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케이크의 배합 비율 (3)
원래는 숄을 산 후 마력 결정 가공소를 구경할 예정이었지만 계획이 변했다. 마공학 기기점이 근처에 있었던 것이다.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 최신 기술이 적용된 사치품을 파는 곳이다. 주문제작 방식으로.
가게를 둘러보던 벨레다는 원통형 막대 앞에 멈춰 섰다. 크기는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 정도고, 꼭대기에는 수정 프리즘이 붙어 있다. 빛이 그 안에서 튕겨 나오더니 인간의 형상으로 변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환영이라면 뻣뻣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도, 이건 살아 있는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점원이 설명을 붙였다.
"타일라프람에서 제일가는 마공학자가 직접 설계한 물건입니다. 402개의 주문을 한데 모았고, 재료는 하나같이 최고급품이지요. 근처 스무 걸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억하고 보여줍니다."
벨레다는 고개를 힐끔 돌려 그 옆의 안내판을 보았다. <추억 기록기, 가격 문의, 제작기간 6개월.> 무슨 원리인지는 몰라도 품이 꽤나 많이 드는 모양이다. 이걸 주문해서 뜯어보는 게 현명한 일일까?
<이것보다는 아까 전의 그 물건을 좀 보자꾸나. 가격이 얼마인지 물어 봐. 아니면 그 마공학자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도 괜찮겠지. 그 장인놈들보다는 말이 통하는 인간이었으면 좋겠구나.>
구경이 길어질세라 헤이딘이 끼어들었다. 유령과 함께하는 삶의 단점이다. 유령은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지만 살아 있는 사람은 입을 다물어야 하니까. 남들 앞에서, 허공에 대고 떠들었다가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게 뻔하다.
벨레다는 생각했다. 스승님, 이건 제 돈이에요! 제가 뭘 사는지는 제가 정한다구요! 그래요, 물론 스승님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테고, 지금도 여러모로 도움을 주고 계시죠. 이렇게 유능한 경호요원은 한 달에 천만 탈로나를 줘도 못 구할 테고요. 하지만…….
"어?"
무언가 크고 무거운 게 창문을 뚫고 들어오더니 추억 기록기를 쓰러트렸다. 벨레다는 잠시 굳어 있다가 그 덩어리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철근이 박힌 건물 파편이었다. 상황을 파악하는 동시에 비명이 창턱을 넘어왔다.
"이건… 피하는 게 좋겠군요."
서부 거래소 직원이 벨레다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녀는 망연자실하게 굳어 있는 점원을 힐끔 보고서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바로 옆 건물이 천천히 으스러지고 있었다. 거대한, 보이지 않는 손이 위아래를 움켜쥐고 비트는 것처럼.
<요정이 여기에 왔다. 무색 마력이 느껴지는구나. 나우파나 놈이야.>
헤이딘은 그새 바깥을 둘러보고는 벨레다의 곁으로 돌아왔다. 반지에 영혼이 묶여 있긴 해도, 백 걸음까지는 마음껏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문의 흔적을 감지하는 면에서는 살아 있는 마법사들보다도 뛰어났다.
<이런 일을 벌이려면 적어도 네댓 명은 필요할 게다. 그것도 꽤 실력이 좋은 놈들로. 이럴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이구나. 인간들의 땅에 중요한 정보를 남기진 않았을 테고, 누군가를 죽이려면 더 조용한 방법이 있을 텐데…….>
머릿속에서 선택지 두 개가 번뜩였다. 직원을 따라 란드와르와 합류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여기에 남아서 사태를 지켜보는 게 좋을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란드와르도 이곳에 올 테니까. 서부 거래소까지 가 봐야 텅 빈 사무실에서 손가락만 빨고 있을 공산이 크다.
"자, 서부 거래소 직원분. 나 좀 봐요."
고개를 돌린 직원의 얼굴에는 짜증이 완연했다. 서둘러 자리를 피해도 모자랄 판에 무슨 늑장을 부리느냐는 투였다. 벨레다는 시선을 똑바로 맞추고는 허공에 기호를 그렸다. 즉발 혼란. 지속시간은 8초.
"저 사람, 신경 쓰지 말고 거래소에 가 있으라고 말해 둬요. 문제없을 거예요."
벨레다는 그렇게 외치면서 바깥으로 달려 나왔다. 서서히 무너지는 7층짜리 건물 앞으로, 도망치는 사람들의 행렬이 급류를 이루고 있었다. 녹아내리는 얼음기둥과 거기에서 시작되는 물길을 보는 것만 같다.
<도대체 생각이라는 걸 하고 사는지 의문이구나.>
유령이 언제나처럼 투덜거렸다. 벨레다는 허공에 떠오른 요정 소년과 시선을 맞췄고, 씩 웃었다.
"저보다 생각이 빠른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게요. 그러면 스승님, 어디로 가야 하죠?"
* * *
추적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헤이딘은 판단을 수정했다. 이 사태를 일으킨 건 요정 마법사들이 아니었다. 마법사 하나였다. 혹은 그것조차 아닐지도 모른다.
<이건 의도된 주문이 아니야. 그렇다기에는 너무 거칠어. 마력을 제어하지 못하고 터진 모양이다. 흔적이 계속 이어지는 게 이상하지만… 일단 계속 따라오너라.>
"제어하지 못하고 터졌다고요. 각인이 잘못된 걸까요? 하지만 이런 폭발을 일으키려면 규모가 커야 할 테고, 가동에 쓰이는 마력도 어마무시할 텐데요. 여긴 상업지구예요. 공장이 아니라구요. 게다가 요정들이 이런 일을 벌일 이유도 없는걸요."
지나가는 사람들이야 많았지만 벨레다는 그냥 말했다. 치안대원들이 몰려나오고 수레들이 도로에 멈춰서는 판에 여자애 하나에게 관심을 줄 인간은 없으니까.
<나라고 알겠느냐?>
"추적자셨잖아요. 요정들 수법은 저보다 더 잘 알겠죠."
<그 시절은 기억이 안 나. 내가 어느 교구 소속이었는지도 모른단 말이다. 형님한테 졌으니 3교구는 아니었겠지. 애당초 나는 싸움박질을 좋아한 적이 없었어. 1교구나 2교구일 게야. 아무튼…….>
헤이딘은 앞서나갔고 벨레다는 그 뒤를 따랐다. 치안대에게 검문을 받기도 했지만 그건 교단 징표와 아미라에게서 받은 편지봉투를 보여주자 해결이 됐다.
<그런 걸 왜 챙기나 싶었더니.>
"스승님은 카스바에서 저랑 같이 몇 년을 살았는데 아직도 그러세요. 이런 건 다 쓸 데가 있다니까요."
헤이딘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다시 무색 마력 갈래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주문의 목적이 폭발이었더라면 마력 갈래는 건물에서 끊겼어야 했다. 하지만 흔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어디에 쓰는 마법일까? 애초에 이게 마법이기나 할까?
<이 골목 바로 뒤야. 저 뒤에서 무언가가 이글거리는구나. 언제든지 도망칠 준비를 하고, 조심하거라. 일단은 내가 먼저 상황을 보고 오마.>
벽돌을 통과해 나아간 헤이딘은 뜻밖의 광경을 마주쳤다. 거기에 있는 건 병든 것처럼 말라빠진 인간 청년이었다. 웅크려 앉아서는 깨진 팔찌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게 무척이나 소중한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흐느끼면서.
이게 건물을 무너뜨린 범인이란 말인가? 겉모습이야 환술로 바꾸었다 쳐도…….
"사, 사, 삼촌?"
헐떡이는 목소리에 헤이딘은 정신을 차렸다. 인간 청년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갖가지 질문이 뇌리를 치고 들어왔다. 내가 보인다고? 그보다 삼촌이라니, 잠깐만, 저 팔찌는…….
잊고 있었던 기억이 치솟았다. 왜 처음부터 알아보지 못했을까? 눈과 손발이 멀쩡하던 시절에, 나트람은 그에게 팔찌 형태의 마력 구속구를 끼워놓았던 것이다. 가까스로 부숴 놓아도 똑같은 게 다시 채워지기 일쑤였다.
"삼촌."
청년이 다시 불렀다. 헤이딘은 나트람의 자식들을 상기했다. 아들이 둘이고 딸이 하나라고 들었는데.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알았더라도 소용은 없었을 것이다. 어릴 적에나 보았지 다 자란 모습은 구경도 하지 못했으니까.
그나저나, 나트람이 자기 아들한테 마력 구속구를 채워놓은 이유가 대체 뭘까? 이런 폭발 때문에? 그런 놈을 인간 도시 한복판에 떨어트린 이유는 또 뭐고?
헤이딘은 혼란 속에서 멈춰 있었다. 이윽고 청년이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그에게로 다가왔다. 절룩거리는 걸음걸이를 보자마자 머릿속에 불꽃이 튀었다. 나트람은 이따금 못미더운 아들 이야기를 늘어놓았던 것이다. 메기도였다.
그는 재빨리 건물을 통과해 벨레다에게로 돌아갔다.
<얘야, 내가 뭐로 보이느냐?>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뭐처럼 보이냔 말이다.>
"스승님이요."
<아니, 내가 소년 모습인지 늙은이 모습인지를 말하라는 게다. 빨리!>
"언제나처럼 어린 모습이시죠. 그게 중요해요?"
<중요하지!>
첫 번째 질문. 메기도는 어떻게 유령을 본 걸까?
두 번째 질문. 소년 유령이 자신의 삼촌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이상한 일이었다. 기실 이상한 것으로 따지자면야 처음부터 그랬는지도 모른다. 헤이딘은 방금 전에 본 광경과 알고 있었던 사실들을 머릿속에서 조합해 보았다.
다리를 절룩거리고 마력 구속구를 끼고 다니는, 나트람의 둘째 아들. 단신으로 7층 건물을 무너뜨린 다음 그대로 도망쳐서, 으슥한 골목에서 흐느끼고 있는…….
"어… 스승님, 뭐가 그렇게 중요한진 몰라도… 제 말 안 들리세요? 이젠 정말 들으셔야 하는데요……."
헤이딘은 흠칫 놀라 앞을 보았다. 깡마른 요정 청년이, 울먹이는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도망치기에는 너무 늦었다.
* * *
메기도가 폭발을 일으켰을 때, 사이라크는 사이라크대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원래는 동생을 따돌리자마자 카스바로 향하는 차원문을 탈 예정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끼어든 것이다.
카스바행 차원문은 당연하게도 사설이었고, 품질 역시 공영 차원문에 비하면 좋지 않았다. 암적색 별이 뜨고 마력 흐름이 불안정해진 탓에 고장이 잦아졌다고 했다. 정상화가 되려면 한 시간쯤이 더 필요할 거라고도.
선택지는 둘이었다. 차원문이 고쳐지기를 기다리거나, 일단 도시 바깥으로 나가거나. 사이라크는 전자를 골랐다. 어쨌거나 카스바로 향하려면 도시로 돌아와야 했거니와 출국 과정에서도 검문이 있었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력 폭풍이 몰아닥쳤다. 예상보다도 훨씬 거대한 규모로. 도시는 마비됐고 차원문은 모두 봉쇄됐다. 카스바로 향하는 것마저도. 건달들에게도 제 나름의 법도는 있는 법이었다. 자신들의 영토에 폭탄마를 들여보내진 않겠다는 결의가.
덕분에 사이라크는 꼼짝없이 로야페타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지금은 여관방을 빌려 생각을 가다듬는 중이었다. 사태가 일단락되기 전까지, 차원문을 탈 수는 없다. 국경도 막혀 있을 것이다. 그때 바로 출국 절차를 밟아야 했던 걸까?
규모가 이 정도로 크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게 패착이었다. 메기도의 마력 폭풍은 강력하기야 했지만 건물을, 그것도 7층씩이나 되는 건물을 통째로 무너트릴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다섯 해간 겪은 바로는 그랬다.
그녀는 한동안, 기계적으로 여관방을 돌아다녔다. 침대 두 개를 가로로 붙여 놓으면 가득 찰 만큼 좁은데다가 화장실에서는 고인 물 냄새가 나는 방이다. 한동안은 국경 검문까지 강화될 텐데, 여기에서 며칠을 그대로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붙잡힌 메기도가 동행이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는다면?
이윽고 모든 질문이 하나로 모여들면서 걸음이 뚝 멈췄다. 그녀는 가방에서 부드러운 천에 감싸인 덩어리를 꺼내들었다.
그 안에는 마력 결정과 수정구슬이 들어 있었다. 수정구슬 중앙에 박힌 것은 검은 조각. 오래된 가보이자 강력한 마법 도구였다.
무력으로라도 국경을 돌파해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무모한 계획일지도 모르겠지만 수정구슬과 함께라면 충분히 가능할 터였다. 그녀는 옷을 벗은 뒤 거울 앞으로 다가갔고, 살갗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