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케이크의 배합 비율 (4)
헤이딘의 유모, 딜지는 도련님과 나이가 엇비슷한 아들을 하나 두고 있었다. 러스터였다. 그는 헤이딘의 놀이친구이자 시종으로서 자랐고, 수많은 순간을 보고 기억하게 되었다.
나트람이 딤 나겔의 칼린카를 죽였을 때, 그가 동생을 별채에 가두고 손발을 잘랐을 때, 헤이딘이 인간 소녀를 애완동물로 들였을 때, 러스터도 거기에 있었다. 주인의 주검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 역시 그였다.
그 모든 일을 겪을 동안, 러스터는 누구에게도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다.
…러스터는 눈을 떴다. 새벽이었다. 둔한 통증이 졸음과 뒤섞여 언짢은 느낌으로 변했다. 다시 잠들긴 글른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이윽고 심장 소리가 졸음을 완전히 몰아냈다. 요새는 깊이 잠드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밤을 꼬박 샌 다음 비몽사몽간에 하루를 보내기 일쑤였다.
당분간은 숙소에만 머무를 수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마력 폭풍에 휘말렸을 때 팔이 부러졌던 것이다. 치유사를 부르긴 했지만 완치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휴식 기한은 정해지지 않았다. 뼈가 모두 붙자마자 일선에 복귀할 수도 있었고 이대로 직무를 끝마칠 수도 있었다. 작은 집을 하사받아서, 거기에서 평안한 노년을 보내는 것이다… 딜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나트람은 늙은 하인의 처우를 고민하기에는 너무 바빴다. 아들딸을 인간 도시로 보냈다고 해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2교구 분석실은 날마다 새로운 계산을 쏟아냈고 의회에서 논의할 일도 산더미였다.
따라서 러스터는 기약 없는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갑갑한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딱히 나쁠 것도 없는 매일이었다. 오히려 좋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트람의 시중을 드는 건 그 자체로 신경을 갉아먹는 일이니까.
러스터는 어느 불운한 하인이 그 역할을 맡게 되었을까 궁금해 하다가 그만두었고, 생각의 흐름을 다른 방향으로 틀었다. 한숨에 가까운 혼잣말이 새어나왔다.
"도련님, 죄송합니다.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그 말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는 스스로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헤이딘인지, 메기도인지.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메기도는 제 아버지보다는 삼촌을 꼭 빼어 닮은 아이였으니까.
사이라크는 사납긴 했지만 아버지에게는 순종했다. 반면 메기도는 얌전하면서도 제 뜻을 굽히지 않는 아이였다. 그는 의견이 맞부딪힐 때면 반항심 어린 눈길로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헤이딘이 한때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헤이딘에게는 같은 편이 되어줄 부모가 있었지만 메기도의 적은 바로 나트람이었다. 심지어 헤이딘에게 고발장이 날아들면서 유일한 도피처마저 사라졌다.
결국 소년은 테라스에서 몸을 던졌고, 이틀간 내버려졌다. 사흘째가 되고서야 하인 숙소로 데려가서 돌보아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메기도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앓았다… 러스터가 알던 소년은 그때 죽었다. 깨어났을 때에는 성격이 완전히 변해 있었던 것이다.
소년이 죽음을 결심하기 전에, 몇 마디 말을 남겼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오래된 기억이 후회를 타고 흘러나왔다. 소년 시절의 헤이딘. 딤 나겔. 그리고 나트람. 그리고 자신. 넷이 함께 어울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 장면을 눈앞에 그리진 못할지라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변해 있었다.
"주인님, 만족하십니까? 이게 주인님께서 원하는 것이었습니까?"
짧은 정적이 있더니 암흑이 더욱 선명해졌다. 러스터는 온전한 손으로 귀를 싸매쥐었다. 그러지 않는다면 물론이지, 하는 외침이 쏟아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 * *
메기도는 가까스로 건물을 찾아갔지만 상황은 여전히 나빴다. 요정과 연이 닿은 사람이 누구인지, 그 사람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신을 누구라고 소개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기껏해야 만났던 장소가 건물 3층이라는 사실만 떠오를 뿐이었다.
"용건을 말해요. 아무나 들어올 곳은 아니니까."
"누님… 누님을 만나야 해요. 여기에 있으면 누님이 올 거예요. 여기 있는 사람 중 누군가가 저를 알아요."
메기도가 내놓을 수 있는 답은 그게 끝이었다. 사이라크와 함께 왔을 때에는 줄곧 귀를 막고 있었던 것이다. 직원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말도 어눌하고, 다리도 절룩거리고… 구걸은 다른 곳에 가서 해요. 한 번만 더 귀찮게 하면 치안대를 부를 테니."
눈앞에서 문이 닫혔다. 메기도는 소리 내어 사이라크를 불러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무력감이 정신을 압도하는 동시에 사방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메기도는 조용히 절규했다. 아니야, 안 돼, 멈춰…….
염동술이 몸을 앞으로 밀치더니 어딘가로 떨어트렸다. 무지갯빛의 세상이었다. 움직임을 멈추지 않으려면 이게 모두 환각일 뿐이라는 사실을 되새겨야만 했다. 여기는 로야페타의 상업 지구. 발작이 부순 것은 건물. 뇌리를 파고드는 여자의 목소리.
[무서워하지 마, 내게로 와. 폐허로 돌아와…….]
그러나 마력 발작이 극심해질 때마다 폐허에서의 기억은 현실이 되었다. 로야페타의 붉은 벽돌길은 거울처럼 번들거렸고 곳곳의 건물은 거대한 수정 덩어리로 변했다. 인간들. 수정 껍질에 뒤덮인 채, 빛을 뿜어내는 인간들.
[친우여… 여기는 어디지? 시간이 얼마나…….]
잠시 조용해지나 싶더니 속삭임이 사방에서 윙윙거렸다. 이번에는 남자였다… 그는 계속 도망쳤다. 알 수 없는 덩어리와 날카로운 빛 조각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마력 폭풍이 자신을 따라오는지, 그곳을 맴돌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어느덧 마력이 다하면서 다리를 지탱하던 힘도 사라졌다. 메기도는 균형을 잃고 쓰러졌고, 그 자리에 웅크려 앉았다. 세상은 여전히 무지갯빛이었고, 녹아내렸다가 굳기를 반복했다. 유일하게 분명한 것은 깨진 마력 구속구뿐인 듯했다.
그러더니 뚜렷한 형체가 하나 더 나타났다. 청람색 머리칼의 요정 소년이었다. 환영처럼 반투명했고 허공에 떠올라 있었지만,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적어도 폐허에 있는 수정 덩어리 같지는 않았다.
눈부신 환각 속에서, 메기도는 곧잘 자신 앞에 누가 있는지를 잊어버렸다. 아예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혈족만이 겨우, 흔적처럼 일렁일 뿐이었고 제대로 된 형체를 갖추는 건 나트람이 유일했다. 하지만 이건… 설마 환각이 수법을 바꾸려는 걸까?
문득 메기도는 자신이 어릴 적에는 그렇게 생겼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무언가 달랐다.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지도 않았고 그걸 묶고 다닐 생각은 당연하게도 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혈족 중 하나라 치면…….
생각이 거기에 미치는 순간 머릿속에서 번갯불이 튀었다. 헤이딘을 직접 본 시간은 결코 길지 않았지만 메기도는 그를 잊지 않았다. 잊을 수가 없었다. 서재의 손 박제는, 정원의 장미덤불은, 동생의 엄포는 언제나 죽은 삼촌의 존재를 상기시켰던 것이다.
"사, 사, 삼촌?"
별채에 갇혔다가 죽은 삼촌. 청람색 머리카락을 길게 길렀고, 어릴 때에는 자신을 똑 닮았다던 삼촌. 그가 유령인지 환각인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환각일 테니까.
하지만 헤이딘을 쫓아가야 한다는 확신은 있었다. 발작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끝났던 것이다. 이지러지는 세계 속에서 분명한 존재를 찾고, 그걸 따른다. 그 상대는 대부분 나트람이었고, 가끔은 사이라크였다.
"삼촌."
그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불렀다. 헤이딘은 흠칫 놀라더니 어딘가로 움직여갔다. 메기도에게는 그게 꼭 정방향을 찾는 지침처럼 보였다.
* * *
<잘 됐다기에는… 변수가 하나 있어요. 벨레다가 메기도에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뭐요?
<위험하진 않을 겁니다. 마력 폭풍은 소강상태고, 메기도 역시 공격에 나설 생각은 없어 보이는군요. 그래도 최대한 빨리 가보는 게 좋을 겁니다. 장소를 전해드리죠. 사이라크는 아직 찾는 중입니다… 쉽지는 않습니다만.>
이게 해결됐나 싶으면 저기에서 일이 터지고, 그것까지 수습하면 또다시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변수가 생긴다. 마치 두더지 잡기 게임을 하는 기분이다. 란드와르는 자문했다. 세상이 나한테 왜 이러지?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할 여지는 있다. 거기에서 합류할 수만 있다면 좋은 일이니까. 와그다스 마법사를 텅 빈 사장실에 앉혀 두는 건 낭비니까. 그 사실을 몇 번이고 되뇌이자 마음이 약간은 가라앉았다.
"메기도 찾았다더라. 벨레다가 우리보다 먼저 도착할 거야."
"그 꼬마가요? 따로 지시를 내리신 게 있습니까?"
"지 맘대로 움직이고 있어. 근데 뭐, 서부 거래소로 돌아왔다가 늦게 합류하는 것보단 이게 낫지."
"메기도를 제압하려면… 예, 헤이딘이 필요할 겁니다. 섣불리 다가갔다가 나우파나 마법에 목이 으스러지지 않으려면 보호장을 받아야 할 테니까요. 조카한테 얼마나 가혹해질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둘이 친했어?"
"예전에는 그랬습니다. 지금이야 둘 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니까 완전히 모르는 사이라고 생각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그 영감은 별채에 갇히기 전의 기억은 거의 날아갔단 말입니다."
란드와르는 헤이딘이 이미 울쿠스와 맞서 싸웠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재종손과 조카는 또 느낌이 다르겠지만, 기억도 없다지만, 아무튼. 아무튼… 죄는 모두 나트람에게 있다지만 이것도 참 못할 짓이었다.
"메기도 말이다, 말이 통하는 애냐."
"전혀 아닌데요."
혹시나 해서 던진 질문인데 단호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란드와르는 테네브로즈의 표정을 보고는 살짝 놀랐다. 공포? 얼굴 인식 센서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공포가 맞았다. 이 놈이 이런 감정도 느낄 수 있다니 놀라웠다.
"그 정도야?"
"악인은 아니지만… 울쿠스와는 다릅니다. 잘 우는 것만 제외하면 완전히 다르죠. 녀석과 비교하자면 울쿠스는 지혜의 상징이란 말입니다. 뭔가 해볼 생각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그러면."
"하나밖에 없지 않습니까."
란드와르는 머리에 힘을 주었다. 자신은 지금 지진을 가라앉히고 산불을 꺼트리려는 것이지 아동학대의 가해자가 되려는 게 아니었다. 죄는 모두 나트람에게 있는 것이었다. 좋은 형도, 좋은 아버지도 아니라서.
"됐다, 사람 하나 죽이러 가자."
푸념하듯 한 문장을 뱉은 그는 테네브로즈와 함께 방을 나왔다. 쉬브가 우르게슈 시민증 이야기를 털어놓는 중이었다.
요정들에게 여덟 개를 만들어 주었고, 사이라크와 메기도가 그것 중 뭘 쓰고 있는지는 모른다고. 하지만 집 금고 안에 관련 서류가 남아 있으니 여덟 개 모두 막으면 될 거라고.
로야페타에 남아 있다는 가정 하에, 사이라크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으리라는 계산이 섰다. 아마도 도시 안에 갇혀 있겠지. 요정들이라고 해서 이 상황을 예상하진 못했을 테니까.
그러자 일이 갑자기 쉬워진 느낌이 들었다. 사이라크를 찾아내는 일은 천사에게 맡기고 자신은 벨레다와 합류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건물이 더 박살나기 전에 메기도를 처리하면 끝이다.
"요정 한 놈을 찾았어요. 빨리 출발하지 않으면 뭐가 더 터질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