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그리고 (3)
다음날도 란드와르는 아침부터 바빴다. 군부 일을 끝마친 다음 한 대 태우고 별채 숙소로 돌아오자 테네브로즈가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는 게 보였다. 각인 도면과 해석도를 써낸 후로는 줄곧 저 상태였다. 어차피 이제는 데리고 다닐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편해 보인다?"
"편합니다."
"나는 아침부터 온갖 곳 불려 다니고 있는데 편하냐?"
"편한데요."
란드와르는 침대 가장자리에 몸을 앉혔다. 푹신하니 편하긴 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협탁에 얹힌 종이곽이 시야에 들어왔다.
안에는 녀석이 극단 사무실에서 항상 먹고 다니던 과자가 들어 있었다. 울쿠스가 전해 달라며 유서를 남겼는지 캐러웨이 부인이 그랬는지, 아무튼 모종의 경로로 테네브로즈에게 한 상자가 들어온 상태였다.
"저거 안 먹냐?"
"저는 망자가 떠오르는 음식은 먹지 않는답니다."
"그러면 먹을 수 있는 게 없잖아. 니가 죽인 사람이 한둘도 아닌데."
"그래서 저는 망자를 기억하지도 않습니다."
또 개소리를 한다 싶었으나 표정을 보자 진지한 투였다. 이윽고 란드와르는 녀석이 구운 고기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원래도 고기를 잘 먹는 편은 아니었지만…….
"구운 고기 안 먹는 것도 그거 때문이냐."
"그런 셈입니다."
"이유 물어봐도 되냐."
"열 살 무렵의 일입니다. 친구를 잃었지요."
친구가 있고, 친구의 죽음에 마음아파 할 수 있는, 열 살.
테네브로즈에게도 유년기가 있었겠지만 그런 모습일 거라고는 상상한 적이 없다. 기껏해야 이스빈드를 죽이려 했던 귀족 소년들과 비슷했으리라고 짐작했을 뿐이다. 란드와르가 본 것은 동족 수백을 죽이고서도 태연한 모습이었으니까.
요정 놈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란드와르는 더 캐물을까, 멈출까 고민하다가 후자를 골랐다. 수십 년을 간직한 상처를 헤집어놓는 것은 도의가 아니었다.
* * *
인수인계는 중요하고 귀찮고 힘든 일이었다.
말인즉슨 볼로디아는 여섯 해간의 공백을 대강이나마 뛰어넘기 위해 온갖 보고서와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보스는 방향을 잡을 뿐이고 디테일은 실무진들이 채워 넣는 것이라지만, 명확한 수치가 없으면 방향도 나오지 않는 법이다.
따라서 란드와르가 볼로디아와 다시 독대하게 된 건 세카두로 떠나기 직전이었다.
"우선 중앙청 차원문을 써서 북부 기지로 간 다음, 거기에서 세카두로 돌아가면 되오. 나머지는 모두 폐쇄형이거든."
통신 규약이나 암호화처럼 세부적인 문제를 논하기 이전에, 차원문은 크게 개방형과 폐쇄형으로 나뉘어 있었다. 개방형은 좌표와 암호만 안다면 모든 개방형 차원문으로 통할 수 있었지만 폐쇄형은 설계 시점부터 도착지가 정해져 있었다.
"한 달 뒤에 다시 뵙겠군요. 세카두 외곽 수도원 좌표는 저번에 말씀드렸고……."
고개를 끄덕인 볼로디아는 생각났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그렇지, 그 각인사 여인은 어떻게 할 생각이오?"
"펠로시 말입니까?"
"일이 모두 끝날 때까지는 수도원에 가둬 둘 거라고 했잖소. 그다음에는 어쩔 예정인가 싶어 물어보았소."
"아."
고전적인 윤리 문제가 란드와르의 앞에 놓여 있었다. 파멸을 막기 위해 누군가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해도 되는가? 안 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철학자들의 의견은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실생활은 대개 철학서 바깥에 있기 마련이다.
"앞으로도 수도원에 둘 겁니다. 실패에서 교훈을 얻을 사람이었으면 카스바에서 그러고 살지도 않았겠죠."
"하지만 그 각인사에게도 공헌이 있잖소. 우연이긴 했지만, 부인에게 소개장을 써 주지 않았더라면 다른 결말을 보게 되었을지도 모르지."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석연찮은 투로 대꾸한 란드와르는 포도밭 골목의 흰둥이들을 떠올렸다. 연극 다음 날에 소식지가 모두 돌았으므로 그 사람들도 타우베스가 사실은 볼로디아였음을 알게 되었을 터였다.
그 지점에서 의식의 흐름이 다른 곳으로 도약했다.
"지금까지는 잊고 있었는데… 타우베스의 신분을 쓸 때, 펠로시와 혼례를 올렸다고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체류 기간을 연장할 용도로요. 그 탓에 캐러웨이 부인에게도 그렇게 말해야 했고요."
"나도 그 생각을 하는 중이오. 낮에 따로 불러서 물어보았는데, 자신은 굳이 말하진 않았지만 포도밭 골목 사람들도 알고는 있을 거라는군. 북부 기지 쪽에서 이야기가 새어나갔을 테니까. 소문이라는 게 원체 빠르지 않소."
"예, 이제는 타우베스가 실종된 첫째 왕녀였다는 것까지도 밝혀졌고요."
볼로디아는 신중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원래 주제로 되돌아갔다.
"어쨌건, 나도 그 각인사가 정신을 차릴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해맑고 유쾌한 건 좋은 성품이긴 하지만, 전 재산을 날린 상황에서까지 해맑은 건 문제가 있는 거요."
"대장군님께서 그러시니 낯선데요. 조금… 따뜻한 말씀을 하실 줄 알았습니다."
"끓는 물에 개구리를 던져 넣으면 곧바로 뛰쳐나오는 게 정상이라오. 솥 안에서 노래를 부르다가는 삶겨 죽고 말겠지. 듣는 사람들이야 즐겁겠지만……."
말이 멈추더니 서랍 열리는 소리가 났다. 볼로디아가 책상 밑에서 빈 종이를 꺼내고 있었다. 아래쪽에 왕실의 직인이 미리 찍힌 물건이었다.
"그래서 하는 이야기인데, 내가 그 아이를 맡는 건 어떻소?"
"맡는다고요?"
"별채에는 남는 방이 많소. 신에게는 부군이 필요하지 않으니 내가 혼례를 올릴 일도 없지. 교단 수도원에 평생 갇혀 살기보다는 그 편이 훨씬 나을 거요."
충격 때문인지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텅 비었다. 볼로디아는 지금 초라한 도박중독자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주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캐러웨이 부인에게 소개장을 써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그게 그런 은혜를 입기에 충분한 공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물론 볼로디아는 말루카의 왕이고, 왕에게 한 사람을 거두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아니, 아무리 그래도, 도박중독자가 신데렐라가 된다면…….
"그래도 됩니까?"
"펠로시도 결국엔 말루카의 시민이오. 인간들에게 과한 신세를 질 수는 없지. 마냥 풀어두면 또다시 신세를 망칠 걸 당신도 알 테고… 잠시만 기다려 보시오, 편지를 쓸 테니."
현실과 게임의 차이는 성과와 보상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게임에서는 결과가 과정을 보여주지만 인생에는 그만큼의 개연성이 없다.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도 망할 수 있고 절벽에 내걸린 삶도 한순간에 구원받을 수 있다.
얄궂고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씨발, 나는… 란드와르는 자신이 펠로시에 대해 무슨 감정을 품고 있는지 조망해 보았다. 질투였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랬다. 그는 더 추해지기 전에 멈췄다.
"그 편이 모두에게 나을 것 같군요. 국고에 손만 대지 않도록 조심하시면 되겠습니다."
* * *
란드와르는 세 번째로 우편배달 업무를 맡았다. 일단 북부 기지로 가는 차원문을 탄 다음, 거기에서 수레를 빌려 타고, 포도밭 골목까지 가는 것이다. 이번에는 그러려니 했다. 군부 대원이 대신 전달할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제님!"
이번에도 문을 열고 나온 것은 마조람이었다. 란드와르는 군부 대원을 운전석에 남겨둔 채, 테네브로즈와 함께 현관에 발을 들였다. 주방에 있던 아주머니도 그 소리를 듣고는 거실로 나왔다.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펠로시가 그 무뚝뚝한 인간이랑 결혼했다고 해서 기겁했는데, 세상에, 알고 보니까 그 사제가 사실은 왕녀님이었던 거예요! 게다가 스카르파에 피 웅덩이에 요정까지, 참, 소식지를 읽으면서도 이게 꿈인지 사실인지 분간이 안 가서 계속 눈을 깜박였던 거 있죠. 하루 만에 세상이 변했다고요. 밤하늘엔 새빨간 별이 달처럼 떠 있고요. 기절할 뻔 했죠."
마조람의 수다를 한 귀로 흘리면서, 란드와르는 품 안에 손을 밀어 넣었다. 손끝에 종이봉투가 잡혔다. 왕실의 인장으로 봉해진 편지였다.
"이 얘기까지 들으면 완전히 기절하겠는데요."
…얼마 지나지 않아 무대가 마을회관으로 변했다. 소식을 듣겠다고 몰려온 일가친척이 그만큼 많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펠로시는 두 해나 세 해쯤은 계속 인간 세상에 머물러 있을 겁니다. 그다음부터는 왕궁에서 지낼 테고요. 볼로디아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펠로시를 내버려 두면 인생이 망할 게 분명하니 옆에 두고 싶으시다더군요. 도움을 받은 것도 있으니까요."
"도움요? 무슨 도움요?"
누군가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동시에 물음표가 회관 전체로 번져나갔다. 란드와르는 소란을 진정시킨 뒤 사건의 개요를 차근차근 읊기 시작했다.
볼로디아가 기억을 잃고 카스바의 투기장에서 노예 검투사로 일하고 있었다는 것. 그녀를 구출하고 진상을 밝힐 임무를 맡은 게 자신이었다는 것. 펠로시가 써 준 소개장이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
"질문 있습니다!"
설명이 끝나갈 무렵, 흰둥이 하나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란드와르는 청중 한가운데에서, 팔을 번쩍 든 중년 남성을 발견하고 시선을 맞췄다.
"예, 말씀하시죠."
"그래서 볼로디아 폐하와 우리 펠로시가 정말로 혼례를 올렸다는 겁니까?"
란드와르는 펠로시의 머리가 꽃밭인 이유를 깨달았다. 유전은 무서운 것이었다.
* * *
늑대인간 아이들은 가득찬 마을회관에 끼어 들어가기보다는 시종 소년을 끌고 밖으로 나오는 쪽을 택했다. 덕분에 테네브로즈는 테네브로즈대로 바빴다. 카스바 투기장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서 온갖 질문에 대답을 해 주어야 했던 것이다.
테네브로즈는 큰 바위 위에 서서, 모여든 아이들을 내려다보며 부제사장 시절의 추억을 만끽했다. 열두어 살 남짓한 애들을 상대로 구도자가 된 느낌을 즐기는 게 꼴사나운 일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기분이 좋았다.
그는 따로 지시가 있는 게 아니라면 상식과 기분이 충돌할 때에는 기분을 따랐다. 이것도 잘못된 태도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는데 그냥 그렇게 살고 있었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야, 왔다! 왔어!"
그러던 와중 꼬마 중 하나가 뒤를 돌아보고는 외쳤다. 고개가 향한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자 여자애 하나가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게 보였다. 세이버리였다.
"쟤가 맨날 너 얘기만 했거든."
"쟤 삼촌이 그래서 엄청 화났다구……."
아이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테네브로즈는 빠르게 주판을 굴렸다. 백 해 가까이를 살아 놓고 골목대장 노릇을 하는 것이나 열두 살 소녀의 첫사랑 상대가 되는 것이나 추한 일이긴 마찬가지였다.
이왕 추한 일을 할 거라면 재미있는 걸 골라야 한다는 게 테네브로즈의 지론이었다. 체통을 지킨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어차피 남들이 보기에는 열네 살 소년인데 요정 부제사장처럼 행동할 필요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 그러면 세이버리랑 이야기하고 온다?"
환호성일지 야유일지 모를 외침이 터져 나왔다. 테네브로즈는 그 소리를 뒤에 남기고 세이버리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헤이딘의 일갈은 한 귀로 흘렸다. 반지를 빼 두었어야 했는데.
<그렇게 살면 부끄럽지도 않으냐?>
그는 세이버리 바로 앞에서 멈췄고, 시선을 똑바로 마주쳤다. 아이들은 멀리서 히죽거리기만 했지 따라오지는 않았다. 꼬마들치고는 상도덕이 있는 편이었다. 그는 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이야! 석 달쯤 됐으니까 오래는 아니지만, 잘 지냈어?"
"거짓말쟁이."
"거짓말이라니, 다 진짜야. 소식지 봤잖아."
세이버리는 대꾸하는 대신 테네브로즈의 손목을 붙잡고 척척 걸어갔다. 팔힘이 꽤 억셌다. 그는 잠자코 끌려가면서 가녀린 소년을 연기했다. 헤이딘이 다시 혀를 찼다. 반지에 들어 있는 게 란드와르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그랬더라면 분명히 욕을 했을 테니까…….
"나 며칠 뒤에 집에 가. 언니가 불렀어. 이제 포도밭 골목에는 안 와."
세이버리는 으슥한 골목에서 멈추고는 말했다.
"나도 이제 세카두로 가. 앞으로 말루카에 올 일이 있을지 모르겠네."
그러자 세이버리의 눈 한가운데에서 묘한 빛이 번뜩였다. 갖가지 단어가 부글거리는 것 같았다. 심장이 여남은 번 뛸 정도의 침묵이 있더니 다시 소녀의 입이 열렸다.
"계속 그때 꿈을 꿨어. 네가 칼린카를 죽였어. 얼음 단검 같은 게 아니라, 완전히 다른 거로. 그리고 나한테 어른처럼 말했어……."
"꿈은 원래 이상하잖아."
"나, 그게 무슨 마법인지 알아. 요정들이 쓰는 거야. 나도 배웠어."
세이버리는 손바닥을 가볍게 쥐었다가 펴며 손끝에 마력을 모았다. 검붉은 기운이 하얀 손가락을 얇게 감싸며 일렁였다. 직설적인 질문이 튀어나왔다.
"너는, 누구야?"
"사제님의 시종이지. 열네 살이고."
"사실대로 안 말하면 다 이야기하고 다닐 거야."
테네브로즈는 소녀를 직시했다. 결의인지 긴장인지 모를 기색이 얼굴을 덮고 있었다. 그는 똑같은 태도로, 밝게 되물었다.
"내가 여기에서 널 죽일 수도 있는데?"
"알려주면 말 안 할 거야. 아무한테도 말 안 해."
지금껏 어린아이를 죽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구운 고기를 먹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이유였다. 테네브로즈는 오래된 서약을 곱씹다가 손바닥으로 콧등을 쓸어내렸다. 그러자 인간 소년의 이목구비가 무너지며 요정의 것으로 변했다.
* * *
세이버리는 인간 소년과 무슨 이야기를 했냐는 질문에 침묵을 지켰다. 그래서 포도밭 골목의 아이들은 그걸 실패한 첫사랑으로 기억했고, 몇 달이 지나자 완전히 잊어버렸다. 세이버리가 보리 평야로 돌아간 탓에 놀릴 상대가 없어졌기 때문이다.