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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107화 (108/258)

107화 말단 현장직의 비애 (1)

치안대원들은 건물 안의 사람들을 모두 대피시킨 다음 흔들리는 벽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섣불리 진입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자리를 뜰 수도 없는 판이었다. 말단 현장직 특유의 비애가 느껴졌다.

란드와르는 똑같은 기분에 사로잡힌 채 벨레다에게로 성큼 다가갔다. 수갑 형태의 마력 구속구를 찬 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삐죽이고 있었다. 젊은 치안대원이 녀석 뒤에 서 있었다.

벨레다가 먼저 말을 붙였다.

"오실 줄 알았어요. 조금만 더 일찍 왔으면 좋았겠지만요."

그래도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놓였다. 건물이 몇 채가 더 무너지건 간에, 일단 벨레다는 목숨을 건진 것이다. 그렇다면 헤이딘도… 힐끔 고개를 숙인 란드와르는 아무것도 없이 곧게 뻗은 열 손가락을 발견했다.

"반지는?"

"저 안에 있죠. 돌아가실지 살아남을지는 모르겠어요."

잠잘 때도 빼지 않는 반지였다. 실수로 떨어트렸을 리는 없고, 일부러 빼서 던졌단 말인가? 왜? 자세한 사정을 따져 물으려는 찰나 치안대원이 란드와르를 가로막았다.

"이 애랑은 무슨 관계입니까?"

"보호자 되는 사람입니다. 무슨 상황인지 듣고 싶은데요."

"복잡합니다. 선생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캄파놀로 종금 건물에서 원인 미상의 폭발이 일어났고, 여기가 두 번째로 공격받고 있습니다. 배후에 누가 있는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피보호자분께서 폭발과 동시에 건물 뒤편에서 빠져나왔다는 증언이 여럿 있더군요. 게다가 신원 역시 불상인 관계로……."

"신원 불상이라뇨, 시민증도 보여줬잖아요! 난 우르게슈 사람이에요! 서부 거래소 사장한테 초대를 받았고요!"

벨레다가 말허리를 자르며 짜증을 터뜨렸다. 심정은 이해가 갔다. 제 딴에는 잘 해 보겠다고 따라갔는데, 반지는 잃은데다가 범인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다.

"저 애가 범죄자인 건 사실인데, 이 사태와는 관련이 없어요. 수갑을 풀어 주시죠."

"범죄자라고요?"

"악질적인 금융사범이죠. 서부 거래소 계좌가 동결됐고, 그것 때문에 로야페타에 왔어요."

"그 말을 믿으려면… 선생님이 누구신지부터 알아야겠습니다."

란드와르는 턱을 까닥여 테네브로즈를 불렀고, 손등에 성흔을 띄웠다. 녀석도 의도를 알아채고는 같은 행동을 취했다. 치안대원들은 일순 굳더니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감이 잡혔다. 아홉 교단의 고위직 사제들은 파생상품 거래소에서의 투자가 불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이 금융사범의 일행 둘은 성흔을 받은 사제라는 것.

이윽고 상대의 표정에 낙담이 일었다. 그는 벨레다의 수갑을 풀고는 시무룩한 어조로 푸념을 쏟아냈다.

"예, 무슨 일인지는 알았습니다. 우연한 기회로 여기 들르셨고, 이 분이 건물 뒤편에서 빠져나온 것도 그저 우연이라 이거죠. 사태와 관련이 있으셨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무슨 일인진 알아요. 요정이 마력 폭풍을 일으키는 중이죠.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고. 이게 평범한 산업 재해였으면 숙소에서 빈둥거리고 있었을 겁니다. 저 올챙이떼처럼 바글거리는 사람들을 뚫고 오는 게 아니라."

거기까지 설명하자 다양한 목소리가 짧은 신음을 담아 새어나왔다. 그새 다른 치안대원들도 란드와르의 곁에 모여들었던 것이다. 이윽고 그들 중 하나가 침착을 되찾고는 물었다.

"요정들이 왜 이러는 걸까요? 앞선 건물은 종금사가 입주해 있었고, 여긴 마흐트 회당이죠. 이런 곳을 터뜨려서 얻을 이득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그제야 대피해 나온 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흐트 교단의 수도복을 입고 있었다. 마흐트가 마법사들의 신이긴 하지만 이 수도자들은 별 도움이 되진 않을 듯했다. 마법 계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대부분 타일라프람에 가 있으니까.

"그건 몰라요. 그리고 요정들이 아니라 요정입니다. 요정 하나요."

"하나라고요? 하나가 이걸… 이걸 어떻게?"

"그것도 모릅니다. 확실한 건 저기 있는 게 요정 하나라는 것뿐이죠. 일단 난 이 애랑 얘기를 좀 해야겠어요. 자리 좀 비켜 주시죠."

치안대원들은 석연찮은 표정으로 머뭇거리다가 물러났다. 란드와르는 테네브로즈와 함께, 벨레다를 끌고 스무 걸음쯤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반지를 일부러 빼서 던진 거야?"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나요, 스승님이 시킨 거죠. 손가락에 끼워 주라던데요."

"넌 왜 시키는 대로 했냐. 그냥 무시하고 달리면 되잖아."

"스승님 성격에 그게 되나요, 안 그러면 열흘 밤낮은 잠도 못 자게 투덜거리실 텐데요. 꿈 속에서도 그 소리가 들린다고요. 그 요정 녀석도 한 번 당해 보라고 했죠."

헤이딘이 제자를 버리고 조카를 선택했나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메기도는 인간을 아예 알아보지 못했고, 도리어 헤이딘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고 했다. 하지만 헤이딘이 답할 방법은 없었고, 무시당했다고 여긴 메기도는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건데."

"신께서도 모르는 일을 전들 알겠나요, 옷은 멀쩡했으니까 반지도 멀쩡하길 빌어 봐야죠."

란드와르는 이를 악물고는 건물 뒤편을 넘겨다보았다. 건물은 형체를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곧 무너질 것처럼 흔들거렸다. 마법사도, 사제도, 신도 모르는 문제가 저기에서 꿈틀거리는 것이다… 그는 치안대가 던진 질문을 복기했다.

― 요정들이 왜 이러는 걸까요? 앞선 건물은 종금사가 입주해 있었고, 여긴 마흐트 회당이죠. 이런 곳을 터뜨려서 얻을 이득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말 그대로, 이득을 볼 여지는 없다. 하지만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 자체에 목적이 있다는 말이 된다. 로야페타를 혼란에 몰아넣고, 그 결과를 본다. 왜?

란드와르는 문득 자신이 여기에 왔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혹시 이건 아즈리온의 화신을 꾀어내기 위한 미끼가 아닐까? 과도한 억측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요정들의 저의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면 질문 두 번째. 화신이 현장에 나타났다고 치자. 요정들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메기도는 누님과 떨어진 채, 저 건물 뒤에 박혀 있는데?

게임에서, 감각을 공유하는 방법은 한 가지. 야스와다 학파의 마법사가 정신 지배를 쓰는 것이다. 요정 하나를 사흘간 지배하는 데에 필요한 제물은 요정 열둘. 최소한의 요구치, 열둘.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긴 했다. 여기에 화신이 걸려든다면 여덟 명은 물론이고 그 열 배도 바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 경우에도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남았다. 헤이딘을 알아보고, 말을 걸었다가, 다시 좌절감에 사로잡히는 건 정신 지배에 걸린 놈이 할 행동이 아닌 것이다. 테빈처럼 실실 웃고 다닌다면 몰라도.

그는 테네브로즈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사제야, 혹시 정신 공유하는 마법이 따로 있냐. 정신 지배 말고 공유만 되는 거."

"있지요. 제물은 제물대로 많이 들어가는데다가 제약도 심해서 자주 쓰이지는 않지만요."

정확한 이름은 모르겠지만, 란드와르는 캐릭터 테네브로즈의 스킬창에는 해당 주문이 없었다는 점을 떠올렸다. 그 제약이란 데에 이유가 있겠지 싶었다.

"무슨 제약인데."

"들여다보는 쪽에서 주문을 시전하면 끝나는 게 아니라, 의식을 넘겨주는 쪽에서도 야스와다 마법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대응되는 주문을 또 시전해야 하거든요. 한 쌍인 셈이지요."

게임 전체에서 얻을 수 있는 야스와다 요정 동료는 테네브로즈가 유일했다. 들여다보는 주문을 시전해도 그걸 받아줄 아군이 없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스킬창에서도 구현이 안 됐겠지.

하지만 메기도의 뒤에 있는 것은…….

"너는 씨발, 그걸 알면 처음부터 이야기를 했어야지. 보내면서 아무 준비도 안 했을 리는 없고, 감시를 하고 있을 게 아니냐."

"전 나으리께서 뭘 모르는지를 모르는데요. 온갖 걸 알고 계시면서도 이런 건 모르다니 정말로 이상한 일입니다."

"일단 요정 일은 무조건 니가 나보다 더 잘 아는 거야. 앞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말해."

란드와르는 으르렁거리면서 자신의 신분을 되짚어 보았다. 가명을 쓰고 있는데다가 겉모습은 환술을 써서 바꾼 상태다. 테네브로즈도 마찬가지고 벨레다 역시 카스바에서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다.

여기서 다시 문제. 인간은 아예 보지도 못하고 영혼만 보는 놈에게, 화신은 어떻게 보일까? 환술을 쓴 요정은? 애초에 저 놈한테 환술이 소용이 있을까? 나트람도 놈과 똑같은 모습을 보게 되는 걸까?

그러나 고민이 길어지기도 전에 굉음이 모든 생각을 몰아냈다. 진동하던 건물이 벽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낙진처럼 부풀던 먼지가 가라앉자마자 찌를 듯한 빛이 잔해로부터, 사방으로 뻗었다. 투명한 석영 결정이 석재 파편을 집어삼키며 빠르게 자라나고 있었다.

"우와."

란드와르는 거대한 수정 거인이 몸을 일으키는 광경 앞에서 그저 감탄했다. 이제는 욕할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좋습니다, 난 그냥 비즈니스 첩보물을 한 편 찍으러 온 건데 일이 이렇게 됐군요. 이제 어떻게 할까요?

*  *  *

<도대체 이게 어쩐 일이냐? 로야페타에는 왜 온 게야?>

"별자리가, 별자리가 뒤틀렸어요. 의회에서 별자리가 뒤틀린 요정들을 인간 세상으로 보내기로 했거든요. 저는 누님과 왔는데 누님을 잃어버려서, 이렇게 됐어요."

<누님이라면… 사이라크? 그 애랑 이 꼴이 무슨 상관인지 궁금하구나.>

헤이딘은 메기도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를 느꼈다. 이런 대화에 무슨 소용이 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진동은 잦아들기는커녕 점점 커지고만 있었다.

메기도는 소매로 눈가를 훔치더니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함께 다니기로 했거든요. 울 때마다 주위가 흔들려요. 아버님이나 누님이 와서 호통을 치는 게 아니라면 쉽게 멈추지 않고요. 그런데 누님도 잃어버린 데다 일이 이렇게 되어서요, 언제 끝날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울 때마다 주위가 흔들려?>

"이유는 저도 모르겠어요. 나우파나 폐허에 다녀온 후로 그렇게 됐어요. 수시로 마력 폭풍을 불러내죠. 삼촌은 제 망상이시고요, 그렇죠? 마력 폭풍이 생길 때마다 환각을 보게 되거든요. 환각과 이야기를 나누다니 우스운 일이지요."

헤이딘은 그게 거짓말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지금조차도 돌멩이가 떠오르고 주위가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각인에 갇힌 영혼까지 보고 있지 않은가. 맙소사, 나트람은 이런 놈을 왜 인간 도시에 떨어트렸지? 점괘가 어쨌건 간에…….

<나트람… 아니지, 네 아버지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널 내보낸 게냐?>

"아버님이요?"

메기도의 눈이 흔들렸다. 헤이딘은 묘한 불안 속에서 다시 물었다.

<그래, 나한테는 형님 되는 분 말이다.>

요정은 잠시 침묵하더니 엇나간 답변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래요, 아버님도 이걸 보고 계실 거예요. 본가에 계시긴 하지만, 주문을 썼거든요. 제물을 열둘이나 바쳤어요…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는데, 아버님께서도 절 믿겠다고 하셨는데, 이러고 있네요. 아마도 저 같은 쓰레기에게 기대를 건 게 잘못이라고 생각하시겠지요. 또다시 모든 걸 망쳐 놨어요. 그때, 그 녀석을 제대로 죽여 놨어야 했는데… 하지만 저는 정말로……."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헤이딘은 더 이상의 대화가 소용없을 것임을 직감하고 야스와다의 주문을 준비했다.

제물이 없을지라도, 괜찮다. 각인이 새겨진 반지를 끼고 있다는 건 마법진에 맞닿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거기에 담긴 힘이 착용자에게 역류할 때에는 평소보다도 더 큰 효과가 나타난다.

주문식을 모두 읊자 반지에서 시작된 보랏빛 마력 줄기가 손목을 타고 올랐다. 곧이어 메기도의 입에서 짐승과 같은 울부짖음이 뛰쳐나왔다. 마치 심하게 매질당한 짐승처럼.

"죄송해요. 하지만, 하지만… 자, 자, 잘못했어요!"

메기도의 몸이 허물어지는 동시에 건물이 마르지 않은 찰흙처럼 문드러졌다. 폭발적인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사방을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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