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투자의 책임은 투자자 개인에게 있으며 (3)
물론 겁만 주었고 정말로 자르진 않았다. 손을 잘라서 못 할 도박은 카드게임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도 포커 종류. 블랙잭이나 바카라(여기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는 손이 없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사태는 손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너 성인이잖아. 미성년자가 아니잖아."
"네……."
"그러면 니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생각을 해야지."
"생각은 항상 하고 있는데요……."
"생각한 결과가 이거야?"
"그런… 셈이죠?"
란드와르는 시가 연기 내뿜듯 한숨을 토했다.
"너 지금 이거 생각하고 하는 소리냐?"
"죄송합니다……."
펠로시는 푹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벨레다를 갈굴 때였다. 여기에 휘말린 인물은 둘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헤이딘이 없는 동안에는 정보사 사제 하나가 벨레다의 호위를 맡았다.
"너는 씨발, 호위 따돌리고 도망가서 계좌 열 생각까지 했으면. 하면 안 되는 짓인 거 알고 있었다는 소리잖아. 그러면 그냥 안 하는 게 맞는 거 아니냐."
"들키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는 말도 있는걸요."
"들켰잖아."
인내심의 한계가 느껴졌다. 란드와르는 치솟는 혈압을 내리누르며 둘과 차례대로 시선을 맞췄다. 분명히 자신이 맡은 업무는 계약직 구원자였는데 요새는 이게 보육원 임시교사인지 우편배달부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해야 되냐. 당사자 의견을 밝혀 봐라. 일단 벨레다부터."
"펠로시한테서 투자 조언을 들은 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결정을 내리고 실천한 쪽은 저인걸요. 징계를 내리셔도 할 말 없어요."
"펠로시는."
"어… 스승님은 선물 계좌 여는 법도 몰랐는데요. 내가 말 안 했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거예요. 사고 쳐서 미안하고,… 미안해요!"
앞다투어 발을 뺄 줄 알았는데 서로 자기 잘못이라 하고 있었다. 나이차이도 별로 안 나는데다가 머리에 나사가 하나씩 풀린 애들이라 그런지 금방 친해진 모양이었다. 훈훈하고 보기 좋았다. 란드와르는 방긋 웃으며 검지로 거실 바닥을 가리켰다.
"대가리 박자."
"네?"
"무슨 말씀이세요?"
"엎드려 뻗치라고."
둘이 자세를 잡자마자 미오리타가 그들 사이의 허공에 나타났다. 짧은 금발이 발랄한 인상을 주는, 견습 천사.
"아즈리온 님의 종, 미오리타! 부름을 받들어 여기에 왔습니다!"
"자세 안 풀리게 감시하고 있어라. 연초 좀 태우고 온다."
"예!"
마당에 나온 란드와르는 허공으로 흩어지는 연기를 응시하며 묵상에 잠겼다.
생쥐들이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마흐트와 아즈리온을 제외하고, 업무 능력이 있는 신이 일곱. 천사의 수는 아흔다섯.
모든 장면을 볼 수 있더라도 정보를 처리할 능력이 없다면 그것은 전지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누락되는 것들이 있단 말이다. 사람이 심시티를 해도 불이 난 걸 깨닫지 못해서 도시 한 쪽을 태워먹는 일이 부지기수인데, 이 생쥐들은 중소기업 수준의 인원으로 대륙을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티아가 이걸 막거나 미리 말해주지 못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문제는 펠로시였다. 그냥 수도원으로 돌려보내야겠다는 계산이 섰다.
매일 경전이나 읽고 반성문이나 쓰게 시키면 헛짓거리도 못 하겠지. 말루카에 돌아가면 왕실에서 살게 될 거란 이야기는 나중에 전해 주자…….
펠로시에 대한 생각은 거기에서 멈췄다. 이제는 대국적인 쪽으로 시선을 옮길 때였다.
마검사 꼬마를, 로안을 만나러 가기까지는 아직 한 달쯤이 남았다. 핵심 시나리오에 진입하기 전에 준비할 것도 있으니까,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은 스무 날쯤. 그동안 어디에 가 있어야 할지 계속 고민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어놓고 보니 앞날이 정해진 느낌이었다. 로야페타로 가야 했다. 들러서 벨레다에게 사과를 시키고, 겸사겸사 보조 시나리오도 하나 처리하고 오는 것이다.
로야페타 당국을 구성하는 상업 가문은 와그다스 요정들의 후손이다. 일만 잘 풀린다면 각인 도면을 보상으로 받을 수 있다. 해석이 불가능해진 탓에 서가에만 잠들어 있는, 와그다스의 각인 도면을.
* * *
동족을 배반하긴 했지만 황무지로 떠나 연구에 매진하기에는 너무 세속적이었던 요정들이 있었다. 그들은 인간 사회에 남았고,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의식을 받아들였다. 귀의 끄트머리를 잘라내고 거기에 금속 테를 편자처럼 덧대는 것이다.
그것만으로 오래된 원한을 씻어낼 수는 없었지만 인간은 이 요정들을 받아들였다. 새로운 도시를 세우고 기틀을 닦기 위해서는 와그다스의 지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요정이었으며 도덕을 이해하지 못했다. 따라서 인간은 이 조력자들을 우호적이지만 위험한 괴물로 간주했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이윽고 잔류자 무리는 사회의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서도 영향력을 발휘할 방법을 깨달았다. 그들은 도시 당국에게서 받은 보상금을 모아 로야페타로 갔고, 거기에서 금융업을 시작했다.
요정 특유의, 열정적이면서도 비정한 성미는 그 일에 더없이 적합했다. 고리대금업체는 거대한 기업집단으로 자라났으며 결국에는 도시를 집어삼켰다. 이제 로야페타 당국은 잔류자 총회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했다.
하지만 요정이 인간을 상대로 승리를 거머쥐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인간의 피가 섞인데다가 요정으로서의 자의식마저 잃고 말았던 것이다.
눈부신 황금빛의 마력과 학자 도시의 각인술과 황무지에 은둔한 신은 구시대의 이야기로만 존재했다. 그들은 대신 돈과 숫자의 기적을 부리게 되었다.
로야페타 당국은 교단의 권위와 마법의 효력을 인정하지만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결국 돈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돈이 대신할 수 있다고도.
기막힌 영약이 필요한가? 연금술에 통달하기 위해 방구석에 틀어박힐 필요는 없다. 연금술사 대군을 고용하라. 급하게 처리되어야 하는 행정 절차가 서류더미에 가로막혀 있는가? 당국 관계자의 주머니에 충분한 돈을 꽂아 주면 그만이다.
황무지의 학자들이 본다면 놀라 기절할 일이지만, 그들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다. 이 속물 군상에게 남은 요정의 흔적은 아주 적다. 평범한 인간에 비해서는 조금 뾰족한 귀를 제외하면 아예 없다고 해도 좋다.
오랜 전통에 따라, 상업 가문의 구성원은 성년식을 치르면서 귀를 자르고 거기에 금속 테를 덧대게 된다. 그들은 이 장식물이 재물과 번영을 불러온다고 여긴다. 누구도 원래의 목적을 기억하지 않는다.
* * *
나트람은 의회의 소집령을 받아 저택을 나서면서 본가의 요정들을 모두 일으켰고, 회의가 끝날 때까지 깨어 있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사실은 잠들기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 역시 눈을 뜨자마자 바단의 별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날이 밝고도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에야 돌아왔다. 별불꽃의 요정들은 회당에 모인 상태였다. 나트람은 제단 앞을 느릿하게 서성이며 말했다.
"바단의 별이 짐승들에게 넘어갔다. 별이 뜨기 직전에, 인간 도시들 사이에 공문이 돌았다더군. 우리에게는 전혀 정보가 들어오지 않았어. 철저한 계획 아래 진행된 일인 셈이다."
의회에 소식이 전해진 것은 별이 뜨기 직전이었다. 호외가 인간 도시들을 뒤덮은 시점으로부터 한두 시간 정도가 늦었을 뿐이다.
비록 대륙의 끄트머리에 고립되어 있을지라도, 요정들에게 거리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인간 도시들은 사설 차원문을 엄격하게 규제했지만 카스바는 논외였던 것이다. 개방형 사설 차원문이 마공학 수레만큼이나 흔한 곳이니까.
따라서 요정들은 인간 도시를 오갈 때 이러한 경로를 거쳤다. 카스바를 중간 지점으로 경유해서, 거기에서 다시 차원문을 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소요되는 시간은 평균적으로 한 시간 남짓. 최대한 빠르게 소식을 전한 셈이었다.
"정확한 사실은 아직 없다. 의회는 심장의 뜻이 더욱 강력했을 경우도 계산에 두고 있다… 이 선언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면피일지도 모른다. 바단의 주인께서 다시 몸을 얻으셨다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드러낼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 지점에서 나트람의 눈이 번뜩였다.
"그러나 가능성은 낮다. 바단의 귀족들은 여전히 온전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주도권이 짐승에게 있다는 말이다."
의회는 이 사태와 테네브로즈의 배신 사이의 연결고리를 의심하고 있었다.
심증도, 물증도 없었지만 연관 지을 이유는 충분했다. 놈은 갑작스레 학자들을 풀어 주고는 스스로 감옥에 걸어 들어갔다. 3교구에서 학살이 벌어지더니 이제는 암적색 별이 늑대인간에게로 넘어갔다.
다섯 달은 짧은 기간이다. 천 년에 비해서라면 찰나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에 저 모든 사건이 집중적으로 일어났다는 건 시기상의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일이었다.
테네브로즈는 이 사태의 주축을 맡고 있었다. 거기까지는 분명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다. 이토록 혼란스러운 시기에는 어김없이 아즈리온의 별이 나타났다. 화신이 내려왔더라면 다섯 달 전에 이미 움직임을 보였어야 해."
3교구의 요정들이 모두 죽었을 때, 화신의 소행일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아즈리온의 별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조차도.
"대신 움직이지 않는 별이 자리를 바꾸고 있다!"
별점술에 사용되는 별은 14개의 주성과 4개의 보좌성. 주성은 신의 의지를 상징하고 보좌성은 운명을 의미했다. 이중에서 보좌성인 자미는 격국의 중심을 지킬 뿐이지 움직이지 않는 별이었다.
하지만 몇몇 요정의 미래에서는 자미가 위치를 옮기고 있었다.
이 현상을 처음으로 알아차린 것은 은빛매의 쉭겐이었다. 그는 가문의 수석 별점술사였고, 바단의 별을 보는 즉시 명반을 펼쳐 자신의 미래를 점쳤다. 그리고 기묘한 결과를 받아들었다.
"여러 요정들의 별자리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무시할 수 없는 징조지."
나트람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말을 멈췄다. 이 모든 게 어디에선가 엮여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테네브로즈의 저의. 인간 교단과 와그다스 학자들. 늑대인간의 왕. 움직이지 않는 별.
하지만 공백이 너무 컸다. 제국 시절이라면 충분한 답을 낼 수 있었겠지만, 대전쟁을 거치면서 요정들은 많은 지혜를 잃어버렸다. 특히 폐허가 된 도시들의 지식은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자미에 대해, 그들이 아는 사실은 셋뿐이었다. 그 별이 죽음과 태고의 힘을 상징한다는 것. 평소에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이런 현상은 제국이 몰락할 때 처음 있었다. 그리고 천 년간 반복되지 않았지. 이게 무슨 의미라고 생각하느냐? 세계가 우리를 완전히 무너뜨리려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들의 시대에 종언을 고하려는 것일까?"
질문을 던진 나트람은 자리에 앉은 요정들을 훑어보았다. 밝은 빛 아래에서도 긴장과 공포가 역력했다. 그는 기세를 이어 말했다.
"수석 별점술사는 명반을 가지고 나오거라. 가문의 구성원들은 모두, 미래를 점치게 될 것이다. 결과가 비틀린 이들은 인간 도시로 파견될 예정이다. 의회의 결정이다."
수석 별점술사가 겁에 질린 듯 되물었다.
"거기에서, 거기에서 무엇을 하게 됩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내야지! 물론 방법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별들이 너희의 운명을 이끌 테니."
그 운명의 종착지가 좋은 곳은 아닐 게 분명했다. 충격의 물결이 회당에 모인 요정들을 휩쓸었다. 나트람은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리며 자신의 딸과 두 아들을 바라보았다.
"어젯밤에 내가 지시를 내렸지… 배신자 놈의 목을 가져오라고. 가문에서 적임자가 나온다면, 우선 로야페타로 가게 될 것이다. 거기에서 충분한 결실을 얻었으면 좋겠구나."
나트람은 그들의 별이 뒤틀리기를, 그래서 자식들이 제 손으로 테네브로즈의 목숨을 거둘 수 있기를 원했다. 일전의 과오를 되돌리도록. 그들이 당할 가능성은 계산에 두지 않았다. 두 번이나 실패할 만큼 무능한 자식들은 존재할 필요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