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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신으로 살아가는 법-96화 (97/258)

96화 투자의 책임은 투자자 개인에게 있으며 (2)

생쥐들은 불가피하게 무능할지라도 가능한 영역에서는 최선을 다하는 것들이었다. 사찰만큼은 철저히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마을회관에서의 연설이 끝나고 편지까지 전해준 뒤, 란드와르는 곧바로 테네브로즈를 끌고 으슥한 골목으로 향했다.

"너 여자애 앞에서 환술 풀었다면서. 티아가 얘기해 줬다."

"이러나저러나 들킬 판인데 아무렴 괜찮지 않습니까."

"세카두에서 만나자는 건 무슨 생각으로 한 소리냐."

"공부 열심히 해서 인간 세상으로 나오라는 뜻인데요."

"나오면 어쩌게."

"나왔으면 나온 거죠. 제가 그 다음까지 신경을 써야 합니까?"

무책임해 보이는 대답과는 별개로 그 말이 세이버리의 평생을 바꿔 놓으리라는 점은 자명했다. 요정 놈이 의외로 사려 깊어서 그런 말을 했는지, 아니면 귀찮은 여자아이를 떼어놓을 목적이었는지는 분간하기 어려웠다.

만약 후자라고 쳐도 전자가 아예 없지는 않을 듯했다.

"너 존나 이상한 새끼인 거 알지."

"왜 또 욕을 하고 그러십니까."

"사람이 착할 거면 일관적으로 착하고, 도덕이 없을 거면 아예 없어야 하는 거 아니냐."

"저는 항상 일관적인데요. 제가 쓸데없이 나쁜 짓 하는 걸 본 적이 있으십니까?"

"됐다, 관두자."

답도 보상도 없는 문제는 내버려두는 것이 상책이었다. 이놈의 본성이 무엇이든 간에 맡은 일은 잘 하고 있으니까, 골치 아픈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무튼 최선에 가까운 결과가 나왔지 않나.

란드와르는 시가를 한 대 태운 후 골목을 돌아 나오면서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가 여기서 한 게 별로 없는 거 같아. 술이나 마시고 다니다가 끝에 가서 망치 좀 휘두르고 끝났지……."

"그렇죠."

란드와르는 갑자기 머리에 전깃불이 튀는 것을 느꼈다.

"뭐? 그렇죠?"

"제가 일을 잘했지 않습니까."

"너 진짜 머리에 문제 있냐?"

"맞장구를 쳐도 그러시깁니까?"

그는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테네브로즈가 공이 큰 건 사실이었다. 울쿠스를 설득하는 데에 한몫을 했고 능묘에서는 팔다리가 잘렸다가 붙기까지 했다. 머리에 문제가 있어서 그렇지 평범한 동료였으면 극찬을 했을 일이었다.

"됐다, 그래. 너 잘 했다. 네 역할이 컸다."

"나으리께서 칭찬해 주시니 기쁩니다."

어쨌거나 란드와르 일행은 세카두로 돌아갔다. 그리고…….

*  *  *

란드와르가 능묘에서 핏빛 뱀을 상대로 망치를 휘두를 때, 로야페타의 파생상품 거래소들에서도 성전이 벌어졌다. 그날 원자재 선물 차트에는 그야말로 역사적인 장대양봉이 떴던 것이다.

매도 포지션을 잡은 사람들은 신을 원망하기 시작했고 매수 포지션을 잡은 사람들은 아즈리온의 영광을 빌었다. 그게 멱살잡이 싸움으로 번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거래소들은 투자에 실패한 마법사들이 자폭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건물 전체에 마법 무효화 각인을 걸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개인 투자자들이 개인적인 문제에 천착하는 동안 상업 가문들은 행동에 나섰다. 그들은 타일라프람의 마법사처럼 마법의 원리에 통달하지는 못했지만 인간에게 필요한 진리는 알고 있었다.

로야페타 당국의 강령은 셋.

하나,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하나, 돈은 사회를 움직이는 약속이다.

하나, 우리가 그 약속을 주관한다.

*  *  *

사람들은 웅장하고 장엄한 순간만을 기억하지만 현실을 뒷받침하는 것은 언제나 공문과 양해각서와 보도 자료 같은 종이들이다. 덕분에 정보사의 내근직 사제들은 죽을 만큼 바빴고, 외근 기회를 휴가와 같은 것으로 간주했다.

그들에게 파르타의 지치지 않는 열정은 불가사의였다. 괴수를 소탕하는 것도 아니고 첩보전을 하는 것도 아닌데, 예순씩이나 먹은 노인이 어떻게 그토록 열심히 서류 작업에 매진할 수 있단 말인가? 왜 그렇게 깐깐한가? 지겹지도 않은가?

갖가지 낭설이 떠돌았다. 아홉 신의 축복 덕분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고 젊을 적부터 갈고 닦은 체력이 탁자 앞에서 빛을 발한다고 보는 축도 있었다. 그만큼 파르타는 철두철미하게 모든 문서를 검토했고, 정보사의 기존 업무까지도 놓치지 않았다.

"2막이 끝날 시점에 도시 당국자 및 주요 단체들에게 공문을 전달했습니다. 정보사 사제들이 각 도시에서 남은 일들을 마무리하는 중입니다."

"잘해 주었다."

보랏빛 별이 떴을 때 교단은 이런 식으로 대응했다. 야스와다 요정들이 옛 신을 부활시키려다가 실패했다고. 별은 잠시 커졌을 뿐이고 괴수들 역시 안정을 되찾을 것이라고. 풍문은 모두 거짓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당시에는 그 설명이 먹혔다. 하지만 다섯 달 만에, 암적색의 별이 재차 떠오른다면 똑같은 변명은 통하지 않을 터. 란드와르가 파르타를 만나 그 문제를 논의한 시점은 헤이딘을 데려오기 위해 세카두에 잠시 들렀을 때였다.

둘은 정공법으로 나가기로 작전을 짰다. 계획이 사전에 새어나가지만 않는다면 그 편이 훨씬 깔끔했다. 늑대인간들이 이시 첼의 심장을 지키고 있다는 건, 그래서 말루카가 고립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건 상식이니까.

애당초 감출 필요도 없는 이야기였다. 말루카의 첫째 왕녀가 심장의 힘을 얻었고 요정 신의 권능은 이제 늑대인간들에게 있다. 인간 진영과 요정들 사이의 대립에서, 이것보다 더 큰 호재는 많지 않을 터였다.

주의할 점은 하나뿐이었다. 스카르파의 곁에 요정이 있었다는 사실은 아직까지는 비밀에 부쳐져야 했다. 늑대인간들에게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일 테고, 요정들에게도 이 소식이 흘러들어갈 테니까. 물론 그걸 안다고 해서 야스와다 쪽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딱히 없겠지만, 변수는 만들지 않는 편이 나았다.

"보도 자료를 배포한 후, 평균적으로 한 시간 반 뒤에 호외 기사가 나갔습니다. 2막이 끝났을 때가 저녁이었으니만큼 대부분의 사람은 깨어 있었지요. 교단의 각 지부 역시 동원되었고요. 따라서 새벽에 별이 떴을 때, 혼란은 사실상 없었습니다……."

거기까지 보고한 파르타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이 인간이 그런 태도를 보이다니 낯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혹시, 로야페타 일은 직접 분부하신 바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란드와르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로야페타에? 거기에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누가 뭘 했길래?

로야페타는 거점 도시들 사이에서 금융 및 물류 허브로 기능했다. 각 도시의 정중앙에 위치한데다가 고순도 마력 지맥까지 끼고 있었던 것이다. 로야페타 당국은 거대한 사업체로 간주되었고, <상업 가문>이라 불리는 이들이 그 지분을 나누고 있었다.

따라서 로야페타 시나리오는 게임의 다른 부분에 비해 특히 이질적이었다. 괴수나 옛 신의 잔재에 맞서 싸우는 게 아니라, 상업 가문 내부의 첩보전에 휘말리는 것이다. 보상 역시 가문의 유산들.

달리 말하면, 로야페타의 상업 가문 시나리오는 완전히 독립적이었다. 란드와르가 기억하기에, 거기에서 먼저 이벤트가 뜬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시뮬레이터에 생략된 부분이라도 있는 겁니까? 또요?

<아뇨, 이 이야기를 해야 할지 고민했는데 미리 할 걸 그랬군요. 파르타에게 직접 설명 들으시죠. 저희 잘못은 아닙니다.>

"아는 바가 전혀 없다. 천사가 네게 직접 설명을 들으라는군."

"예, 다름이 아니라, 일행으로 받아들이신 각인사 둘이……."

*  *  *

로야페타의 파생상품 거래소들은 교단 소속 고위직의 거래를 금지하고 있었다. 당연한 처사였다. 국토부 소속 사무관이 신도시로 지정될 땅을 미리 매입하는 것과 같은 일이니까. 이걸 뭐라고 하더라? 이해충돌? 내부자 거래?

아무튼 벨레다는 금융사범이 되었다.

내막은 이랬다: 선물계좌 개설과 거래 계약까지는 수월하게 했다. 벨레다도 카스바에서 구른 짬이 있으니만큼 차명 신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를 자르고, 물들이고, 화장을 지우는 등 위장까지 철저히 했다. 하지만 거래소 측도 노련하긴 마찬가지였다.

로야페타 서부 거래소는 선물 거래는 문외한인 여자아이가(우르게슈 시민증에 따르면 스물일곱이었지만 그대로 믿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거금을 투자하는 데에 의심을 품었고, 현금 출처를 추적하다가, 정보사에서 뿌린 공문을 받아들고 사태의 내막을 파악했다.

일단 벨레다가 지하 투기장의 두 노예와 함께 사라졌다는 것은 카스바에서는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하루아침에 슈퍼스타 둘이 증발한 사건을 덮기는 어려우니까.

눈여겨볼 요소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두 노예 중 하나가 말루카 일대의 산맥 출신이고, 인간 여자라기에는 키가 아주 컸다는 것. 다른 노예는 아즈리온 교단의 사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란드와르와 서트펜 사이의 연결고리는 분명치 않았지만, 심증은 충분했다)…….

로야페타의 상업 가문들은 특성상 카스바에도 한 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돈을 다루는 일이 항상 떳떳할 수는 없으니까. 도박장 운영과 마약 거래와 노예 매매에 동참하진 않을지라도, 그 둘레를 맴도는 정보는 어디에든 쓸 데가 있다.

따라서 그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사실들이 파편적으로 흩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애당초 그게 소녀의 선물 투자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지조차 않았기 때문에 활용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정보사의 공문이, 그리고 암적색 별이 정보를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했다. 아즈리온 교단의 사제가 지하 투기장에서 볼로디아를 구출한 다음 말루카로 떠난 것이다. 그렇다면 소녀가 누구인지 밝혀내는 것은 쉬웠다.

로야페타 서부 거래소 운영측은 아즈리온 교단에 항의 서한을 보냈다. 공식적인 경로는 아니고, 비밀리에. 그들의 입장은 이랬다.

교단 차원에서 정식으로 해명한다면 동결된 계좌를 풀어 준 다음 규약 위반도 불문에 부치겠다. 어차피 시장 규모에 비해서는 큰 금액도 아니니까. 이런 일로 교단을 적대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러나 이게 모두 벨레다의 단독 행동이라면, 내부 규정에 따라 계좌를 폐쇄하고 수익금을 환수하겠다.

…벨레다와 펠로시가 란드와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얼굴을 보기 전에는 욕을 잔뜩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판이 깔리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어느 부분부터 지적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요정 신 이야기를 듣자마자 선물 거래소부터 떠올리는 사고방식? 도박으로 신세를 망쳐 놓고 벨레다의 명의를 빌려서 대리베팅을 시도하는 담대함? 거기에 넘어가서 전 재산을 거래소에 박아 넣은 벨레다?

란드와르는 긴 고민 끝에 각각의 과실 비율을 산정했다. 벨레다는 귀가 얇고 분별력이 약간 없었을 뿐이지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헤이딘이 있었더라면 어떻게든 제자를 말렸을 테니까.

그러니까, 원흉은 결국 펠로시였다. 펠로시가 도박에 미친 인간이라서 이 사태가 터진 것이었다. 머리가 터질 것처럼 지끈거렸다. 도대체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미친것과 엮였는지 모를 일이었다.

정신적인 교훈은 통하지 않으리라는 계산이 섰다. 이제는 물리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내가 도박 한 번만 더 하면 손가락 자른다고 했지?"

펠로시가 머뭇거리며 눈치를 살피다가 반론했다.

"사고 친 건 죄송하지만… 도박이 아니라 투자인데요……."

타당한 반론이었다. 어쨌건 펠로시는 타당한 근거로 투자해서 엄청난 수익을 냈던 것이다. 벌긴 벌었는데, 씨발, 그게 중요하냐… 테네브로즈만큼 정신 나간 새끼야…….

"오냐. 두 배 넘게 벌었다면서."

"네!"

"그건 잘 했어. 잘 했으니까… 선택지를 준다."

"네?"

"어디부터 자를래? 왼쪽? 오른쪽?"

란드와르는 한손검을 꺼내들었다. 손 잘린 새신부를 보내려니 미안했지만 볼로디아도 사정을 들으면 이해해 줄 게 분명했다. 말루카의 국고를 위한 결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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