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투자의 책임은 투자자 개인에게 있으며 (1)
장소: 세카두의 외곽 저택.
시일: 란드와르가 헤이딘을 데려가고 며칠이 흐른 뒤.
모범적인 삶이 한결같듯이 망한 삶에도 보통은 각본이 있다. 한때 촉망받는 인재였다가 도박장에서 전 재산을 날리고 알거지가 된 자를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교단의 중요 거점에 갇혀 있다면 어떨까. 심지어 요정 유령을 스승으로 맞기까지 했다면… 펠로시는 이런 삶이 어떤 대분류에 속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불만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침대가 푹신하고 잠자리가 따뜻하다면, 밥까지 잘 나온다면 감지덕지다. 게다가 이제는 정신 나간 유령까지 사라진 상태였다. 란드와르가 헤이딘을 데려갔던 것이다.
지금도 헤이딘은 자신의 방에 불쑥불쑥 나타나긴 했지만 펠로시를 가르치지는 않았다. 온종일 요정 마법을 연습하다가 돌아갈 뿐이었다. 물론 숙제를 꾸준히 하고 있냐고 묻긴 했는데 검사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펠로시도 숙제를 하지 않았다. 그러자 더이상 머리 아플 일이 없었다.
펠로시는 온종일 거실에서 뒹굴거리며 자신이 삶의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를 궁금해하곤 했다. 애당초 이게 현실이 맞는지부터가 의심스러웠다. 사실은 모두 꿈이고, 눈을 뜨면 카스바의 좁고 어두운 숙소를 맞닥뜨리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고 며칠이 지나자 벨레다가 돌아왔다. 펠로시는 그녀에게 수도원의 정체를, 란드와르의 임무를 묻기로 했다. 북부 대장군은 어떻게 되는지도.
"스승님, 지금까지는 이런 거 아무한테도 안 물어봤거든요. 우리 전사님이 비밀 엄수하라고 하도 겁을 줘서. 그런데 잘 생각해 보니까 참을 이유가 없더라고요. 어차피 일 끝날 때까진 안 보내줄 거잖아요!"
벨레다는 가볍게 웃더니 심장과 요정 신 이야기를 해 주었다. 헤이딘이 자리를 비운 게 그것 때문이라고도.
"대장군님이 신이 됐는지 안 됐는지는 어떻게 알아요?"
"거기에 맞는 별이 뜬답니다. 별들은 신과 이어져 있거든요. 무슨 일이 생기면 마력 흐름이 강해지면서 크기를 키우죠. 이번 초여름에도, 보랏빛 별이 떠서 괴수들이 날뛴 일이 있었잖아요? 그것도 사실은… 이시 타브가 깨어나서 그랬던 거죠!"
"앗."
펠로시는 짧은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렇게나 떠들썩했는데도 교단들이 쉬쉬했던 게 이해가 갔다. 하기야 요정 신이 눈을 떴다고 솔직히 밝히기에는 시점이 일렀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저마다 준비에 나섰겠지만…….
"그러면 이번에도 그렇게 된다는 거죠?"
"저번처럼 감추진 않겠죠. 늑대인간들이 심장을 지키고 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까요. 두 번이나 똑같은 변명으로 일관할 수도 없고요. 교단 차원에서, 볼로디아가 신위를 얻을 거라고 공표할 거래요."
"별이 뜨자마자요?"
"그렇게 되기 직전에요. 별이 뜬 다음에 소식을 전하면 불필요한 혼란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너무 일찍 밝혔다가는 일이 틀어질 위험이 있죠."
펠로시의 눈앞에 번개가 쳤다. 도박을 끊긴 했지만, 예전처럼 살면 안 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도박사들은 이따금, 강렬한 직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여기에서 밀고 들어가야 한다는 직감에. 그건 충동이자 본능이며 확신이다. 두개골 안에는 순수한 불덩어리가 타오르고 심장은 북을 친다. 전 재산을 걸지 않는다면 평생을 후회할 것만 같다.
그 직감은 대부분의 경우에 옳다. 그러나 그건 도박사가 판을 떠나는 원인이기도 하다. 열 번 중에 아홉 번을 승리하더라도, 열 번째에서 무너진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열 번째에서 무너졌다.
이제는 열한 번째였다.
열한 번째이므로 괜찮을 터였다.
"스승님, 돈 많죠? 로야페타까지 갈 수 있어요? 하루면 돼요!"
"시간을 잠깐 낼 수는 있겠죠. 무슨 일 있어요?"
로야페타는 인간 도시들의 정중앙에 위치했고, 자연스레 상업의 중심지이자 물류 거점이 되었다. 수많은 상단이 그곳에 근거지를 두었으며 거래소 역시 여럿을 갖추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서부 거래소.
서부 거래소는 원자재를 다룬다. 구리나 강철과 같은 금속류에서부터 무채색 마력 결정과 같은 동력원까지를. 특히 선물(*先物. 파생상품의 일종. 상품을 정해진 가격으로 미래의 특정 시점에 매매할 것을 약정하는 거래.) 거래에 특화되어 있다.
마력 결정 선물의 증거금은 상품 규모의 1/11. 3만 탈로나로 33만 탈로나어치의 거래 약정을 만들 수 있다. 그게 10%만 치솟으면, 그러니까 36만 탈로나가 되면 차액은 3만이다. 순식간에 원금의 두 배를 버는 셈이다.
물론 30만 탈로나로 내리꽂으면 원금이 모두 증발한다. 펠로시는 그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건 질 수가 없는 도박이었다.
"저번에, 보라색 별이 커졌을 때 원자재 가격이 스무 날 만에 3할씩이 올랐어요! 평균적으로요. 이제는 상승분을 어느 정도 반납했겠죠. 시간이 지났으니까요."
펠로시는 로야페타 서부 거래소에서 직접 매매를 해 본 적은 없었지만(거래소가 돌아가는 방식을 알게 되었을 때, 이미 홀짝판에서 전 재산을 털린 상태였던 것이다) 원자재 가격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알았다.
알 수밖에 없었다. 마력 결정 막대는 각인사의 장사 밑천이었으니까. 조금이라도 싼 가격에 막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세상 흐름에 귀를 열어두어야 했다.
예컨대 제조업 경기 침체는 원자재 가격의 하락으로 이어졌고, 반대로 대규모 토건 사업은…….
"본론으로 들어가려면 일단 설명을 해야 하는데, 우리 스승님도 내가 말루카에서 온 거 알죠?"
"그럼요, 늑대인간들의 고향은 모두 거기라고 들었어요."
"말루카랑 인간 도시들은 산맥으로 가로막혀 있어요. 산맥에는 괴수가 득시글거리구요, 제대로 된 길도 없죠. 요정이 말루카에 숨어드는 걸 막아야 하니까요. 그런데 피웅덩이가 없으면 그럴 필요도 없는 거예요! 교역이 시작된다구요!"
벨레다는 잠시 생각하다가 되물었다.
"거래선이 뚫린다는 건가요?"
"그 전에 해야 하는 게 있죠. 오 년, 아니면 십 년 안에 산맥을 넘는 교역로가 완성될 거예요. 공사를 해야겠죠. 나무를 쳐내고, 산을 파내고, 길을 닦고, 괴수를 막도록 수호 각인을 새기는 거예요!"
그랬다. 대규모 토건 사업은 다시 원자재 가격의 상승으로 이어졌다. 당연한 이치였다. 나무를 쳐내고 길을 닦고 터널을 뚫기 위해서는 금속과 동력원이 필요했다. 매수를 걸면 무조건 먹는 것이다.
"물론 착공은 나중 일이겠지만, 늑대 신 이야기가 발표되면 마력 결정 가격이 단기 시세로도 2할은 훌쩍 뛸 거예요. 무슨 색깔이든 간에요. 시장이란 원래 그런 거거든요!"
비슷한 일은 많이 겪었다. 기준무게당 176이던 게 다음 날에는 181로 올라 있고, 그 다음 날에는 189가 되고, 펠로시는 그게 오르리라는 걸 알면서도 증거금이 없어서 손만 빨고 있었다.
그러나 벨레다는 카스바의 노예 기술자였고 돈도 많을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스승님, 이 제자가 진지하게 조언할게요. 로야페타 서부 거래소에 가서 매수 계약을 체결해요. 전 재산을 걸어도 돼요. 그 전 재산이 두 배, 세 배가 돼서 돌아올 테니까요."
벨레다는 펠로시를 빤히 보다가 치명적인 지적을 가했다.
"하지만 펠로시 씨는 모두 잃었잖아요."
"전 홀짝판에서 잃은 거지 선물 때문에 거지가 된 건 아니라구요. 매수나 매도 방향은 모두 맞췄어요. 증거금 만들 돈이 없어서 거래는 못 했지만요!"
펠로시는 쓰라린 기억을 억누르며, 태연한 척 원자재 가격의 역학을 설명했다. 비록 비참한 과거가 있을지라도 이성적으로 설득한다면 믿음을 얻을 게 틀림없었다.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마력 결정 가격이 올라간다고 했죠?"
"그럼요. 마력 결정의 수요는 평소에는 대부분 제조업이랑 마공학에서 와요. 달리 말하면, 세상이 혼란스러워지고 괴수가 날뛰면, 마법사들이 현장에 나가서 마법을 펑펑 써야 하니까… 전투용 수요가 엄청 늘어나죠! 겁먹은 사람들이 사재기를 할 테구요!"
깊이 고민하던 벨레다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펠로시 씨 말대로라면 지금 사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어차피 이런 일이 앞으로도 몇 번 더 있을 테니까, 그럴 때마다 단기로 시세차익을 챙기면……."
그녀는 문득, 자신이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말끝을 흐렸다. 대전쟁이 다시 일어나느냐 마느냐가 관건인 판에, 거기에 끼어들어서 재산을 좀 불릴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헤이딘이 여기에 있었더라면 귀에 박힌 잔소리를 늘어놓을 것이 분명했다. 뭐라던가, 신을 상대로 협잡질을 하지 말라고? 조금이라도 진지해져 보라고?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괜찮은 듯했다. 란드와르 일행이 이시 타브를 막는 데에 실패한다면 돈이 얼마나 있든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돈에 연연하는 것은 그를 전적으로 신뢰해야만 취할 수 있는 태도였다. 최소한 벨레다가 믿기로는 그랬다.
게다가 하인들 다섯은 카스바에 남아 있었다. 벨레다가 계속 자리를 비운다면 삶이 팍팍해질 터였다. 기본적으로는 자신을 죽이려 덤빈 악당들이긴 해도 같이 지내면서 정이 많이 든 상태. 퇴직금을 두둑이 챙겨 주고 싶었다. 카스바에서 뭐라도 할 수 있도록.
"서부 거래소라는 거, 어떤 식으로 거래를 터야 하는 건가요? 카스바 상인들만 만나고 다녔지 거래소를 낀 적은 없거든요."
"역시 우리 스승님이셔. 똑똑하셔서 그런가 이런 판단도 잘 하시네요! 자, 내가 알려줄게요. 일단 선물 거래용 계좌를 열려면 신분증이 있어야 돼요."
"신분증이요? 우르게슈에 차명 시민증이 있긴 한데… 꼭 필요한가요?"
"증거금이 0이 되고 나서도 계속 가격이 떨어질 수 있거든요. 보통은 그 전에 거래소가 계약을 알아서 청산해 주지만, 안 그러면 빚이 생기죠. 이걸 수금해야 하니까… 서부 거래소에서는 각 도시 당국이나 소속 교단한테 채무자 정보를 전달해요."
"그렇게 되면 어쩌죠?"
"설마 잃겠어요?"
펠로시와 벨레다는 서로를 마주보았고, 발랄한 웃음을 터뜨렸다.
* * *
같은 시각, 말루카.
미묘한 불길함이 란드와르를 압도했다. 손이 벌벌 떨리더니 힘이 빠졌다. 테네브로즈는 탁자에 엎어진 술잔을 보고는 의아한 투로 물었다.
"수전증이라도 있으십니까?"
"…뭔가 잘못된 것 같아. 느낌이 왔어."
"울쿠스에 대한 겁니까?"
뭐가 잘못됐지? 울쿠스를 설득했고 헤이딘을 데려왔다. 연극은 예정대로 공연될 터였다. 마지막 순간에, 볼로디아가 마음을 바꿀 리도 없다.
그는 앞으로의 계획을 되짚어 보았다. 일이 완전히 끝나면 화신이 내려온 시점으로부터 다섯 달쯤이 지나 있을 것이다. 반면 용병 임무에서 만난 마검사 꼬마와, 그러니까 로안과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것은 여섯 달째다. 한 달의 간격이 있는 셈이다.
그 사이에 보조 시나리오를 몇 개 뚫고 핵심 시나리오도 준비해둘 작정이었다. 어디로 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세카두 근처에서 건질 물건은 재생의 반지가 끝이니까, 다른 인간 도시로 시선을 옮겨 보자. 로야페타. 우르게슈. 킬카타라이. 카라나이. 아난드…….
어디로 가든 효율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모든 게 완벽했다. 완벽한데, 뭔가가 이상했다.
"아니야. 그냥…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거 같아. 피웅덩이랑은 관련이 없는데, 그냥,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어. 이걸 뭐라고 해야 하는진 모르겠는데……."
"기분으로 예언을 하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아니야. 그런 건 아니고……."
테네브로즈는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더니 다시 과자를 우물거렸다. 란드와르는 한동안 그 상태로 굳어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탁자를 치우기 시작했다. 이윽고 기계적인 동작 속에서 근거 없는 불안이 자취를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