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케이크의 배합 비율 (5)
어느 정도까지는 수레로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오판이었다. 진로가 막힌 수레들이 딱정벌레 표본처럼 6차선로를 뒤덮고 있었다. 쉬브를 끌고 왔을 때보다도 더 난장판이 된 것 같았다.
"이거 안 되겠다. 그냥 내려서 뛰자."
"예."
테네브로즈는 줄곧 태연한 태도를 유지했고, 수레에서도 선뜻 뛰어내렸지만… 머리는 더없이 복잡했다. 메기도가 로야페타에 있다는 것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알 수밖에 없었다. 솔로틀의 영향력은 그뿐만 아니라 그의 누님, 엘드리그에게도 닿고 있었던 것이다.
어둠달은 솔로틀을 적극적으로 돕진 않았지만 엘드리그를 가문에 내버려 두는 방식으로 협조했다. 이제는 딤 나겔 역시 우군으로 들어온 상태였다.
덕분에 테네브로즈는 야스와다의 상황을 대부분 전달받을 수 있었다. 엘드리그가 알아낸 것을 솔로틀이 옮겨 주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걸 알고 있을지라도 행동에 나서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었다.
<또 투덜거리고 있구나.>
제 생각에는 그냥 솔직히 말해도 될 것 같은데요. 저쪽에서도 눈치를 챘을 겁니다.
그는 솔로틀에게 불평을 던졌다. 무조건 침묵을 지키라는 지시를 받았던 것이다. 메기도가 여기에 와 있다는 걸 알리면 어떻게 알았느냐는 추궁이 들어올 테고, 그 다음에는 정체를 들킬 수밖에 없으니까.
<네가 입이 가벼운 탓이 아니냐.>
그러니까요. 나으리도 의심을 하시니 저 위에 있는 것들은 확신을 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도 내버려 두는 걸 보면 뭔가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일단은 가만히 일을 도와.>
솔로틀의 단언에 테네브로즈는 미간을 좁혔다. 메기도를 로야페타로 보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스멀거리던 불안감이 현실로 닥쳐온 판이었다. 그것도 상상하지도 못한 규모로.
<불평을 줄이라고 수십 번은 말했지 않으냐.>
아뇨, 더 길게도 할 수 있습니다. 일을 도우려면 진작부터 나으리께 귀띔을 해 주었어야지요. 메기도는 건물을 다 부숴 놓은데다가 사이라크는 어디 있는지 찾지도 못하게 되었는데 돕기는 뭘 돕는다는 겁니까. 물론 제가 할 일이 있긴 하지요. 메기도와 사이라크에게 정신의 감옥을 거는 것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듣지 못한 이야기를 더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요. 이거 원, 정원사가 아니라 고문 기술자로 직함을 바꿔야겠는데요.
<그만, 그만!>
불만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던 와중 솔로틀의 외침이 머릿속에 쩌렁쩌렁 울렸다. 테네브로즈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가 다시 폈다.
교구 부제사장 직함을 달고 신관들을 상대하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일처리가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렇게 수십 년을 참았으니까 앞으로도 그만큼은 참을 수 있다. 참는 것이다.
하지만 청지기님, 거느린 정원사가 둘뿐이라 신중하신 건 알겠습니다. 누님은 본가에만 붙박여 있으니 사실상 저 하나뿐인 셈이지요. 천 년 만에 온 기회라는 것도 알고 있고요. 그런데 계속 신중하기만 하면, 주인님은 언제 모셔 오실 작정입니까? 저야 이렇게 유람을 다니는 것도 좋지만 말입니다…….
* * *
"삼촌, 무슨 말이라도 해 줘요. 여기는 너무 시끄러운걸요……."
헤이딘은 난데없는 통신 장애를 겪고 있었다. 반지에 묶인 상태에서는 아무리 떠들어 보았자 메기도에게는 전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제 말은 아예 안 들리는 모양인데요! 스승님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설상가상으로 녀석은 인간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잘은 몰라도 제정신이 아닌 건 분명했다.
"보자, 스승님의 조카라면… 나트람의 아들이네요! 도대체 뭐랑 결혼했기에 이런 자식이 나왔는지 궁금한걸요. 혼자서 7층짜리 건물을 무너뜨리고, 앞에 있는 사람은 알아보지도 못하고, 영혼한테 말을 거는 요정이라. 설마 마력 지맥이랑 혼례를 올렸나요? 아니면 마공학 동력핵이랑요?"
고민해 보아도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메기도가 못미더운 아들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놈일 줄은 몰랐다. 나트람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녀석이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는다는 것뿐이고, 그리고… 그리고?
"삼촌, 그렇게 내려다보고만 있지 말아요. 나를 여기에서 빼내 줘요. 나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 줘요."
회상은 메기도의 목소리와 함께 끝났다. 언제나 그랬듯 얻어 낸 것이라고는 아득한 공백뿐이었다. 헤이딘은 짧은 신음을 흘렸다. 시야를 잃고 별채에 갇힌 동안,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기억의 궁전을 헤매는 데에 썼다. 그러는 동안 원래의 삶은 차츰 사라지고 말았다.
<몰라. 떠오르는 게 없구나. 내가 저 놈 이름이라도 알고 있는 게 용한 일이지.>
"이런 걸 잊어버리시다니 대단한걸요. 그냥 도망가는 건 어때요?"
<그러다가 건물이 하나 더 무너지면 어떡할 테냐?>
"이러나저러나 죽게 생겼잖아요. 여기 있으면 뭐가 달라질 것 같으세요?"
벨레다가 무엇이라 말하든 메기도의 시선은 헤이딘에게만 붙박여 있었다. 부릅뜬 눈은 한밤중에, 멀리에서 일렁이는 불빛을 발견한 조난자를 연상시켰다.
무언가 떠오르는 듯싶더니 시큰거리는 두통이 일었다. 환상통이었다. 지워진 나날들을 되짚어갈 때면 항상 그랬다. 별채에 갇히기 전에, 자신은 어떤 사람이었지? 나트람의 동생이자 메기도의 삼촌이었던 헤이딘은…….
<얘야, 빠르게 달릴 수 있지?>
"그럼요. 이제 도망갈 생각이 드셨어요?"
<저 녀석한테 반지를 끼워. 말을 걸 수도 있고, 여차하면 목숨을 내 손으로 끊어도 괜찮지. 어차피 저 놈은 너를 못 봐. 돌조각에 맞지만 않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게다. 네가 힘은 약해도 달리는 속도만큼은 빠르니까.>
"반지를 넘겨주라고요? 그 다음에는요? 스승님은요?"
벨레다가 그렇게 물은 순간 주위가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헤이딘은 메기도의 얼굴이 울먹이듯 일그러지는 것을 깨닫고 다급히 외쳤다.
<마력 폭풍을 달래는 데에 반지 하나면 싼 값이지. 어서 하거라!>
* * *
통신이 끊겼어요?
<옛 신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놈이 반신급은 된다는 거 아닙니까. 적어도 울쿠스쯤은 되는 거죠, 안 그래요?
<수정 심장의 경우에는, 경우가 복잡합니다만… 대강은 그렇습니다.>
난 이걸 시뮬레이터에서 본 적이 없는데. 이걸 일부러 뺐을 리는 없겠고, 애초부터 파악을 못 한 거죠? 존재 자체를 몰랐다?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란드와르는 짜증을 억누르며 이마를 쓱 문질렀다. 수레에서 내려 달리는 편을 택하기야 했지만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미라가 아니라 상업 가문 의장의 직함으로도 교통체증은 뚫지 못할 듯했다. 설상가상으로 벨레다와의 통신마저 끊겼다.
일이 왜 이렇게 좆같이 흘러가는 거지?
"야, 사제야. 너 별점술은 잘 아냐."
"나으리께서는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테네브로즈는 귀를 의심하는 것처럼 란드와르를 빤히 바라보았다. 란드와르는 반대로, 별생각이 없었다. 사방이 왁자지껄했고 모두가 각자의 이유로 바빴다. 요정어로 대화를 나눠도 눈치 챌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원래 남한테 관심이 없어요. 아무튼. 잘 아냐고."
"아주 기초적인 것만요. 별자리의 형태를 알려면 책 열 권을 달달 외워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시작이지요. 어엿한 별점술사가 되기까지는 수십 해가 걸린단 겁니다."
"지금 여기서 점을 쳐 달라는 게 아니잖아. 내가 궁금한 건 이거야. 별자리가 틀어질 수도 있냐는 거지."
"별자리가 틀어지다니요."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그러니까, 거기에 영향을 안 받는 누군가가 있으면, 그거 때문에 남들의 운명이 같이 바뀔 수 있냐는 거야."
막 이스트리아에 떨어졌을 때, 이스빈드가 점을 쳐 주었던 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때 이스빈드는 금속판에 나타난 결과를 보고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운명을 읽을 수가 없다고 했다.
거기에 해답이 있는 게 아닐까? 자신이 별자리가 보여주는 미래와는 독립된 존재라서, 계속 변수가 생긴다고? 그래서 야스와다에만 머물러 있을 운명이었던 놈이 로야페타에 나타나게 되었다고?
"예, 가능하겠지요… 가능합니다. 묻는 쪽과 답하는 쪽이 반대가 된 것 같습니다만."
"무식해서 미안하다, 새끼야."
테네브로즈의 말대로 이건 신도가 신에게 할 질문이었지 신이 신도에게 할 질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끄러움을 느끼진 않았다. 거기에 란드와르의 잘못은 없었던 것이다. 잘못은 모두 생쥐들의 몫이었다.
아무튼, 가능하다 이거지. 정리해 보자. 메기도는 원래대로라면 본가에 박혀 있어야 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가 로야페타로 나왔다. 자신의 존재가 녀석의 별자리를 뒤틀어 놓았기 때문에.
<다시 마력 폭풍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규모가 비교적 작습니다만.>
티아가 재차 속삭였다. 그는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저 멀리에서부터, 웅성거리는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오더니 두서없이 흐르던 인파가 방향을 갖췄다. 진원지로부터 멀어지려는 것이다. 란드와르는 반대 방향으로 내달리는 사람들을 뚫고 나아가다가 뒤늦은 질문을 떠올렸다… 벨레다와 헤이딘은? 둘은 어떻게 됐지?
"내가 범인이랑 한 패라니, 우르게슈 시민증이 소지 자체로 범죄 행위인 줄은 몰랐네요! 나는 서부 거래소 손님이라고요!"
목적지를 눈앞에 두기도 전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을 쳤다. 얄궂은 안도감을 느끼며, 란드와르는 마지막 걸음을 내딛었다. 그새 로야페타 치안대가 사건 현장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고, 그 곁에는 마력 구속구를 찬 벨레다가…….
"난 엄연한 피해자예요. 마력 폭풍 때문에 관광도 망치고, 이렇게 수갑까지 찬 데다가, 스승님도 잃어버릴 예정이죠. 사제님이 오시면 알겠지만, 여기에 기념비 세울 준비나 해요. 우린 최선을 다했으니까. 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서부 거래소로 돌아가서 빈둥거릴 걸 그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