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약속이자 사회 그 자체 (1)
하인들에게, 나트람 일가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메기도는 특별했다. 나트람과 사이라크, 그리고 네르갈은 성격이 사납고 잔인했을 뿐이지 이유 없이 벌을 내리진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점에 있어서, 셋은 더없이 합리적이었다. 가치 없는 이들에게는 가혹했으며 훌륭한 하인들은 아꼈다. 반면 메기도에게는 기준이라는 것이 없었다.
더욱 큰 문제는 그의 마법적 능력이 더없이 뛰어나다는 데에 있었다. 가문 내에서 순수한 전투 능력으로 메기도를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아버지가 유일했다. 사이라크마저도 메기도와 맞붙었다가는 승리를 장담하지 못했다.
그래서 메기도에게는 전담 시종이 없었다. 누구도 그 자리를 원치 않았거니와 나트람 또한 하인들의 공포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메기도 역시 누군가를 부리는 것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대신 그는 하인이 필요해지면 누구든 붙잡아서 별채로 데려갔다. 귀한 보석 장식을 선물 받을 때도 있었지만 팔다리가 하나씩 으스러져 나올 때도 있었고, 어떤 경우에는 둘 모두를 동시에 겪기도 했다.
별불꽃의 하인들은 메기도를 명문가의 도련님이 아니라 걸어 다니는 마력 덩어리로 여기곤 했다. 불가해하고, 변덕스럽고, 강력한 무언가로. 이제 그 자연재해는 또 다른 희생양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러스터, 나는 시끄러운 게 싫어요. 누님을 따라 2교구 구경을 갔을 때에도 소리가 너무 큰 나머지 도망을 나왔단 말예요. 연회에도 간 적이 없고요. 인간들의 도시는 아주 끔찍할 테죠. 누님이 열 명쯤, 동시에 외치는 것 같은 소리가 난다고 들었어요."
메기도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표정으로 늙은 하인을 바라보았다. 대화가 끝났을 때 그가 선물과 함께 살아남을지, 아니면 정원에 묻힐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러스터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는 헤이딘의 놀이친구이자 시종으로서 인생의 전반부를 보냈으며 옛 주인이 장미 덤불 아래 파묻힌 뒤에는 나트람을 섬기게 되었다.
그 직함은 일종의 보호막이 되어 주었다. 메기도는 나트람을 몹시 무서워했고, 그의 직속 하인에게 해를 입혔다가는 어떤 벌을 받을지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러스터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도련님께서는 더욱 먼 땅도, 나우파나의 폐허까지도 무사히 다녀오지 않으셨습니까.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야스와다의 시장에 잠시 발을 들였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곳을 거니는 이들이 인간일 뿐입니다."
"하지만 어떤 일이 생길지 누가 알까요? 분명히 아버님을 실망시킬 거예요. 누님도 내게 화를 낼 테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인데 모두가 내게 무언가를 기대해요. 나는 쓰레기예요……."
메기도는 좌절한 듯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주위의 가구들이 들썩이며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무의식이 불러일으키는 마력 폭풍이었다.
별불꽃의 둘째 아들을 진실로 위험하게 만드는 것은 성품이 아니라 바로 이런 면모였다. 그가 슬픔에 잠겨 있는 동안 별채에 있는 모든 것은 처참하게 박살났던 것이다. 사이라크나 나트람이 호통을 치는 게 아니라면 발작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러스터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럴 때에는 빠르게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것은 가문의 상식이었다. 메기도 역시 하인이 어떤 무례를 저지르건 신경 쓰지 않았다… 무례를 저지를 수만 있다면.
"저는 이만 가 보아야겠습니다. 주인님께서 급한 일을 맡기셨거든요."
"안 돼요, 러스터, 제발 내 곁에 있어 줘요……."
보이지 않는 힘이 러스터의 어깨를 짓눌렀다. 다시 의자에 몸을 붙인 그는 이제 어쩔 수 없는 신세가 되었음을 깨닫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하인들의 증언을 곱씹어 보았지만 도움이 될 구석이 없었다.
나트람을 들먹이는 것은 순전한 도박이었다. 그가 노할 것이라는 말에, 마력 폭풍은 두 가지로만 반응했던 것이다. 더욱 세를 키우거나, 아니면 잠잠해지거나. 러스터는 무모한 일을 벌이기보다는 잠자코 최후를 맞이하는 편을 택했다.
소란 속에서도 메기도는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자신의 마음에 갇힌 탓에, 그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전혀 깨닫지 못하는 듯했다.
"네르갈이 그러더군요. 아버님께서 저를 내버려두는 이유가 의문이라고요. 자기가 가주가 되면 우선 저를 백치로 만들어서 가둬 놓을 거라더군요. 아버님이 삼촌께 그랬던 것처럼요. 꼭 그래 주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어요. 그러면 아무도 제게 뭔가를 기대하지 않을 테니까요."
메기도의 모든 불행은 거기에서 왔다. 헤이딘과 같은 방식으로 처분하기에는, 혹은 그냥 죽이기에는 가치가 컸던 것이다. 지극히 불안정하긴 했지만 나트람에게는 복종했다(혹은 복종하려 애썼다). 무언가를 부수는 데에는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그는 성년식을 치르기도 전부터 나우파나의 염동술에 매진했다. 3층의 서고에서 투신자살을 시도했던 것이 계기였다.
메기도는 나트람에게 뺨을 맞고서는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나트람은 신음하는 아들을 살피러 내려가지도 않고 정원에 버려두었다. 이틀이 더 흐른 다음에야 하인들이 그를 거두었다.
살아남기야 했지만 치유사를 불러 부러진 뼈를 맞추기에는 늦었다. 결국 메기도는 다리를 절룩거리게 되었고, 하인들의 도움을 받는 대신 염동술을 연마하는 편을 택했다. 마력 적성 역시 야스와다보다는 나우파나의 마법에 더욱 적합했다.
"어떻게 해야 하죠?"
절규에 가까운 질문과 함께, 메기도의 손목에 달린 마력 구속구가 터져 나갔다.
* * *
"넌 사과하러 온 거냐, 관광을 온 거냐?"
"그쪽에서도 정말로 사과를 받고 싶어서 우릴 부른 건 아닐걸요. 정보사 사람한테 조용히 부탁하고 싶은 게 있을 거예요. 분명하다니까요."
란드와르도 벨레다의 주장에 동의했다. 사실 거래소 측에서도, 이런 문제는 서면으로 처리하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벨레다가 거금을 투자했다지만 거래소 전체의 규모에 비하면 지극히 미미한 수준. 그걸 빌미로 개인적인 사과를 요구할 필요가 없었다. 교단 차원에서의 재발 방지를 촉구한다면 모를까.
정보사와 직접 접선할 통로가 필요했다고 치면 설명이 된다. 정보사는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기관이니까. 서부 거래소도 일종의 도박수를 던진 것이다. 벨레다의 뒤에 있는 게 정보사일 거라고.
막상 가면 진지하게 사죄하는 분위기는 아닐 게 뻔했다. 오히려 대뜸 본론을 꺼내들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래도 염치는 있어야 한다는 게 란드와르의 입장이었다.
최소한 반성하는 척은 해야 할 게 아닌가. 로야페타 검문을 통과하자마자 상점가로 달려가서 숄을 걸쳐보는 게 아니라. 들를 곳이 있대서 수레 방향을 돌렸더니 이러고 있었다.
"살 돈은 있고?"
"선물 계좌에 들어 있는 돈이면 이 가게도 살 텐데요, 뭐."
"그거 아직 니 돈 아니잖아."
"사주면 동결 풀리자마자 갚을게요."
"안 돼. 관광은 할 일부터 한 다음 해."
아무리 가정교육을 못 받았어도 화신 앞에서 이러다니 범상치 않은 애였다. 란드와르는 벨레다에게서 숄을 빼앗은 뒤 가게 주인에게 사과했다.
"영감이 뭐라고 안 해?"
"잔소리도 많이 들으면 익숙하거든요."
벨레다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마공학 수레 뒷좌석에 올라탔다. 란드와르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옆 가게로 걸음을 옮겼다. 요정 놈은 노점에서 사탕을 사서 우물거리는 중이었다.
란드와르는 녀석을 끌어와 수레에 태우고는 운전대를 잡았다. 교단 지부에서 직접 빌린 차였다.
"돈은 어디서 났길래 사탕을 사 먹고 있냐."
"나으리 돈으로 샀는데요. 별로 안 비쌉니다."
"뭐?"
외투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자 잡히는 게 없었다. 란드와르는 경악 속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테네브로즈가 돈주머니를 내밀고 있었다.
"너는 정신이 있냐, 없냐? 돈주머니 훔쳐서 하는 짓이 군것질이야?"
"사탕 하나 안 먹는다고 별이 가라앉는 것도 아니고 이시 타브가 다시 잠드는 것도 아닌데요. 항상 걱정만 하면 건강에 안 좋습니다."
란드와르는 직접 테네브로즈의 건강을 망쳐 주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일만 모두 끝나면 반드시 그럴 것이었다.
* * *
서부 거래소에서 보낸 항의 서한에는 상업 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위조를 막기 위해 특별한 보존 처리가 된 것이었다. 그걸 거래소의 문의 접수창구에 보여주자 곧바로 직원이 내려왔다.
란드와르 일행은 직원을 따라 거래소 중앙 홀 외곽의 유리통에 발을 들였다. 문이 닫히는 동시에 주위의 풍경이 갑자기 아래로 내려갔다. 이제 거래를 위해 모여든 사람들도, 원자재 각각의 현재 가격을 알려주는 전광판도, 주위의 건물들도 그의 발밑에 있었다.
직원이 란드와르의 표정을 살피고는 씩 웃었다.
"세카두의 전사들에게는 낯선 광경이겠지요. 승강기입니다. 타일라프람에서 특허권 분쟁이 진행중이라 상용화는 멉니다만… 보시다시피, 그만큼의 가치가 있습니다."
최신 문물이라고는 모르는 촌뜨기 취급이었다. 이강현은 생각했다. 우주선이 뭔지는 아십니까? 인류는 내가 태어나기 15년 전에 이미, 달에 한 걸음을 내디뎠단 말입니다… 하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새 승강기는 꼭대기까지 치솟아서, 사장실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먼 길을 오셨군요. 내가 직접 가지 못한 점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나는 에스웍스 아미라, 로야페타 서부 거래소의 사장입니다. 램페이지 분파의 상임위원이기도 하죠. 아미라라고 부르면 됩니다."
흰 융단이 사장실의 중앙을 덮은 가운데 멋들어진 흑단 가구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 선 것은 외눈 안경을 쓴 여자, 에스웍스 아미라. 승강기를 타고 올라오면 곧바로 그녀를 대면하게 되는 셈이다.
장식 없는 하얀 블라우스와 검은 슬랙스. 검은 말총머리. 그리고 금속 테를 덧댄 귀까지. 전형적인 로야페타 상업 가문의 경영자였다.
"반갑습니다. 교단 소속 사제, 슈리브입니다."
슈리브는 그가 로야페타에서 쓸 가명이었다. 얼굴 역시 환술로 바꿔둔 상태. 란드와르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벨레다를 앞으로 내세웠다.
"이쪽은 에드."
란드와르는 그녀의 우르게슈 시민증에 쓰인 이름을 읊었다. 선물거래 계좌를 연 에드가 벨레다와 동일인이라는 걸 곧바로 밝힐 필요는 없으니까. 어차피 그건 공공연한 비밀이기도 하고.
"반가워요."
벨레다도 우아한 태도로 인사했다. 고개를 끄덕인 아미라는 테네브로즈를 보고는 슬쩍 질문을 던졌다.
"곁에 계시는 분은… 한 명이 더 왔군요. 시종입니까?"
"시종으로 남기엔 유능하고, 동업자라기엔 아직 어리죠."
"다른 교단의 수련 사제겠군요. 전사가 될 아이는 아닌 듯하니. 벌써부터 성흔을 받다니 놀랍습니다만……."
아미라의 말은 정보사의 구성을 암시하고 있었다. 아즈리온 교단이 주축이긴 했지만 다른 여덟 교단에서도, 성흔을 받은 사제들을 정보사에 파견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서서 나눌 이야기는 아니지요. 멀리서 오신 손님들을 세워 두는 것 또한 예의가 아니고요."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승강기와 가까운 쪽에 놓인 원탁이었다. 의자들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본론은 모두가 원탁에 모여 앉고 벨레다가 사과까지 마친 뒤에야 시작됐다.
"짐작하셨겠지만, 이런 문제로 대면 사과를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정보사와 직접 접선할 방법이 필요했을 뿐이죠. 어찌나 보안이 철저한지 소속 사제들의 명단조차 얻어낼 수가 없더군요."
"하지만 벨레다가 정보사와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건 알았겠군요."
아미라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우르게슈 시민, 에드가 카스바에서 사라진 노예상인이라는 확신은 없었지요. 논리의 비약을 몇 차례 거쳐서 도박수를 던졌을 뿐입니다. 정보사는 내 미끼를 너그러이 물어 주었고요. 여기까지 직접 오셨으니, 나와 이야기를 나눌 마음이 있는 것이라 믿겠습니다."
"일단은 그렇습니다만… 교단에 직접 연락하는 방법도 있을 텐데요."
"공식적인 경로를 통한다면 램페이지 분파 전체가 그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우리는 외부적인 개입을 꺼립니다. 모든 문제는 금융과 자본의 논리로 해결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죠. 그건 내 위신을 실추시키는 일입니다."
란드와르는 로야페타 시나리오의 전개를 떠올렸다. 요정과 내통하는 배반자 중에는 서부 거래소의 부사장 또한 있다. 아미라에게는 곤혹스러운 상황이었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자신의 입지마저 위험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버려둘 수도 없으니까.
"비공식적인 경로로, 정보사의 힘을 빌리는 건 괜찮단 말씀이십니까?"
"나는 당신과 벨레다를 사설탐정으로 고용하고자 합니다. 만족스러울 보수를 약속하지요."
"사설탐정이라."
란드와르는 그 낱말을 반복했다. 어차피 그런 역할이 되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나 이토록 직설적인 제안을 들으니 낯설었다.
"당혹스러울지도 모르겠지만, 형식상의 문제일 뿐입니다. 내가 붙잡으려는 건 요정과 내통하는 배반자입니다. 그러니 이건 정보사의 업무이기도 할 겁니다."
란드와르는 아미라의 잘라낸 귀를 보았고, 그녀에게 요정의 피가 섞여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짓궂은 질문이 입가를 간질였다. 아미라에게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자신이 처음은 아니겠지만.
"상업 가문의 선조는 요정 일족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먼 친척에게 각박하시군요."
"다른 두 분파와 달리, 램페이지는 돈 그 자체를 다룹니다. 돈은 약속이자 사회 그 자체지요. 이 사회가 그 가치를 보장한다는 신용이 없다면, 사회가 존속된다는 믿음이 없다면… 그건 종잇조각으로 변해 버리고 맙니다."
아미라의 검은 눈에, 날카로운 빛이 심지처럼 일었다.
"우리는 약속을 섬깁니다. 이 배반자는 그 약속을 깨트렸습니다. 거기에 역사가 끼어들 여지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