제부터 게임이었더라면 보조 시나리오 우두머리쯤은 되었을 돌연변이를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란드와르는 이를 질끈 악물고는 허리로 손을 옮겼다. 호신용 한손검 자루가 손가락에 잡혔다. 끄트머리에는 교단 징표가 달려 있는 물건이다. 여기에서 망치를 꺼내들었다가는 요정들의 미끼를 무는 꼴이니까, 이 칼로 상대할 수밖에 없다.
굳어 있는 치안대원들을 밀쳐내고 수정 거인의 앞에 섰다. 불신과 희망이 뒤섞인 눈길이 등을 따갑도록 찔렀다. 걱정 어린 만류까지. 사제님, 조금 더 기다려 보시죠, 지원군이 오는 중이에요… 이유는 알았다. 한손검으로 건물 한 층 높이의 수정 거인을 상대하려는 건 무모한 시도처럼 보일 테니까.
<켜야겠네요, 그렇죠?>
티아의 속삭임과 동시에 검은 기운이 검신을 감쌌다. 주위의 빛을 앗아가는 것처럼, 짙고 치밀한 어둠이다. 아즈리온의 권능 중 하나. 효과는 근원에, 대상을 이룬 마력 갈래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가하는 것. 신앙심은 많이 들어가지만 효과는 확실하다.
란드와르는 뒤를 돌아보았다. 요정 놈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따라왔고, 벨레다는 멀찍이 떨어져 있다. 반지가 없으면 잘 달리는 각인사일 뿐이니까. 동료 둘을 확인한 그는 치안대원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일단은 나 혼자 처리할 수 있습니다. 대신 다들 아즈리온한테 기도를 해야 돼요. 수도자 분들도, 마흐트가 아니라 아즈리온한테 기도를 해야 한단 말입니다."
진심 어린 기도를 받으면 신앙심 충전 속도가 빨라졌다. 모든 권능은 신앙심을 요구했다. 수입과 지출 관리는 중요한 것이었다.
"나으리, 저도 기도를 해야지 않겠습니까."
요정 놈이 갑자기 반론했다. 여기서, 이 상황에서 전투에서 빠진다고? 란드와르는 질문에 앞서 수정 거인의 동태를 힐끔 살폈다. 아직까지는 큰 움직임이 없었다.
"왜."
"인간들 한복판에서 그랬다가는… 모습이 안 좋을 텐데요. 입단속을 할 장소는 아니지요. 소문이 하루 만에, 카스바까지 퍼질 겁니다. 의식 공유가 아니더라도 제가 나으리와 다닌다는 걸 모두 알게 되겠지요."
무슨 소리인가 싶더니 한 발짝 늦게 이해가 왔다. 야스와다 마법이든, 바단의 혈마법이든 간에 아즈리온의 사제가 쓸 주문은 아닌 것이다.
"너 원소학 연습 안 했지?"
"늑대인간 꼬마한테 꽃 만들어 주는 데에나 썼지요.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됐다. 너도 뒤에서 기도나 해라."
테네브로즈가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란드와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멍청한 대화를 나누느라 일 분쯤을, 그만큼의 신앙심을 낭비한 셈이었다. 이 짓을 빨리 끝마쳐야 했다.
"기도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란드와르는 열성적인 선교사처럼 외치며 수정 거수에게로 접근했다. 단신으로 괴물에게 덤벼드는 사제가 하기에는 이상한 말이었지만, 떠오르는 문장이 달리 없었다.
어차피 그 역시 기도를 올리고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수신인은 저 하늘의 금치산자. 아즈리온님, 힘도 정신도 멀쩡하셨더라면 참 좋았겠지요. 사고를 당한 사람을 탓할 수는 없으니 이번에도 잘 해 달라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멀뚱하니 서 있는 거인의 팔뚝에 칼을 쑤셔 넣었다. 칼끝은 어렵잖게 수정 결정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갔다. 돌리듯 비틀자 석영질이 긁히는 소리와 함께 번쩍이는 돌조각이 떨어져 나왔다. 검은 기운이 물양동이에 떨어트린 잉크처럼 퍼져 나가더니…….
[삼촌… 삼촌? 여긴 어디죠? 왜…….]
그 외침이 사방에서, 유리조각이 부딪히는 소리처럼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 * *
나트람은 눈을 떴다. 눈꺼풀 아래를 메우던 환영이 한순간에 달아나더니 익숙한 정경이 그 자리를 채웠다.
이곳은 야스와다. 별불꽃 본가의 서재. 책장의 책들은 기준에 맞추어, 완벽하게 분류되어 있다. 탁자에 오른 것은 천체 모형 장식과, 2교구에서 올라온 보고서와, 시종을 부를 때 쓰는 종과, 말라비틀어진 손 박제.
그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장면을 복기했다. 눈앞에 나타난 것은 분명 애완동물이었다. 헤이딘을 찔러 죽이고 도망친 그 인간 아이 말이다. 모습은 물론 달랐지만 나트람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하지만 메기도는 인간 소녀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굴었고, 대신 헤이딘을 찾아 부르기 시작했다. 결국 소녀는 녀석에게 반지를 넘겨준 다음 자리를 떴다. 허공을 올려다보며, 거기에 제 삼촌이 있는 것처럼 주절대던 메기도. 반지에서 뻗어 나오던 보랏빛 마력 줄기…….
"동생아, 내가 드디어 너를 다시 찾았구나."
나트람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열광은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어두운 불길만이 뱃속에서 이글거릴 뿐이었다. 그 불꽃은 까마득한 시간에 걸쳐 타올랐고, 살과 피를, 한때 그를 이뤘던 것들을 천천히 집어삼켰다.
소년 시절에, 그토록 바랐던 게 무엇이었던가? 은빛매와 손잡고 동생을 별채에 가뒀을 때에는? 오래전에 답을 잃은 물음이 날벌레처럼 들끓었다.
답은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그래야 했기 때문에 자신의 몫을 취했을 뿐이다. 그런 삶의 궤적 속에서 지배는 분노의 동의어로 변했으며 소유는 허무의 다른 형태가 되었다. 따라서 나트람은 서재에 홀로 남은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아득한 권태를 느끼곤 했다…….
그러나 헤이딘의 존재는 새로운 불꽃을 틔우기에 충분했다. 그는 탁자로 손을 뻗어 종을 움켜쥐었다. 금속음이 울리는 동시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서재에 발을 들였다. 명령은 짧았다.
"러스터를 데려오너라. 논의할 일이 있으니."
* * *
치안대원과 수도자들은 기도하는 것조차 잊고는 앞을 빤히 바라보았다. 검술에 조예가 깊지 못한 이들이 보기에도 전사의 움직임은 예사롭지 않았다. 검이 수정 덩어리의 성긴 부분을 파고들 때마다 파편이 비산했다.
이윽고 검은 균열이 불어나면서 거인의 오른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둔하고 커다란 충돌음이 귓전을 강타하더니 땅이 잠시 뒤흔들렸다. 진동이 너무 강한 나머지 떨어져 나온 팔마저 함께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정말로 움직이고 있었다.
바닥에서 꿈틀거리던 팔은 허공에 둥실 떠오르더니 전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치안대원들 사이에서 걱정 섞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조심해요!"
란드와르는 그 소리가 닿기도 전에 자리를 피하고 있었다. 사냥감을 잃은 손은 그대로 바닥을 치고서는 뻣뻣하게 굳었다. 그는 눈대중으로 팔과 본체 사이의 거리를 견주어 보았다. 상완에서부터 잘려 나와서, 비스듬한 경사를 그리는 수정 덩어리. 엎드리듯 팔다리를 바닥에 붙이고 있는 괴수.
어쩌면 머리 위에 오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란드와르는 깊게 심호흡하고서는 부서진 팔의 손등에 발을 얹었고, 그게 다시 움직이기 전에 서둘러 달려 올라갔다. 꼭대기에서 본체까지의, 어깨까지의 거리는 1미터 정도. 그 거리를 뛰어넘으면서 정확한 지점에 칼을 꽂아 넣는 게 가능할까? 몸무게를 지탱할 수 있을 만큼 단단하게?
물음표가 거기까지 꼬리를 문 순간 괴수가 란드와르를 발견했다. 팔이 재차 움직이면서 세상이 기울어졌다. 마지막 질문. 지금이라도 퇴각해야 하나? 아니. 분리된 팔과는 별개로 본체 역시 란드와르에게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기회였다.
도약하듯이 뛰어오르며 놈의 몸체에 칼을 박아 넣었다. 얼음이 깨지는 듯한 파열음과 함께 검신이 성긴 수정 덩어리를 부수며 나아갔다. 란드와르는 칼자루를 손잡이로 삼고서는 몸을 거인의 어깨 위로 끌어올렸다.
인간이 그런 것처럼, 이놈도 목을 치면 죽을까? 아니면 아즈리온의 권능을 믿고, 마력 갈래 자체가 끊겨 나가길 비는 수밖에 없나?
어쨌거나 땅에서, 팔과 본체를 따로 상대하는 것보다는 여기에서 목덜미를 찌르는 게 나을 터였다. 앞선 공격으로 판단하건대 뜯긴 팔이 움직일 수 있는 반경에는 한계가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죄송해요…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이윽고 본체는 낙담한 것처럼 멈춰 섰다. 그는 메기도의 목소리를 무시하려 애쓰며 칼질을 거듭했다. 이런 놈을 죽이려니 미안하긴 하지만, 이건 마력이 뭉쳐서 만들어진 돌연변이일 뿐이고, 살려뒀다가는 인간이 얼마나 더 죽어나갈지 모르는 일이고, 그리고…….
검은 균열은 이제 거인의 몸 전체로 뻗어 있었다. 깨지기 직전의 도자기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란드와르는 길게 심호흡했고, 정수리 깊숙이에 칼을 꽂아 넣었다.
[미안해요, 삼촌…….]
그 말과 함께 거인의 몸이 허물어졌다.
* * *
란드와르가 수정 거인을 상대하는 동안 군중은 몇 배로 불어나 있었다. 고위 사제가 한손검 하나로 괴물을 때려잡는 게 흔한 구경거리는 아니니까. 테네브로즈의 말대로 카스바까지 소문이 퍼질 판이었다.
이미 들킨 거 아니야?
환술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안도가 됐다. 흑발의 교단 사제. 이름은 슈리브. 지금의 자신은 붉은머리 란드와르와는 다른 존재인 것이다.
불안을 애써 지운 다음 군중에게로 다가갔다. 지하 투기장에서 환호를 받을 적과는 다르게 반짝거리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벨레다와 테네브로즈가 가장 앞에 나와 있었다. 란드와르는 괜스레 가벼운 투로 말을 걸었다.
"기도는 열심히 했냐."
"살면서 저주할 일만 많았지, 신한테 기도를 올린 건 처음이라 잘 됐는지는 모르겠네요. 그래도 최선을 다했어요."
"그럼요. 제가 나으리보다는 기도문을 잘 알지 않습니까."
"그래, 잘 했다."
기대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고난 하나를 해결해서 그런지 대답이 껄끄럽긴 해도 기분이 썩 괜찮았다. 긴장이 빠르게 풀리며 훈훈한 느낌이… 생겼다가 곧바로 사라졌다. 그는 얼굴을 굳히고는 빠르게 정정했다.
"아니지. 잘 한 건 나고 너희는 한 게 없지. 너희는 뒤에서 구경만 했지."
"나으리, 듣고 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체통을 좀 지키시는 게 좋겠는데요."
"나 원래 힘들 때에는 아무 말이나 하는 거 알잖아. 요정 놈이나 확인하러 가자."
란드와르는 다른 사람들에게 간략한 상황을 설명했다. 저기에 요정이 있고, 무력화된 상태인 건 분명한데,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고. 일단은 자신과 일행이 직접 가서 파악을 해 보겠다고. 질문은 그 다음에 하라고.
마지막으로는, 따라오는 건 자유지만 그 경우에는 목숨을 장담할 수 없으리라고 엄포를 놓았다. 협박이 효과가 있었는지 섣불리 발을 내딛는 구경꾼은 없었다.
요정 놈과 벨레다를 데리고 나온 그는 골조 더미 뒤편에 쓰러져 누운 요정을 발견했다. 짧게 깎은 청람색 머리와 갸름한 뺨이 유약한 인상을 주는 청년이었다. 소년 모습의 헤이딘을 많이 닮았다. 아무래도 친척이니까.
란드와르는 녀석의 손에서 반지를 빼냈다. 겨울이라 그런지, 아니면 목숨이 끊어진 탓인지 살덩어리는 뻣뻣하고 차가웠다. 마치 부드러운 금속 조각을 만지는 것만 같다. 시체를 묘사할 때 납, 이라는 단어가 곧잘 쓰이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일까.
일단 반지는 벨레다에게 돌려주었다. 그러자 가장 쉬우면서도 마음이 복잡해지는 관문 하나가 남았다.
"상태 한 번 봐라. 만약 숨이 붙어 있으면… 네가 죽여."
"예."
테네브로즈는 짧게 대답하고는 입속으로 주문식을 외웠다. 일순 녀석의 두 눈에 보랏빛 섬광이 번뜩였다. 그러고는 미간이 좁아지면서…….
"그릇에 영혼이 아예 남아 있지 않군요. 저승에 간 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